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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어둠은 빛의 부재
그는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인다.
그는 선인으로도, 악인으로도 보인다.
그는 중천에서 이글거리는 해를 닮았다.
"나는 한국보다 일본이 좋아."
"……."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니, 웃기잖아. 해가 떠오르는 그 시간은 결코 고요할 수가 없는데."
해가 거느리고 오는 아침은 만물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그늘에 숨은 모든 것들이 까발려져 허둥지둥 뛰쳐나가고, 눈 감은 것들은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잎새에 걸린 이슬은 홀연 허공으로 스러지고, 밤하늘에 걸렸던 먼 항성들의 빛은 그 색을 잃고 회칠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발가벗기는 해는 중천까지 기어올라가 그들을 내려다볼 것이다.
"일본. 해가 떠오르는 나라. 얼마나 좋아."
그의 머리카락은 휘황한 금발이다.
눈동자 또한 찬란한 금빛이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는 그는 목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한 번 흔들었다. 햇살이 머리카락의 질감을 따라 반짝거렸다. 그의 미소는 밝아서, 다시 한 번 수식하자면 해를 닮았다.
그의 이름은 미카엘. 대천사의 이름을 가진 자다.
"어이. 기분 상한 거야? 나도 한쿡 좋아해요. 킴취 맛있어요."
"……이쪽입니다."
"삐지긴."
미카엘이 키득 웃었다. 그는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지만 흰 셔츠 아래의 가슴은 편평하다. 그러나, 그의 우아한 몸짓과 기다란 팔다리는 또 여성을 연상케 한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면 이 농담들은 악의가 없는 짖궂은 장난 같은데, 웃고 있는 눈빛은 그 아래에 진심 어린 경멸이 고여 있을 것처럼 불길하다. 그는 하늘을 향해 팔을 쭉 폈다. 햇살을 그러모으는 것처럼 허공을 움키고는 자신의 손등에 키스했다.
"농담이야. 어디에 있든 해는 똑같이 우리를 비추지. 해 아래의 땅은 어디든 내게 똑같아. 한국도, 일본도. 아메리카도."
"타시죠."
"너 나한테 대꾸 안한다?"
미카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은 세단의 뒷좌석을 열던 남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대답하겠습니다."
"그래. 잘하네. 고쳐. 간만에 니네 마스터나 보자."
"예."
"그 꼬마, 조셉? 베드로? 뭐더라? 여튼 그 꼬마도 있다며?"
"요한입니다. 예, 그는 마스터의 휘하에 있습니다."
"기분 좋네. 나 그 꼬마 좋아하거든. 눈이 예뻐, 아주 예뻐."
남자는 어깨를 떨었다. 요한이 가진 잿빛 죽음의 눈동자는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입에 담기도 두려워하는 그것을 예쁘다고 웃는 이 남자는 얼마나 괴물인 것인가. 눈길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그 사안(邪眼)은 빈말로라도 그런 말로 포장할 수 없다. 요한의 눈동자는 정글의 주민들에게 죽음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보다 더한 존재다.
균형의 수호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상석에 앉는 자. 대천사의 이름을 지닌 사나이. 혹자는 그를 여성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그를 남성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히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이들은 또 그를 무성(無性)이라고 한다.
그 혹자들은 미카엘을 성경에서 이르는 천사라고 했다. 정글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에도 이름이 나오는 존재. 무한정한 빛을 부리는 광휘의 사도. 그가 뜻한 것들은 한 번도 그르쳐진 적이 없다.
미카엘은 뒷좌석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며 싱글거렸다. 신도시라 외양이 예뻐서 그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한국 많이 발전했네. 그만큼 괴물도 많아졌겠어."
"네."
"기파랑은 요새 뭐해? 여전히 그 골방에서 얼굴 가리고 흑막놀이하니?"
"……전 그저 그분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남자는 앞차의 뒷꽁무늬를 물고 멈추어서는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흘끗, 백미러로 뒤를 보니 미카엘은 창밖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남자가 말했다.
"차가 막힙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할 게 뭐 있어."
좀처럼 정체가 풀리지 않자, 미카엘이 흥얼거리는 와중에 한 마디를 했다. 꿈결 같은 목소리라 남자는 그냥 허밍인 줄 알고 잠시 그의 말을 놓쳤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밟아."
"그게 무슨……."
미카엘이 흥얼거림을 멈추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남자의 운전석 시트에 턱을 괴었다.
"액셀 밟으라구."
"그건……."
눈앞에는 수많은 차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가 미카엘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는 미카엘이다.
정글 역사상 가장 전능에 가까운 존재다.
되묻는 것은 무례일 것이다. 그는 참을성이 많지 않다. 길게 숨을 내뱉았다가, 들이마셨다. 미카엘의 입이 다시 열리기 전에 남자는 액셀을 밟았다.
차가 미끄러진다.
앞차의 뒷범퍼를 향해 나아가던 차는.
그대로 통과했다.
차는 눈앞의 모든 것들이 마치 환영인 것처럼 그대로 통과하기 시작했다. 차의 속도계가 급격히 꺾였다. 차창 너머의 풍경들이 흐리게 빛나기 시작했다.
