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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위잉. 위잉.
수현은 멍하게 서 있었다.
휴대폰이 계속해서 울리다가, 이내 진동이 멎었다. 액정에는 부재중 메세지가 여럿 떠 있었다. 수현은 쇼파 위로 폰을 던졌다.
잠깐의 스파이 놀이는 재미있었다.
그가 원하던 것도 보고 들었다.
수현은 창가에 걸터 앉아 골똘히 생각했다.
그때의 모습이 다시 머릿속으로 재생되었다.
주경의 음소거가 그들 살 클랜의 진영에 차음의 장막을 펼쳤다. 수현은 그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가, 규혁이 말하는 권능언령살의 영역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수많은 이들이 규혁을 향해 시선을 붙박고 있었다. 모두가 무방비가 되어 적의 선고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그들의 눈동자는 공포로 흔들렸다. 수현은 그들 하나하나의 눈을 다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규혁의 입을 바라보았다.
생과 사가 일순 결정되는 결착의 순간.
수현은 귀를 기울였다.
규혁이 말했다.
"---------."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하나의 울림이고, 진동이자 공명, 그리고 하나의 개념이었다. 하나의 장면이었다. 수현은 그 순간에, 요한의 눈동자에 깃든 잿빛을 볼 수 있었다. 그 잿빛 아래에는 까마득한 어둠이 있다. 우주의 최후, 세상의 최후, 모든 것들의 마지막에, 모든 빛들이 쇠한 허무의 파노라마. 엔트로피는 역전할 수 없다. 우주는 영원히 식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이르는 하나의 목소리.
까마득한 최후의 이름.
그것이었다.
규혁은, 그의 피를 타고 흘러온 모든 정보와 힘들 속에서, 그 이름을 발현해냈다. 모두가 결코 알고 싶지 않아하는, 보고 싶지 않아 눈 돌리는 그 최후의 증언을 그는 핏줄 속에서 기억해낸 것이다. 그것이 그의 힘, 권능언령살이다.
요한이 그 까마득한 최후를 자신의 눈 속에서 직접 보여준다면.
그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이 잊어버려 핏줄 속에만 맥맥이 흐르는 그 최후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수현이 그 힘을 주시했다. 그는 모든 힘들을 카피할 수 있다. 정하의 힘도, 뱀파이어의 모든 능력들도, 예브게냐의 정신지배도, 이브린의 브레스도 그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의 어둠은 모든 것들을 구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요한의 힘인 죽음의 시선만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면, 규혁 너는 어떨까.
나도 너처럼, 표현할 수 없는 그 한 마디로 적들을 죽일 수 있을까.
그의 힘이 보였다. 그 원리들은…… 그 힘은…….
수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선고의 찰나가 지나, 모든 적들은 허물어졌다.
적들은 버텨내지 못했다. 필멸자들은 필연적으로 멸한다. 그 멸이었다. 수현은 들키지 않도록 한 걸음 뒤로, 주경의 영역에 들어섰다. 다시금 침묵이 우렁하다. 저 너머에서 규혁이 손을 들어 브이를 표시했다.
그가 선고한 죽음으로, 두 클랜이 몰살당했다.
죽음을 선고하는 자, 권능언령살의 규혁.
다시 윙윙거리며 창고의 팬 돌아가는 소리, 거친 숨소리가 귀로 새어들어왔다. 음소거의 기운이 걷히자, 모두가 소리 높여 환호했다.
살! 살! 살!
그들의 이름을 연호한다. 규혁이 더 소리치라는 듯 양팔을 올렸다.
그 속에서 수현은 자신이 들은 그것을 되새기고 있었다.
자신은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 힘은 수현 안에 있었다.
수현이 창밖에서 정원에 물을 주는 올가를 발견했다. 그녀를 보면 그냥 웃음이 나온다. 수현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쇼파에 앉았다. 늘상 여기에 죽치고 있던 이브린이 없어서 마음껏 누웠다.
"---------."
수현이 말해보았다.
순간 싸늘한 적막이 거실을 휩쓸고 지나갔다. 죽음의 손길은 그가 없앨 생명을 찾지 못하고, 헛되이 허공을 움키고 지나갔다. 그 소름끼치는 적막.
권능언령살.
그것은 우주의 최후의 이름이다.
수현은 그것을 규혁에게서 흡수해냈다.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이 소리를, 수현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기분이었다.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 있던 것이 우연한 계기로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수현은 무의식 아래에 있던 그것을 다시 채어 올린 듯한 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자신은 이걸 알고 있었나.
그 울림이 낯익었다.
이브린에게 물으면 그녀는 이리 답하겠지.
역시 주인은 사기캐로구나.
요새에 유행하는 단어를 습득한 이브린이 수현에게 즐겨 쓰는 말이었다. 사기캐로구나. 수현은 생각했다. 내가 사기캐이긴 하지.
