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14화 (114/180)

0114 / 0180 ----------------------------------------------

26.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거기 꼬마는 누구야?"

규혁이 수현을 가리키며 물었다.

수현은 주경에게 목을 감긴 채 안겨서 그녀가 주는 대로 술과 안주를 받아먹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 살짝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집에서 정하, 예브게냐와 함께 비싼 와인 같은 것들을 즐기기도 했고, 가끔 소희와 학교 무리 몇몇과 어른 흉내를 하며 소주를 마신 적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한국식 술자리는 낯설었다. 수현은 주변의 능력자들이 주는 술을 다 받아먹어야 했다.

그 와중에 규혁이 옆으로 다가왔다. 겉보기엔 아주 예전에 취해버린 모습인데, 실은 주량이 상당한지 그 모습 그대로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술을 건배했다. 가벼워 보여도 마스터로서의 입지는 훌륭한 것 같다.

"궁금해요? 내 새 애인."

"뭐야, 나 지금 차인 거야?"

"수현. 오해하지 마. 츄. 저 아저씨랑은 엮인 적도 없으니깐."

"내가 아저씨라니 기준이 너무 엄격한데? 역시 영계사냥꾼."

주경은 취하면 스킨쉽이 많아지는 것 같다. 자꾸 엉겨붙는 그녀에게서 벗어나며 규혁이 주는 잔을 받았다. 그는 딱 반 잔만 채워주면서 윙크했다. 그 손놀림을 보고 수현은 생각했다. 이 사람 완전 제정신이다. 입으로는 마구 지껄이는 가운데 적당히 마시라는 듯 반만 채워주는 그 행동에 수현은 왜 그가 클랜 마스터인지 알 것 같았다.

"학생이야? 얼굴 보니 인기 많겠네. 나도 그땐 잘 나갔는데. 이젠 이런 아줌마랑 노는 신세다."

"내가 왜 아줌마야?"

"봐. 이런 말에 흥분하는 나이가 되면 그때부터 아줌마가 되는 거란다."

규혁이 웃으면서 잔을 부딪쳐왔다. 수현은 마치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동네 친한 형과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수현은 예의를 차린답시고 고개를 돌려 마시려고 했는데, 그가 괜찮다며 크게 나무랐다.

"임마! 우리 클랜은 그런 거 업서! 똑바로 보고 마셔! 원샷!"

수현이 엉거주춤 술을 들이키고, 투명한 액체는 턱끝을 타고 흐른다.

온통 취기에 가려 현실감이 흐트러지고, 몸과 머리가 붕 떴다. 웃어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흐리다. 수현은 취기를 굳이 떨쳐내지 않고 그러모아 안에 두었다. 싱긋 웃던 규혁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우리 막내, 형한테 뽀뽀!"

"아, 징그러. 뭐하는 거에요."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얘 너무 귀여운데?"

수현이 웃었다. 주경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규혁이 자작해서 자기 술잔을 채웠다. 수현에게도 술을 따르다가, 애 상태가 괜찮은가, 눈을 슬쩍 쳐다보았다. 수현이 그를 마주하며 배시시 웃었다. 규혁은 순간 심장이 쿵해서 뒤로 몸을 물렸다. 아, 이거 장난 아니네. 그는 괜히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술잔을 내밀었다. 수현이 잔을 부딪치고, 둘은 다시 한 잔을 들이켰다.

규혁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대개는 금연이지만 크지 않은 가게를 클랜원들이 다 차지한 데다가 이쪽 사장과도 잘 아는 사이라 늘 오케이였다. 연기를 한숨 내뱉자, 그간 쌓인 것들이 함께 흘러나가는 것 같다. 규혁이 빈 잔을 들어올려 그 너머로 웃고 떠드는 클랜원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예뻐도 남자한테 관심 갈 취향이 아닌데, 나는.

규혁은 생각하며 곁에 앉은 여자 클랜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를 평소 흠모했던 여자라,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규혁은 늘 그랬던 것처럼 넉살 좋게 받아주며 다시 그녀에게 술을 따랐다.

이거 좀 이상한데.

규혁은 허벅지에 손을 올려오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상한데…….

솔직히, 아까 입맞출 뻔 했다.

그가 흘끗 수현을 바라보았다.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발그레한 채 주경과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가 장난치며 어깨동무하고 머리를 기대자 마주 어깨를 안고 토닥여주었다. 순진해보여도 여자 여럿 굴러본 모양새다.

