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11화 (11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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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수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모텔에서 나와 소희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골목 저편에서 익숙한 피냄새가 났다. 조금 다가가자, 네온사인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나뒹구는 시체가 있었다. 자신의 짓이라고, 뺨에 죽일 살(殺)을 새겼다. 요새 운무시에서 세력을 키운다는 강경조직 살 클랜이었다. 그네들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으므로 수현은 어깨를 으쓱하고 몸을 돌린다. 수현이 선포한 그의 영토는 이제 운무시의 모든 이들에게 불가침이다. 살 클랜이 무슨 짓을 하던지, 그곳을 범하지 않으면 괜찮다.

사박거리고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이 다시 돌아보았다. 정글의 청소부 스캐빈져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어두운 곳, 그림자 드리운 곳 어디에서든 시체가 된 능력자들을 먹어치우기 위해 나타난다. 그래서 정글의 주민들에게는 무덤이 없다. 스캐빈져들은 어디서건 나타나 그들의 시체를 씹어 삼켜 없애버리므로, 모든 정글의 주민들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無)로 화한다. 그들은 개처럼 보이고, 쥐처럼 보이고, 까마귀처럼도 보인다. 마치 그늘 속에서 칠흑의 안개가 떠올라 그들을 감싸안아 지워버리듯 몇 번 씹고 뜯는 소리가 들리고 나면 그들은 이내 없다.

어차피 저렇게 없어질 이들의 뺨에 글자를 새기는 것도 참 강박적이다.

수현은 시체가 사라진 후에도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까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그림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만화처럼, 있는 거 안다. 나와라! 하는 것도 좀 부끄러워서 알아서 나올 때까지 소희와 카톡이나 주고 받고 있었다. 이내 담 너머에서 한 인영이 날아올라 시체가 있던 자리에 착지했다. 수현이 고개를 드니,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뺨에 살(殺) 자를 타투한 것으로 보아, 방금 시체를 만든 이일 것이다.

정글의 주민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타투가 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력을 조금이라도 지녔거나 정글의 혈통, 이능력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의 눈에는 선연한 표식이다. 마법으로 새기는 타투의 일종이다. 그래서 때로, 클랜원들은 정글의 주민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타투를 새기기도 했다.

그녀가 권총을 들었다.

저건 또 처음 보는 방식이다.

"일반인인 줄 알았는데 정글의 주민이었네."

"……."

"소리 질러도 소용 없어. 내 능력은 음소거니까."

아, 그래서 한국에서도 총을 쓸 수 있는 거구나. 수현은 생각했다. 하기야 길에 굴러다니는 하위급 능력자들은 총 든 상대를 상대하기도 버겁다. 이 여자는 소리를 없애는 쓰잘데기 없는 능력을 잘 활용하는 케이스다.

수현은 여자를 뜯어보았다. 매일 말도 안되는 미모의 여인들과 놀아나다보니 눈이 높아져서 크게 감명을 주는 미모는 아니었다. 예쁘장하긴 하다. 수현은 마침 굴러들어와 총을 겨누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 생각한다.

엘리제를 강간하면서 눈 뜬 가학심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이 여자를 맘대로 해버리고 죽여 치울까.

"흐응. 귀엽게 생긴 꼬마네."

……아니 이런 흐름인가.

"우리 클랜에 들어올래? 너 어디 소속이니?"

수현을 보며 입맛을 다신다. 그녀가 권총을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리며 수현에게 미소지었다.

"대답 안하면 쏴버린다?"

수현은 아직도 이 여자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해 고민중이었다. 어둠은, 이미 그녀의 목덜미에 내려앉아 선연하다. 어둠이 그녀의 목을 한 바퀴 돌며 여린 살갗에 이를 대어보고, 혀를 내밀어보고 있다.

수현은 순진한 얼굴로 생긋 웃었다.

"저 클랜 없는데. 살 클랜은 어떤 곳이에요?"

그녀의 얼굴이 풀어졌다.

