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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게임-112화 (112/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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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박주경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땅값 집값 비싸기로 이름 난 운무시에서 젊은 여자가 이만한 넓은 평수를 구입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살 클랜이 잘나가는 것 같다. 수현은 입구에서 그녀의 아파트 호수를 눌렀고, 방문자를 허락하는 삐 소리가 울렸다.

마치 어른 누나의 정부가 된 느낌이라 수현은 재미있어졌다.

문을 열자, 박주경은 속옷만 입고 있었는데 일을 치르자는 것보다는 곧바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 왔어?"

"네. 무슨 임무에요?"

"걸리적거리는 녀석 하나 죽이는 거야."

기본 임무가 다짜고짜 죽이는 거라니, 살 클랜의 성향을 알 수가 있었다. 아무리 정글의 클랜이라도 쉽게 죽이려 들지는 않는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죽음을 속삭였던 그 남자는 역시 위험한 사람이다.

박주경은 수현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더니 오호,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집이 잘 사나봐?"

"네. 좀."

박주경도 클랜에서 히트맨 노릇을 하면서 수입이 제법 되는지 옷방에 비싸보이는 옷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거기서 대충 옷을 골라 걸쳤다. 자신의 무기인 데저트이글 탄알집을 빼 내부를 확인하고, 찰칵 장전했다. 행운을 빌듯 총신에 키스했다.

박주경이 수현에게 팔짱을 꼈다. 이 여자의 핸드백 안에 총이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겠지.

둘은 아파트를 나와 거리를 걸었다.

"그러고보니 너 능력이 뭐니?"

이제야 물어보다니. 박주경은 생각보다도 클랜 내에서 영향력이 있는 것 같다. 수현이 볼 때, 그녀는 정말로 수현을 자신의 애인으로 삼으려고 클랜에 영입했다. 그녀 직속의 말단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클랜의 녹을 먹는 자인데 이렇게 정부 삼으려고 한 명을 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평범한 클랜원은 아닌 것 같았다.

수현은 둘러댔다.

"음…… 염력같은 거에요. 그리 강하지는 않아요."

"가장 평범하면서도 제일 유용한 능력이네. 어느 정도 가능해?"

평범한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잘 몰라서 수현은 잠깐 생각했다.

"사람 한 둘 들 수 있을 정도?"

"오, 제법인데? 그정도인데 아직 무소속이었단 말야? 내가 운이 좋았구나?"

그간 워낙에 거물들과 얽혀서 보통 주민들의 수준은 잘 모르겠다. 처음 만난 주세연조차도 각 클럽에서 초빙하려 애쓰던 강력한 마녀였다.

"하지만 수현, 더 중요한 건 그걸로 얼마나 상처입힐 수 있는지야."

박주경이 씩 웃었다.

"돌멩이 들 정도의 힘이라도, 날카롭게 만들어서 목을 그으면 끝나니까."

둘은 버스를 탔다. 수현이 알기로 그녀는 국산의 최고급 세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엔 최대한 우리를 감춰야 돼."

그녀가 설명했다.

"다른 두 클랜 사이를 이간질해서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게 목적이거든. 우리가 목표를 죽이고 나서 다른 클랜 흔적을 남길 거야. 좀 이성적인 녀석들이면 눈치챌 수도 있겠는데 마스터 말대로는 평소에도 으르렁거리던 사이라 곧바로 치고 받을 거라고 하니까."

"그 마스터는 언제 만날 수 있어요?"

"마스터? 후후, 보고 싶니?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우리도 잘 몰라…… 이번 일 잘되면 엉뚱하게 싸우느라 지친 멍청이들 쓸어버릴 때 볼 수 있겠지?"

그녀는 움직임을 숨기려는 것인지 버스를 두어번 더 환승했다. 정글이면 그냥 힘 센 괴물들이 크와앙거리며 싸워서 이기는 녀석이 장땡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래쪽에서는 치열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것 같다. 수현은 영화 속 스파이가 된 기분이라 신이 났다. 그들은 이내 번화가에 들어섰다. 운무시에서도 술집과 윤락업소가 밀집한 곳이다.

