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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게임-118화 (118/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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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어둠은 빛의 부재

"무슨 일입니까."

하고, 요한이 말했다.

기파랑은 이미 알지 않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잿빛 눈동자를 찌푸리고 검지로 탁자를 두드렸다.

"저는 그런 데 낄 생각이……."

요한이 말하다가, 스스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숨처럼 말했다.

"알겠습니다."

기파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이 관련되었다는 것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이름이 거론되었으므으로 균형의 원탁을 결정하는 일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그를 죽이면 그 자리에 앉을 것이나 요한이 그런 자리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그는 그를 죽일 것이다.

임무니까.

권유나 제안이 아니다. 기파랑은 명령했다.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염려하는 것은 요한의 일이 아니다. 그는 전쟁터의 군인이고 그의 일은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

설사 그것이 맨몸으로 화망을 돌파하는 것이더라도.

자신의 죽음은 개의치 않는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잿빛은 영원히 죽음을 향해 수렴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므로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다만 빚을 갚지 못하는 것을 심려한다. 빈손으로 왔으므로 갈 때에도 빈 손이 마땅할 것이다.

그를 죽임으로써 짐은 한층 가벼이 되리라.

"핸더슨을 죽이고 오겠습니다."

시계탑의 핸더슨.

우주의 이치를 깨우친 자.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도 하고, 혹자는 그가 진정으로 깨우친 자라고도 한다. 그는 과거 런던이 마도의 중심이었을 때에도 여전히 마스터였던 자다. 그가 천착한 것은 시간, 그리고 운명. 그 추상적인 것들을 파고든 끝에 그의 마도는 어딘가 기괴하고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는 마법도, 성격도 수수께끼처럼 예측 불가능하다. 모두가 오른쪽을 볼 때 왼쪽에서 달려드는 불빛. 그래서 왼쪽을 가리키면 다시 우측에서 깔깔거리는 자.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유감은 없다. 핸더스는 기묘한 자지만 기행을 일삼기보다는 공방에 쳐박혀 사철 마도를 골몰하는 자다.

하지만 시간과 운명을 깨우친 자라면, 어차피 생은 유한하고 우주는 침몰한다는 것을 알 터였므로, 자신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잿빛 눈동자는 숙명의 죽음이다. 어차피 필멸하는 자들은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이 우주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결국에는 필멸한다.

그러므로, 누구도 내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걸 알아둬.

요한이 기파랑에게 등을 돌렸다.

"미카엘은 네가 죽을 것이라고 하더군."

요한이 웃었다.

요한이 문을 열었다. 허공을 향해 열린 문에서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아래로 펼쳐진 도시는 아직 한낮이다. 그의 잿빛 눈은 창공에 해가 타오르는 한낮에도 우주의 최후를 응시하고 겁에 질린다. 그가 틀렸어. 요한이 중얼거렸다.

"난 이미 예전에 죽었는데."

***

살 클랜의 회식은 언제나 신이 난다.

어제 클랜원들이 모두 뻗은 기념으로 회식하려던 규혁은 주경에게 욕을 한바가지 먹고서 취소했다. 종일 깨어나지 않고 사경을 헤매던 클랜원도 있었다. 하지만 이틀 정도 지나서 모두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규혁은 눈치를 주변 간부들의 눈치를 보며 회식을 열 수 있었다. 그 미카엘에게 당한 기념이라는 표어를 기어코 유지하고 싶었던 규혁은 그들이 모두 나자빠졌던 창고로 음식을 배달시켰다.

족발에 치킨에 피자에 온갖 것들을 쌓고 술은 더 쌓았다.

"마스터 멋있어요!"

"꺅!"

"크크크크. 자 받아라! 이것이 살 클랜의 배포다!"

현금 오만원권을 여자 클랜원에게 뿌리던 규혁은 결국 주경에게 명치를 쎄게 맞고 말았다.

"……쟤네가 무슨 도우미입니까?"

"커흑…… 스, 스미마셍……."

주경은 심기가 불편했다. 그녀가 꿰찼던 애인 수현이 요새 두문불출하며 그녀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사실 애인이라기보단 그냥 섹스 버디였지.

어쨌거나 살벌하게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클랜답지 않게 회식은 늘 화기애애하다. 규혁이 잔을 모아 술들을 섞어대고는 다시 하나하나 돌렸다. 그리고 원샷시켰다. 다들 취한다.

그래서 그들은 창고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뒤에서 찬바람이 새어들어와 한 클랜원이 짜증을 내며 돌아보았다.

"아이 씨, 뭐ㅇ……으이이잉?"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곁에 앉아서 술잔을 주고 받던 클랜원이 핀잔을 줬다.

"아, 형님 거 무게도 없이 깜짝 놀라고 그러실까. 대체 무스……느으에에엥?"

그 또한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결국 규혁이 벌개진 얼굴을 들어 손가락질했다.

"아, 거기 너희들 왜 이상한 소리내고 그래! 뒤에 뭐가 있ㄸ……뜨아아아아앗!?"

클랜원 전체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얼어붙었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는 자, 미카엘이 환한 금발을 찰랑이며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회식판을 바라보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도 끼어도 되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것마냥 규혁이 본능적으로 무릎 꿇고 조아리려다가 다시 주경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몸을 일으켰다.

미카엘과 규혁의 눈이 마주쳤다.

"……."

사람에게는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고, 다양한 관계가 존재한다.

