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13화 (11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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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그가 대체 왜 움직이는 겁니까. 별 것 아닌 조무래기들인데요."

요한이 말했다.

그의 맞은 자리에는 한 사나이가 앉아 있다.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리는 철가면, 그곳에 난 하나의 구멍이 내어놓은 것은 서늘한 안광뿐이다. 그의 눈동자는 조용히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 고요한 눈을 오늘만큼은 견디기가 어렵다. 요한이 상체를 바짝 앞으로 내밀며 답을 재촉했다.

"균형의 수호자들이 나설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런 이유는 아니다."

"그럼 왜 대체 그가 반응하는 겁니까?"

"나도 모른다."

기파랑이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철십자 클랜 본사에 숨겨진 마스터의 방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클랜의 최상위급 멤버 몇 뿐이고, 그중에서 언제든지 그를 만날 자격은 요한에게만 있다. 철십자 클랜의 마스터 기파랑이 가장 신뢰하는 것은, 바로 죽음의 시선 요한이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였던 적이 이전에도 있었지. 기억하나?"

"……."

요한이 기파랑의 외눈을 노려보며 침묵했다.

"나쁜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너나 나도 감당 못하는 괴물이니까. 감정이 남았다면 그냥 삭여라."

"삭이다뇨. 제 가슴 한가운데에 올려놓고 날마다 짓씹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보고 죽음을 물을 겁니다."

기파랑의 하나 있는 눈이 감겼다. 그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죽음을 수집하는 취미라도 있나보군."

"그 괴물도 사는 게 지겨워 죽여줄 사람을 찾는 건지도요."

"그동안 권능언령살의 애송이를 지켜보도록."

"네에, 네."

"혹시라도 허튼 짓은 마라. 널 잃고 싶진 않다."

"절 못믿으십니까?"

"확인되지 않았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어쩌면 너와 동급,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그냥 듣고 넘기기 힘드네요. 그놈 시체라도 가져오면 취소하실 겁니까?"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요한이 한숨을 쉬었다. 기파랑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조차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조심해라. 널 찾았을 때보다도 그의 반응이 민감하다. 곧 한국으로 올 것이다."

요한이 숨을 멈추었다. 그가, 유럽을 떠나 극동 아시아로 온다니 믿기 어려웠다.

그 사나이를 기억한다. 요한이 바티칸을 떠나 잿빛 눈동자로 빛 바랜 세상을 떠돌았을 때, 그의 죽음의 시선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그는 부탁하거나 요구하거나, 거래하지 않았다.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요한을 짓밟고 필요한 것을 취했다. 요한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그에게 목을 붙잡혀 허공에서 데롱데롱 흔들렸었다.

그는 요한의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를 죽이려 요한은 모든 공허를 그에게 내보냈으나 그는 기꺼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요한이 보았던 미래를 훔쳐보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헛되어 두려움에 휩싸이는 허무를, 그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세히 바라보고는 미소지었다. 그때 그는 그 어느 것도 죽일 수 없는 불멸의 존재인 것만 같았다. 그는 그 기이한 힘으로 요한이 가진 모든 힘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늘어놓고 검사하더니, 바닥에 내팽개치고 떠났다.

균형의 수호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상석에 앉는 존재.

거스르는 것들을 살려둔 적이 없는 절대적인 힘.

대천사의 이름을 가진 자, 미카엘.

그가 자신을 널부러뜨리고,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요한은 매일 그날의 일을 되씹었다. 삶의 의미를 잃어 방황하던 자신이, 어떤 이유로 그러한 증오의 불씨를 틔울 수 있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때의 요한은 죽기 위해 떠돌던, 어떤 모욕도 기꺼이 감수하고 죽음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순례자였다.

그, 미카엘이 움직인다.

세계가 숨을 죽인다.

***

요한을 본 이후 박주경은 한동안 연락하지 않더니, 오늘 다시 만나자고 했다. 수현은 거리의 그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지난지 제법 되었다. 수현은 벽에 기대어서는 땅을 툭툭 찼다.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어둠을 흔들어 살갗을 베어보았다. 손가락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수현은 그것을 흔들어 땅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속삭임이 들려온다.

스캐빈져였다.

그것들이 떠올라 수현을 말끄러미 바라보더니, 그가 내민 핏방울을 핥아먹었다. 그리고도 한동안 수현을 바라보다가, 반응하지 않자 이내 다시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신기한 존재다. 스캐빈져에 관해서 제대로 아는 이들은 없었다. 정하도 이브린도 잘 몰랐다. 정글넷을 검색해도 몇 가지 추측과 가설만 무성할 뿐이었다. 가장 유력한 내용은 지옥의 심연에 사는 것들이 지옥문이 열릴 때 새어나와서는 마치 바이러스가 지구에 퍼지듯 세계에 번성했다는 것이다. 그럴듯 한데, 수현은 예전에 본 악마들을 생각하면 그런 불쾌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수현의 상처는 금새 아물었다. 스캐빈져의 숨소리가 떠나가자 거리의 먼 소음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수현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카톡을 주고 받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이내 그녀의 기척이 느껴졌다.

수현은 모르는 척 액정에 눈을 고정했다.

"수현?"

"어, 누나."

수현이 있는 쪽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다가왔고,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주경이 얼굴을 내밀었다. 수현이 인사했다.

"흐음, 여자친구랑 카톡해?"