"저 녀석이야."

한동안 거리를 헤매던 박주경이 눈을 빛냈다.

한 사나이였다. 그냥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은 생김새인데 수현은 그의 몸에서 흐르는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쪽 동네를 잡은 듯한 정장 입은 덩치들이 이따금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뭐 그런 걸 하냐는 듯 손사레를 친다. 정글의 클랜들이 뒷세계에 연결되는 건 흔하다고 했다. 그는 아마도 이쪽을 관리하는 남자인 것 같다. 보기엔 그저 인상이 좋아보이는데. 이따금 그는 전봇대가 벽에 남몰래 손을 휘두르고는 했는데, 그의 마력이 새겨지면서 정글의 주민들만 볼 수 있는 마킹이 생겼다. 그들의 구역이라는 경고다.

일진회. 정말 조폭스러운 네이밍이다.

박주경과 수현은 그의 뒤를 계속해서 좇았다. 그는 도시의 불빛이 번쩍거리는 곳만 골라 다녀서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수현이 정신지배로 저 녀석 아무 골목이나 들어가게 만들까 고민하는 와중이었다.

그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마력으로 기척을 지우고는 바지를 내렸다.

약간 부끄러운 얼굴로 노상방뇨를 시작했다. 많이 마려웠는지 물줄기가 거셌다. 그냥 아무 가게나 들어가면 될 것을 굳이 골목에서 숨어서 싸는 걸로 보아 역시나 정글의 주민들은 어디 한 군데 이상한 성벽이 있는 모양이다.

순간 모든 소리가 멎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명조차 삼켜버린 먹먹한 고요 속에서, 그저 무성영화처럼 눈앞의 현실만 흔들리고 있었다. 박주경이 권총을 들었고, 저 남자가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바지춤을 걷어올렸다.

그녀의 총신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남자가 서 있던 옆 벽에 총탄이 박혔다. 남자의 손에서부터 불길이 뻗어나왔다. 박주경이 몸을 숙이고 바닥을 굴렀다. 움직임이 표홀하다. 그저 권총만 쓰는 여자가 아니라 체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몸을 고정한 후 안정된 자세로 그를 향해 사격했다.

그녀의 총신이 일정하게 흔들린다. 남자는 벽에 난 턱 뒤에 숨어서 웅크렸다. 총성이 나지 않아 감이 안잡히는지, 괜히 고개를 내밀다가 탄알이 뺨을 스쳐 얼굴에 피가 흘렀다.

박주경은 총을 겨눈 채 가만히 기다렸다. 남자가 좀처럼 나오지 않자 초조해는지 시계를 확인한다. 저 남자의 마법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서 섣불리 먼저 움직이지 못했다. 안에서 무엇을 준비하는지 마력의 불빛이 번쩍였다. 박주경이 입술을 깨물더니 먼저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수현은 가만히 있기 뭐해서 능력을 사용했다.

벽 뒤에 있던 남자가 번쩍 들려서 바깥으로 배달되어서는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멍해졌던 박주경이 총을 쏘았고, 남자는 바닥을 기어서 다시 턱 뒤로 숨었다.

음…….

수현은 다시 한 번 남자를 들어서 박주경이 쏘기 좋게 놓았다.

박주경이 총을 마구 쏘았고, 남자는 허공을 휘저으며 마력의 벽을 만들었다. 총탄이 튕겨져나왔다. 그러나 걔중 하나는 그것을 뚫고 지나가 남자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남자는 상처를 부여잡고 허겁지겁 턱 뒤로 숨었다. 수현이 남자를 들어올리려 했지만 이번엔 무언가 대비를 한 것인지 잘 나오지 않았다. 사람 하나 분의 힘은 안되는 것 같아서 사람 두 명 분의 힘을 써봤다.