윤곽들이 일그러지며, 그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마치 환각에 둘러싸인 것 같다. 도시는 온통 빛을 발하며 실루엣을 일그러뜨리고, 그 꿈결 같은 빛의 도시를 차가 가로지른다. 남자는 그저 액셀을 밟고 있는 것만으로 족했다. 도로가 스스로 몸을 꺾어 그들에게 길을 내주었다. 장애물들은 그저 환영인 듯 스쳐지나갔다. 목표는 기파랑. 차는 몽환을 달린다.
남자는 탄성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미카엘이다. 경외로 가득 찬 존재.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는, 악행을 하고, 또 선행을 하는, 대천사의 이름을 가진, 한없이 전능에 가까운 이.
***
허공을 향해 나 있는 문 하나.
그것이 바깥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다. 이 삼가한 곳이 철십자 클랜의 마스터, 기파랑의 방이다. 그리고 가운데 놓인 탁자에서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전등 불빛에도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을 미카엘이 쓸어넘겼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는 그 얼굴은 분명히 아름답다. 기파랑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얼굴을 가린 철가면을 두드렸다. 하나 난 틈으로 보이는 눈은 결코 편한 기색이 아니다.
"왜 나를 찾아온 거지?"
"오랜만에 얼굴 보고 좋잖아."
"그 목소리를 가진 애송이 때문이라면 위치를 알려주겠다."
"위치는 알고 있어."
"그럼 다시, 왜 나를 찾아온 거지?"
"말했잖아. 얼굴 보고 싶어서."
기파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철가면을 쓴 그에게 저런 농을 지껄일 수 있는 건 역시 이 자 뿐이다.
기파랑이 내어준 자료를 미카엘이 흘끗 훑었다.
"권능언령살? 재밌는 이름이네. 그 애송이는 꼭 만날 거고, 하나 더 알고 싶은 게 있어."
"뭐지?"
"새로운 멤버를 추가하자고 연락이 왔는데."
기파랑이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미카엘이 미소지었다.
"누군지는 알지? 대부분이 동의했어. 너는 어때, 균형의 수호자들의 일원으로서."
균형의 수호자들, 말 그대로 정글과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자들이다. 문자화된 기준은 없다. 인간세상에 심히 영향을 끼치거나, 분쟁이 너무 과격해지면 그들이 나타나 모든 것을 가라앉힌다. 그들 자신이 기준이다. 그들이 행했던 단죄의 기록들을 통해 그들의 기준을 유추하여 행동반경을 제한할 수 있지만, 이따금 그들 마음가는대로 움직이기도 했기에 그들은 그저 예기치 않은 재앙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들을 독선적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을 저지할 순 없다.
진정한 룰은 오직 하나니까. 승자가 모든 것을 얻는다. 강자존의 법칙.
균형의 수호자들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모든 구성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잘 알려진 것은 역시나 대천사의 이름을 가진 자, 미카엘, 뱀파이어들의 군주 체페슈, 아프리카의 상아왕, 기사(騎士) 에다드, 마도의 정점 크로울리. 기존 멤버들의 협의 하에 자격을 시험하여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인다. 직접 움직여 룰을 행사하기 전에는 소속조차도 알 수가 없으므로 그들의 진면목은 알려지지 않았다.
기파랑, 그도 이 원탁의 오래된 일원이었다.
"불가(不可)."
미카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너무 악하다. 균형의 저울을 가늠할 그릇이 아니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하네. 얼마 전에 굴렉도 자살했어. 더 뽑아야 된다고."
"요한은 어떤가?"
미카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거 괜찮네. 눈이 예쁜 녀석이었지. 하지만 충분히 강할까?"
"네가 말한 그놈보다는."
"……정말로?"
미카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닌 것 같은데. 알잖아. 난 결코 틀리지 않아."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번엔 뭔가 다르단 거야?"
기파랑의 눈이 휘었다. 그가 웃고 있다는 걸 미카엘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최후를 들여다본 자니까."
"……."
"너의 그 몇 안되는 예외에 해당하지 않나?"
미카엘의 얼굴이 구겨졌다. 기파랑이 말을 이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미카엘. 대략의 그림은 볼 수 있다. 물론 다른 이들도."
미카엘이 입술을 비틀었다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좋아. 기파랑. 내기하지."
미카엘이 웃었다. 여자로도, 남자로도, 선인으로도, 악인으로도 보이는 그이지만, 지금 그는 명백한 악의를 띄우고 있었다.
"그놈과 요한을 붙여. 이기는 쪽이 우리의 일원이 된다."
기파랑이 눈을 감았다.
문득 인 바람이 미카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빛이 산란하듯 금색이 퍼져나갔다.
기파랑이 눈을 떴다.
"알았다."
"좋아. 성립이다."
미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역시 널 만나면 뭐든 어긋나는 느낌이야. 재수 없어."
기파랑은 조용히 웃었다.
"에이. 난 그 애송이나 보러 가야겠다."
"넌 그들에게서 뭘 찾는 거지?"
"알 거 없어. 넌 바보가 아니잖아? 그 대략의 그림으로 유추해보라고."
미카엘이 머리를 흔들었다. 찬란한 빛이 새어나왔다. 이내 그의 모습이 희미한 빛무리로 화하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반짝이는 빛깔들만 흘러나오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가 떠나간 방은 한층 어둡다. 기파랑의 눈 또한 그늘 속으로 가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