그는 소주잔을 치우고, 글라스에 소주를 콸콸 따랐다. 옆에서 호응하며 소리를 높인다. 차오른 액체 위에 레몬 조각을 하나 빠뜨리고는 말했다.

"아, 목 마른데 레모네이드 한 잔 해야겠다."

그리고 쭈욱 들이킨다.

***

작전은 생각처럼 잘 진행되지 않았다.

"어라라."

살 클랜이 창고로 진입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두 클랜이었다. 그들은 떨어진 채 무리를 지어 살 클랜을 노려보았다. 양쪽 클랜의 마스터들이 앞으로 나섰다.

딱 보아도 함정이었다. 그들은 살 클랜을 기다린 것이다. 클랜원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규혁은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여어. 앙숙이던 둘이 이젠 붙어먹었나 그래?"

"네가 꾸민 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참 빨리도 아셨네, 멍청이들. 그래서 그렇게 죽어나셨어?"

"이놈이!"

일진회 클랜의 마스터가 앞으로 달려드려는 걸 레이더스 클랜의 마스터가 막았다.

"흥분하지 마라. 멍청이."

"크윽……!"

"그래서, 니네끼리 싸우다 주력은 날려먹고 이제야 힘을 합쳐보겠다는 거야?"

규혁이 이죽거렸다. 그들 뒤에 선 능력자들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인원은 살 클랜이 압도적으로 적다. 살 클랜은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는 이들만 받았으므로, 질은 더 나을지 모르지만 병력 자체에서는 저들에 미치지 못했다. 거기에 둘이 힘을 합쳤으니 그들로서는 몇 배나 더 많은 인원을 상대해야 했다.

아주 나쁜 상황이다.

"뭘 믿고 까부는진 모르겠지만, 더 말을 받아줄 필요는 없겠군. 대화는 십분 후에 다시 해보자고."

레이더스 클랜 마스터가 말했다.

"그땐 무릎 꿇고 빌빌 기어야 할 거다."

그가 손을 들자, 클랜원들이 앞으로 나섰다. 일제히 기운을 뿜어내자 실내가 울릴 정도였다. 규혁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찰나, 멀리서 총성이 울렸다.

규혁이 몸을 웅크리고, 뒤에 서 있던 클랜원이 마력 장벽을 쳐서 그를 보호했다. 규혁의 코앞에서 총탄이 허공에 박힌 채 부르르 떨었다.

"이런 씨발! 주경아!"

주경이 음소거를 펼쳤다.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고요가 그들을 감싸안았다. 성난 얼굴의 규혁이 그들을 향해 무엇인가를 말했다.

앞에 서 있던 적 두엇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나머지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규혁을 노려보았다. 규혁이 인상을 썼다.

순간 음소거의 벽이 사라졌다.

다시 소음이 귀를 찌른다.

"저쪽에서도 소리 차단했어."

규혁이 말했다.

"내 능력이 소리인 게 어디서 흘러나간 모양인데……?"

마력을 사용했던지, 주경처럼 타고난 능력이 있던지, 어떠했건 간에 적들은 규혁의 선고를 걷어냈다. 그의 능력을 안다면 이런 식의 방어가 가능해서 규혁은 가능한 능력을 노출시키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 녀석 같은데요."

클랜원들의 뒤에서 양손을 펼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에게서부터 차음의 장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규혁이 눈을 돌려 클랜원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저 녀석을 죽여줘."

"오케이."

마치 아주 쉬운 일인 것처럼 대답하고는, 살 클랜 쪽에서도 능력이 일었다. 양은 적어도, 확실히 실력은 우위다. 강력한 힘들이 쏟아져나와 실내를 밝혔다. 살 클랜의 강력한 힘의 파장에 적들의 표정이 굳는다.

"목표는 저 녀석이다."

모든 힘들이 차음의 힘을 가진 남자를 향했다. 적들 또한 그 의도를 깨닫고 그를 보호하는 진형을 갖추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불길과 폭죽 같은 기운들이 서로에게 쇄도했다. 화력전이다. 각자의 공격들은 서로의 마력 장벽과 보호막에 부딪쳐 허공을 불태웠다. 마치 전쟁터의 한 장면인 것처럼 불길과 연기, 온갖 힘들이 허공에서 부닥치고 빛을 뿜었다. 수현은 주경의 옆에 서서 그 장면을 보았다. 강한 힘들은 아니었으나, 그 안에서 집념이 느껴졌다.