어떤 이들에겐 친절한 청년, 어떤 이들에겐 무자비한 적, 어떤 이들에겐 능청스러운 마스터, 어떤 이들에게는 귀여운 아들이다. 규혁은 자신이 아는 모든 페르소나를 불러모아 지금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가면을 써야 했다. 규혁은 한 오 초간 바보처럼 멍때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 얼마든지 합석하십쇼! 헤헤헤."

주경에게 옆구리를 다시 쎄게 맞았다. 힘을 각성하기 전 젊은 시절 그는 나이트클럽 삐끼로 일한 경험이 있다.

"그만 때려!"

"명색이 클랜 마스터인데 그게 뭐에요!"

"크. 알았어. 알겠다고."

규혁이 미카엘 앞으로 다가갔다. 미카엘은 여전히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는 그 얼굴은 마치 중세의 조각상처럼 아름답다.

"미카엘 형님. 뭐, 이렇게 된 거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자, 동생이 한 잔 올릴테니 자리를 빛내주시죠."

규혁이 근엄하게 말했다.

물론 클랜원들은 그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미카엘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 형님 아닌데?"

규혁은 다시금 경악을 금치 못하고 미카엘을 돌아보았다.

"그, 그렇다면…… 누, 누님……?"

"그냥 미카엘이라고 해."

"네, 네. 미카엘님."

미카엘은 규혁의 옆에 앉았다. 창고라서 다들 퍼질러 앉아 먹고 있었으므로 미카엘도 편하게 바닥에 앉았다. 먼지 한 톨도 허용 않을 것 같은 화사한 모습인데 미카엘은 개의치 않았다.

"자, 형님! 아, 누ㄴ……, 아니 미카엘님! 지난 과거는 다 잊고! 털어버리고! 한 잔 합시다."

사실상 털어버릴 과거는 살 클랜이 미카엘에게 이유 없이 쳐맞은 것밖에 없다.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술을 마셨다.

"그래. 이거 맛있네."

미카엘이 양념 치킨을 뜯으며 말했다.

규혁이 벌떡 일어났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이 유명한 미카엘님께서 우리 살 클랜의 친구가 되셨다! 기분 좋다! 마시자!"

반응은 떨떠름했지만 다들 잔을 치켜들었다.

규혁이 다시 미카엘 곁에 앚으며 말했다.

"근데 정말 무슨 일로…… 이제 와서 제 목 떼가시려는 거 아니죠?"

"아냐. 그냥 지나가다가 배고파서 왔어."

미카엘이 족발을 먹으며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맛은 처음이라고 엄지를 치켜들다가 그게 돼지 발이라는 사실을 알고 얼굴이 살짝 썩었다.

그때 다시 입구가 열렸다. 창고 문이 스르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주었다.

"어, 꼬마 왔냐."

"빨리 자리 잡고 먹어."

"네."

수현이었다.

수현은 규혁의 권능언령살을 듣고 얻었으니 아예 연락을 끊으려다가, 그들의 분위기가 꽤 화기애애해서 헤어지기 아쉬웠다. 규혁은 수현이 가진 적 없는 동네 형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수현은 주경이 눈총을 감수하고 이곳으로 왔다.

"왜 내 연락 씹었어?"

"어, 그…… 여자친구가 눈치 채서…… 죄송해요."

"흥……."

수현은 그 여럿 중에 누구로 특정해야 할지도 모를 단어 여자친구를 팔아먹었다. 주경은 조금 누그러진 기색이 되었다.

"저건 누구에요?"

수현이 규혁 옆에 서 있는 자를 가리켰다. 금발금안,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는 자였다. 그 화사한 생김새는 마치 전신이 빛을 머금고 있는 것만 같다. 수현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미카엘."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수현도 미카엘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어서 놀랐다.

"그 미카엘이요?"

"그래. 놀랐지? 나도 어이가 없다, 야."

"신기하네요."

수현은 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빛이다.

빛 그 자체였다.

그가 여태 만난 이들 중 가장 강하다. 이브린도 그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다. 그래서 수현은 힘을 뻗어 그를 더 탐색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아마 눈치챌 것이다. 게다가, 저 빛은 수현의 어둠을 지우고 있었다.

어둠은 빛이 부재하는 곳에서만 이를 드러낼 수 있다.

언젠가는 만나겠지 생각만 했던, 자신보다 강력한 존재를 이렇게 마주하자 수현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이 세계최강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으나, 그간 자만했던 것은 사실이다. 어떤 문제도 힘으로 무마시킬 자신이 있었다. 수현이 정글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그가 거스를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미카엘은 수현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그의 존재도 모르리라. 당연한 일이었다. 어둠은 빛이 부재하는 곳에서 숨쉰다. 저렇게 빛 그 자체인 자는 어둠을 보지 못한다. 수현은 자신의 존재감을 고요히 내렸다.

오늘은 음식이나 실컷 먹어야지. 요새 돈 많다고 음식을 산처럼 쌓아서 다 먹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다.

수현이 주경 옆에 앉았다. 주위에서 술잔이 밀려들었다. 수현은 곤란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술을 홀짝이며 문득 미카엘을 쳐다보았다. 그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음식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옆에서 규혁이 무어라 떠들어대며 술잔을 부딪친다. 대천사의 이름을 가진 자, 빛 그자체인 이 미카엘. 수현은 자신의 안을 관찰했다. 오만방자한 그 짐승, 처음으로 만난 천적에게는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하지만 녀석은 조용했다. 겁을 먹은 것도, 적의를 태우는 것도 아니다. 마치 자장가에 취한 아이처럼 그 자리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것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있었나. 수현은 자신도 어쩐지 평온해지고, 막연히 들뜨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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