하지만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수현은 규혁이 가진 죽음을 수집했다.
그리고는 다시 생각하기를, 요한의 죽음을 직접 보고 싶다.
그가 가진 죽음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요한의 전화번호는 휴대폰에 있었다. 수현은 휴대폰을 들어, 제법 쌓인 주경의 부재중 메세지를 무시하고, 전화번호부에서 요한의 이름을 찾았다. 통화, 문자 버튼. 수현은 그것을 들여다보며 엄지를 허공에 놀리다가, 이내 카톡에 접속했다.
요한에게 카톡을 했다.
[수현 : ㅎㅇ]
***
[요한 : ㅎㅇ]
요한이 폰을 두들겼다. 아날로그 감성을 중시하는 그가 여느 현대인들처럼 조그마한 액정에 눈을 붙박고 열심히 엄지를 놀리는 모습에, 곁에 서 있던 강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깨를 기울여 그의 액정을 훔쳐보려고 애쓰다가 요한의 어깨빵에 뒤로 밀려났다.
"누구랑 그렇게 열톡해요?"
"열톡이 뭐냐?"
"열심히 톡. 썸타요?"
"썸은 또 뭐야?"
"하. 말을 말아야지. 노땅 냄새."
요한은 조용히 손을 놀린다.
그들은 차에 앉아 잠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살 클랜의 동향을 주시하는 것이다. 어제부로 일진회 클랜과 레이더스 클랜이 몰살당했고, 스캐빈져들이 포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두 클랜의 영향력을 지우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정글의 클랜들은 필연적으로 주로 뒷세계의 권력에 연관된다.
요한이 불쑥 말했다.
"야. 넌 남자랑 키스하고 싶었던 적 있냐?"
"헉…… 죄송합니다. 전 마음 못받아줍니다. 전 게이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게이가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죠."
"나도 게이 아냐."
"예전에 바티칸에 있었죠? 지나친 금욕으로 그쪽 세계에 빠지기도 한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마음을 편히 여십쇼."
"바티칸에서 금욕 안했어."
"헐?"
"거기가 얼마나 잘 노는데. 쌔끈쭉빵 성직녀들이랑 올나잇이야 임마."
요한이 폰을 주머니에 넣고 의자에 기댔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아련히 먼 기억을 더듬었다. 이수현. 이 꼬마는 그로서는 측정하기 힘든 존재였다.
그 날, 자신이 그 꼬마에게 키스한 그 날 이후로 요한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그는 그에게 이끌리는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가슴에서부터 기쁜 감정이 들끓고, 그에게 자신의 살갗을 맞대고 싶었다. 연결되고 싶다는 그 욕망은 우발적인 키스로 이어졌다. 그것은 무슨 징조일까. 요한은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그는 호모섹슈얼이 아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고, 그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그에게 키스한 그 날도 그를 이끈 것은 정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위대한 예술품, 시대를 초월한 걸작에 경의를 표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는 선지자였던 그때부터 모든 것들에게서 의미를 찾는 연습을 해왔다. 갑자기 그의 마음에 불었던 그 바람에도 뜻하는 바가 있을 거였다. 하지만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 소년의 어디가 그를 충동질했는지,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살 클랜 동향은 어때."
"다들 축하주 먹고 뻗은 것 같은데요."
"잘 보고 있어. 나 잠시 갔다 온다."
"네? 데이트?"
"그래. 데이트다."
요한이 차에서 나왔다.
주차되어 있던 새까만 외제 세단에서 근사한 백인 남자가 걸어나오자, 거리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요한은 두 달 월급 다 쏟아 부은 비싼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수현이 만나자고 한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흘끗 주변의 카페를 확인했다. 커피나 좀 사갈까.
됐어. 남자놈 만나는데 뭘.
요한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갔다. 큰 키에 늘씬한 체형, 우수에 젖은 잿빛 눈동자. 이 순간 거리는 그냥 길이 아니라 그의 런웨이다. 여자들의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에게 길빵한다고 나무라는 이는 없다.
그는 연기를 흘리며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길의 끝에서, 기다리는 수현을 보았다. 성장기라 부쩍 자랐는지, 예전보다 키가 컸다. 그러나 여전히 실루엣은 가냘프다. 머리를 새로 했는지, 머리가 잘 어울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이 분위기 있었다. 하얀 얼굴이 요한을 돌아보았다. 아아, 저 얼굴이다. 요한을 발견하고는 슬쩍 미소 짓는 그 얼굴이 아름다워서 요한은 눈뗄 수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길에서 담배피면 어떡해요."
수현이 요한의 입에서 담배를 낚아채 꺾었다. 꽁초는 수현의 손에서 인 어둠에 휩싸여 스러졌다.