"아뇨, 아니에요. 하하. 좀 늦으셨네요?"

"미안미안. 일이 있었거든."

수현이 조수석에 탔다. 주경이 액셀을 밟았다.

도시의 불빛들이 뒤로 스쳐지나간다. 거리는 혼잡한데 주경의 차는 공터를 달리듯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마스터를 보고 싶다고 했었지?"

"네."

"좋아. 곧 보게 될 거야."

수현이 주경을 쳐다보았다.

"요한이 나타나서 어떻게 될지 몰랐는데, 마스터가 더 일찍 나서기로 했어. 우리가 작업했던 클랜들이 며칠동안 지네끼리 조용히 싸웠거든."

수현도 알고 있었다. 그의 감각에 이따금씩 전투를 벌이는 정글의 기운들이 잡혔다. 다수의 싸움이 아니라 마치 장수들이 일대일 싸움을 벌이듯 한 둘이 나서서 싸우고 하나가 죽으면 물러가고는 했다. 수현은 개인적으로 살 클랜보다는 그들이 더 멋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살 클랜의 마스터다.

"요한이 있으면 마스터라도 힘들지 않을까요?"

수현이 슬쩍 물었다. 그녀가 미소지었다.

"알 수 없지. 하지만 마스터는 신경쓰지 않는 눈치야. 마스터는 요한을 본 적이 있어."

그녀가 순간 차선을 끼어들었다. 뒷차가 속도를 늦추며 뒤에서 무어라 욕설을 하는데, 그녀는 그저 창 밖으로 중지를 들어 내밀었다.

"마스터는 요한이 가짜라던데."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요한이 가짜라니, 그냥 허풍선이인지, 정말로 강력한 죽음의 사자인지 알 수가 없다. 수현은 분명 요한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에 깃든 허무는 진짜였다. 그저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죽는다는 그 코메디를, 수현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눈을 바라보다간 어느새 죽음에 오염될 것이다.

그녀의 차가 목적지에 도달해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제법 비싸보이는 한우 고깃집이었다. 수현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미소지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고깃집 안에서 능력자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당장 전면전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반전으로 회식이었다.

수현은 주경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고기는 지글거리고, 연회석이 꽉 차 있었다. 주경이 수현을 데리고 가 빈자리에 대충 앉았다. 주경을 아는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여어, 우리의 호프! 히트걸!"

"어머, 벌써 취한 거 아니죠?"

수현이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 남자였다.

살 클랜의 마스터, 권능언령살(權能言令殺), 파워워드 킬(Power-word Kill)의 주인.

그는 박주경의 기억 속 모습과 흡사했다. 다만 지금은 머리를 염색했는지 금색 브릿지를 화려하게 넣었다. 여전히 귀와 눈썹에서 피어싱들이 흔들리고,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혀에 걸린 피어싱도 언뜻 비쳤다. 옷은 호피가 아니라 붉은 꽃무늬 셔츠였다. 술을 제법 먹었는지 얼굴이 벌겋다. 양옆에 여자를 끼고 웃어대는 폼이 정말 양아치였다.

"땡! 안취했지롱! 틀렸으니까 자, 마셔! 고기도 한 점 먹어! 내가 쏜다!"

아, 얽히기 싫다. 수현은 그냥 조용히 고기나 굽기로 했다. 이브린이 드래곤답게 고기를 몹시 탐했으므로 수현은 고기 굽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주경도 몇 번 받아주다가 슬슬 빠져나와 수현의 옆에 앉았다. 잘 굽는다고 칭찬했다.

"마스터 원래 저래요?"

"원래 고퇴한 양아치 출신이라니까 이해해. 뭐 나쁜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서 일할 땐 또 잘 해."

수현은 조용히 고기를 구워 먹었다. 아 맛있다. 다음에 이브린 데리고 와야지. 가끔 박주경이 자꾸 술을 권해서 마시긴 했다. 얼굴이 좀 빨개지자 귀엽다면서 그녀가 뺨을 비벼댔다. 저 멀리서 마스터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조금 높았는데 배보다 목으로 말하는 전형적인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그가 그 순간에 말하는 특별한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수현은 생각하며 주경에게 쌈을 싸주었다.

회식이 무르익자 마스터가 일어났다.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험험, 저 다 아시겠죠. 규혁입니다. 다들 처먹는 꼴을 보니 내일 죽어도 불만은 없겠네요. 클랜 법인카드로 다 긁을 테니 시키고 싶은 만큼 다 시키십쇼. 이모! 여기 소주 한 박스 추가요!"

취한 클랜원들이 환호했다.

"이 자린고비 대장이 여러분을 배불리 먹이는 까닭은 모레 있을 결전 때문입니다. 내용은 다 아실 겁니다. 두 멍청이 집단이 싸울 때, 저희가 가서 다 조집니다."

소란이 줄어들었다. 정글에서의 싸움은 언제나 목숨을 담보한다.

"에이, 니네 너무 겁먹는다. 걱정 마십쇼.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제가, 가서 다 죽입니다."

그가 나선다는 말에 클랜원들이 다시 환호했다. 클랜원들이 그를 얼마나 믿는지 알 수 있었다.

"자, 모레는 제가 있어서 죽기 힘듭니다. 그러니까 오늘 먼저 먹고 죽읍시다. 건배!"

수현도 건배했다. 오늘 소주가 다네.

============================ 작품 후기 ============================

소주 마시고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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