서로의 화력이 충돌하는 동안, 일부는 그림자를 틈 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어벽을 펼치고 있던 일진회 클랜의 마법사 뒤에서, 살 클랜의 남자가 불쑥 튀어나와서는 그의 목을 그었다.

갑작스러운 진입에 놀라 일진회 클랜의 능력자들이 곧바로 달려들었으나, 그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홀연 스러졌다. 그리고 그렇게 마법사의 방어벽 일부가 약해지자 그 틈을 꿰뚫고 불똥이 떨어져내렸다. 균열이 생기자 적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림자를 타고 움직이는 살 클랜의 암살자, 류진이었다.

"걔 말고 저 녀석을 죽이지 그랬어."

"방어가 너무 엄중합니다. 천천히 밖에서부터 벗겨내보죠."

그가 다시 사라졌다. 적들의 그림자 사이에서 튀어나와 적을 베어내고, 가끔은 저항이 거세어 다시 도망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대검이 살 클랜 쪽 방어벽에 박혔다. 균열이 일어났다. 일진회 클랜의 마스터가 직접 거대한 검을 들고 달려든 것이다. 그가 몇 번 대검을 휘두르자 방어벽이 퍽퍽 부서지며 금이 차올랐다. 그를 저지하기 위해 살 클랜에서도 몇몇이 나아갔다.

화력전은 이제 백병전의 양상을 띄기 시작한다.

이러한 전투의 와중에서 수현은 주경의 곁을 지켰다. 그녀가 총을 쏠 때 가끔 곁에서 염력으로 한 둘을 넘어뜨린다던지 하며 안전한 곳에서 몸을 사렸다. 눈은 계속해서 규혁을 쳐다보며, 언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인지 기다렸다.

싸움은 더 처절해졌다. 이미 살 클랜의 멤버들도 여럿 죽어나갔고, 적들은 더 많은 수가 베어졌다. 이제 방어벽도 의미를 잃어 서로의 머리 위로 뇌전과 불길이 떨어져내리는 혼돈의 양상이었다. 창고 안에 사람들은 적아를 구별하지 못하고 칼을 휘두르며 싸워댔다. 수현은 다가오는 이들을 넘어뜨려서 주경이 총을 쏘기 쉽게 도왔다. 그녀의 데저트이글이 흔들릴 때마다 한 명의 머리가 박살났다.

모두가 싸움에 취해 수현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때가 왔다.

규혁을 보았다. 그는 뒤에서 몸을 사렸지만, 이따금 그에게 덤벼드는 이들은 능숙한 체술로 공격을 피하고는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그들은 허물어졌다. 적의 차음막이 닿지 않는 살 클랜의 진영으로 다가오는 이들은 어김 없이 규혁에 의해 죽음을 선고당했다.

적들도 살 클랜의 전술을 아는 것인지, 집요하게 주경을 노렸다. 주경이 죽으면 규혁 또한 무력해진다. 그의 힘이 같은 클랜원도 죽이는 것이다.

수현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멀리 끝에서 양 손을 펼친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차음막은 주경의 것보다는 급이 낮았으나, 훌륭하게 규혁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는 능력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해 아군들의 귀만 막아주는 컨트롤까지 선보였다. 수현이 그를 노려보았다.

어둠이 그의 발치에 깔려 있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 싸움에 휘말려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정신이 없다.

수현이 어둠을 휘둘렀다.

그 남자는 목이 잘려 허물어졌다.

순간 규혁이 눈을 들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의 핵심인 남자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주경아 소리 꺼!"

주경이 능력을 사용했다.

음소거.

순간 모든 소음들이 사라지고 적막이 세상을 뒤덮는다. 부서지고 부수고, 죽고 죽이는 가운데 모든 소리는 침묵한다.

규혁이 한 걸음 나아갔다.

수현 또한 걸어나갔다. 자신의 귀를 잡아끄는 주경의 능력을 뿌리치고, 규혁의 입모양에 집중했다. 음소거를 벗어났는데도, 창고 안은 고요했다. 규혁을 막아내던 남자가 죽었으니, 이제 모든 건 그의 선고에 달린 것이다. 일진회 클랜과 레이더스 클랜의 클랜원들은 순간, 모두 동작을 멈추고 규혁을 주시했다.

사신이 낫을 내리치기 직전의 적막.

규혁이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