요한은 새삼 깨달았다. 이 녀석은 어둠을 휘두르는 자, 기파랑조차 끝을 가늠하지 못하는 강력한 힘의 주인이었다.
"무슨 일로 불렀냐?"
수현이 애매한 미소를 머금고 가만히 요한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눈동자는 평온한 잿빛이다. 그 안에 그가 들인 죽음은 비치지 않는다.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그 얼굴을 보자 요한은 다시금 그 충동에 휩싸였다. 이 아름다운 존재. 저 분홍색 입술.
"눈, 봐도 돼요?"
곧바로 이해했다. 요한은 수현을 내려다보았다. 안될 것 있냐는 듯 웃는 그 얼굴에 혹할 뻔 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위험해."
"괜찮아요. 전 안죽을 거에요."
"그럴 수도 있겠지. 굳이 시험해볼 필요는 없다."
"살 클랜의 마스터."
수현의 말에 요한이 미간을 치켜올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저는 죽지 않았죠. 그래서 궁금해졌어요. 당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다고. 요한이 한숨을 쉬었다. 이 눈동자를, 언제나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겁에 질린 이 눈동자를 너는 보고 싶다고 말한다.
네가 볼 것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네 죽음의 모습일 것이다.
나 또한 궁금하다. 네 죽음은 어떤 모습일지.
모든 생명은 유한하므로, 너, 아름다운 너조차 결국에는 종말에 이르겠지.
그 모든 아름다운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슬퍼졌다.
수현은 흐응…… 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한다. 그 비딱한 얼굴조차 이리 완벽한 것인지. 그의 그림자에서부터 흐르는 칠흑의 어둠이, 그에게 묘한 색기를 드리운다. 어둠을 삼킨 짐승, 이 아름다운 소년.
요한의 불쑥 요한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다.
그의 얼굴이 아래로 끌려갔다. 눈앞에 다가온 소년의 깨끗한 얼굴. 요한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리고 마주한 그의 새까만 눈동자.
자신이 마주했던 그 우주의 최후가, 마치 이러한 칠흑이었을까.
요한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식어버린 비참한 모든 것들의 최후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눈은 어떻게 빛바래어 버릴지.
하지만 결국 요한은 자신의 죽음을 내보인다.
하지 않음이, 할 수 없음과 같다.
요한은 수현을 거스르지 못하고서,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자신만만하게 웃는 소년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한층 까마득히 가라앉는다.
너는 보고 있니.
너의 죽음은 어떤 모습이니.
수현의 새까만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요한은 이 소년이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눈을 마주하고서도 죽지 않은 두 번째 존재. 미카엘은 그를 내팽개쳤었다.
그리고 수현은.
이윽고 수현은 속삭였다.
"고마워요."
수현이 그를 놓아주었다. 자신의 아래에서 약동하는 소년의 존재감이 그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이것은 대체 무슨 감정인가. 사랑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성욕이라고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이끌리는 자신의 마음은 무엇인가.
생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잘 봤어요."
둘은 헤어졌다.
카톡해요, 라고 수현이 말했을 때 요한은 기뻤다.
요한은 강선에게 돌아갔다. 멍하게 풀린 얼굴로, 조수석에 몸을 파묻고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
그러다가 강선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없다.
죽어 있었다.
뒷좌석에서부터 칼날이 달려들었다.
요한이 몸을 비틀어 피했으나, 칼날이 뺨을 베고 지나갔다. 피가 흘러내렸다.
살 클랜의 암습자였다. 다시금 그를 향해 베어드는 칼을, 요한은 맨손으로 잡았다.
"……!"
손에서부터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아프지 않았다. 감정이 고조되었다. 수현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들떴다. 무엇도 두렵지 않다.
요한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암습자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자.
너의 죽음은 어떤 모습이지?
그의 눈이 바래어가더니, 이내 허물어졌다. 요한이 투사한 죽음이 오늘 또 다시 한 명의 생명을 빼앗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필멸하는 존재니까. 우주는 영원히 침몰할 테니까.
차 안에 내려앉은 어둠, 서랍 안의 어둠, 우리 옷깃이 접힌 그 사이에 자리한 그늘, 시체의 뱃속에, 콧구멍 속에 자리한 그 어둠에서부터 스캐빈져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글의 청소부. 정글의 주민들이라면 피 한 방울, 털 하나까지 씹어 먹어버리고 사라지는 의문의 괴물들이 소란스레 웅성거렸다.
요한은 백미러를 보았다. 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스캐빈져는, 그에게는 얼씬하지 않는다. 그가 흘린 피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죽어버린 강선과, 암습자의 시체를 씹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피는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어둠 안으로 먹혀들지만, 요한의 것은 그대로 시트를 물들이고 있다.
요한은 자신의 피로 물든 차 안에서, 눈을 감았다.
네가 보았던 죽음은 어떤 모습이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