남자의 몸 끄트머리가 턱 바깥으로 나올랑 말랑 한다. 남자가 필사적으로 숨었다.

사람 한 두 명분이라고 했는데…….

수현이 그냥 남자를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널부러진 남자의 떨리는 눈이 그들을 향한다.

박주경은 침착하게 그를 쏘았다. 남자는 복부, 어깨, 가슴을 차례로 맞고 이내 축 늘어졌다. 그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허망한 최후다. 박주경은 그에게 다가가서는 이마에 대고 한 번 더 총을 쏘아 확인사살했다. 순간, 골목의 어둠에서부터 정글의 청소부, 스캐빈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먹잇감을 찾아 눈치를 보고 있다.

갑자기 거리의 소음들이 귀를 찔렀다.

소리와 함께 현실감이 되돌아왔다. 박주경이 씩 웃었다.

"잘했어. 꼬마."

"다른 클랜이 한 것처럼 위장한다면서요?"

"그렇지."

박주경이 짧은 칼을 하나 바닥에 던졌다. 캉, 하고 벽에 부딪쳐 바닥을 뒹굴었다.

"우리 만날 때 있던 시체 기억하지? 걔 꺼야. 걔가 이 칼을 쓰는 애였거든. 둘이 싸우다 죽은 줄 알겠지 이제."

"그걸로 될까요? 둘 다 싸우다 죽었다면 그냥 퉁친다거나……."

"말했잖아? 별로 섬세한 계획은 필요 없어. 계기만 주면 돼."

둘은 스캐빈져를 뒤로 하고 골목을 나왔다. 도시의 불빛이 둘을 맞이했다. 술에 얼굴이 달아올라 평소에는 하지 못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남자나, 여자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이들, 유난히 진한 화장으로 거니는 아가씨들로 거리가 북적하다. 박주경이 수현의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수현, 일도 잘 끝냈는데 누나랑 술이나 한 잔 할까?"

"저는 좀……."

"요거, 또 모범생인 척 한다? 어제 하던 가락을 보니 경험도 제법 있었을 텐데."

그녀가 시시덕거리다가, 순간 무엇인가를 보고서는 몸을 홱, 돌렸다.

"어어?"

"아무 말 하지 마. 나 따라 와."

둘은 오던 그대로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걸었을까, 그녀가 뒤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휴. 또 저 녀석이야?"

"무슨 일인데요?"

수현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물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요한이었다.

죽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나이 요한이 여기에 왜 왔을까. 그는 여전히 남성복 잡지에 나올 것 같은 멋진 차림새로, 잿빛 눈동자로 거리를 훑으며 걷고 있었다.

"요한이야. 철십자 클랜 소속인데 여기에서 놀 만한 크기도 아닌 진짜 무서운 놈들인데, 물론 나중엔 우리가 더 커질 거지만, 여튼 걔네가 냄새를 맡았는지 이 동네에 얼쩡거리네. 특히 저 요한은 거의 전설적인 놈이란 말야. 우리 마스터 정도는 돼야 상대 가능해."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주경은 다시 한 번 뒤를 살피다가 다시 안도하고는 수현의 손을 잡고 끌었다.

"일도 생각보다 일찍 끝났는데 누나랑 놀아야지?"

수현은 박주경에게 끌려가며 생각했다. 죽음의 시선을 가진 요한과, 죽음을 속삭이는 권능언령살의 남자가 이곳 운무시에 함께 있었다. 두 죽음의 사신들이 이곳에 모인 것은 그저 우연일까.

요한의 식어버린 잿빛 눈동자를 기억한다. 위험한 눈이었다. 만약 권능언령살의 목소리가 그만큼의 죽음을 담고 있다면, 그 또한 무시할 수 없이 위험한 남자이리라. 그런데 왜 자꾸 입꼬리가 올라갈까.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것인지. 왜인지, 그 사나이를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안에서 짐승의 들뜬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만나 그가 말하는 죽음을 듣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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