"신참이구나? 우리 클랜은 조금 엄격하긴 한데, 수칙만 잘 지키면 문제 없어. 이 누나가 너 봐줄테니까 내 밑에서 나 도와주면 돼. 너 정도 실력으로는 이만한 곳 들어오기 힘들어. 엄청 좋은 기회다?"

수현이 그녀의 머리를 들여다보았다.

그녀 직속의 파트너 명목으로 수현을 끌어들여서, 그녀의 집에서 이런 짓 저런 짓을 해버리고 싶은 음험한 욕망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수현은 눈물을 눈가에 매달고 누나누나 거리며 열심히 허리를 흔든다. 누나 빨리 싸버려서 죄송해요……. 후후, 이 꼬마 벌을 받아야겠지?

"……."

솔직히 수현도 조금 혹했다.

"그리고 우리 클랜 마스터는 말이야……."

그녀의 핑크빛 상상들이 지워지고,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려한 남자다. 호피무늬 셔츠에 귀에는 귀걸이를 몇 개나 매달고, 혀와 눈썹에도 피어싱을 했다. 삼류 양아치와 같은 차림새지만 클랜에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는 느낌이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우린 곧 이곳을 먹어버릴 거라고."

그녀가 씩 웃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지나가는 남자의 능력은, 권능언령살(權能言令殺), 파워워드 킬(Power-word Kill)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가 소리내어 그것을 말하는 순간.

상대는 죽는다.

수현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여자가 한 번 목격했던 그 장면이 수현으로 하여금 심장이 뛰게 만들었다. 기억 속에서, 그 남자는 건들거리며 적 클랜의 마스터 앞에 섰다. 마스터끼리의 일기토였다. 적은 나름 몸에서 힘이 넘치는 강력한 무인이었다.

적이 주먹을 휘두르려 할 때, 남자는 그저 한 마디를 무어라 말했다.

그녀는 듣지 못했다. 그녀의 힘, 음소거로 주변의 소리를 차단한 것이다. 그녀의 클랜원들도 죽어버리지 않게끔.

그리고 적 클랜의 마스터와, 그 소리를 들었던 이들은 모두 순간 허물어졌다.

뒤에 진치고 있던 클랜원들 중에서도 가까이 있던 몇만 죽어버렸다. 나머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라 혼비백산한다. 남자가 턱짓하자, 그의 뒤에 있던 살 클랜원들이 달려들어 나머지를 도륙했다.

이윽고, 스캐빈져가 떠오르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기억은 끝난다.

"굉장한 능력이야. 지금 너한텐 말해줄 순 없지만, 우리 클랜에 들어오면 알게 될 거야. 후후."

수현이 어둠을 치웠다.

그 남자의 능력은 마치, 요한을 닮았다.

선지자였던 사나이, 요한. 그의 눈에는 까마득한 죽음이 담겨 있어서, 그의 잿빛 눈동자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순간 죽음에 그대로 투사되어 명을 잃는다. 이 남자는 눈이 아니라 말이었다. 대체 무엇일까. 수현은 왜 이렇게 그것에 끌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그 남자를 만나 확인하고 싶었다.

그 남자를 죽이는 것은 쉽다. 이 여자가 했던 것처럼, 힘을 뿌려 청각을 차단하고 죽여버리면 된다.

하지만 수현은 그 소리를 듣고 싶었다.

맹목적인 충동이 그를 두들겼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도 죽어버릴 수 있다. 어떤 종류의 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수현은 요한의 능력은 복제하지 못했다. 그럼 이 남자는 어떤 존재일까. 수현은 늘 궁금했다. 자신이 요한의 눈동자를 마주하면, 그 또한 죽어버릴지.

내면의 짐승이 으르렁거렸다.

수현은 그가 사랑하는 네 여인들과의 섹스 이외에, 이렇게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입할게요."

"말귀를 빨리 알아듣네. 영리해."

그녀가 다가와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현은 그렇게 살 클랜원이 되었다.

***

"그래서 살 클랜원이 되었다고?"

예브게냐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있던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브게냐가 수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미간을 찌푸렸다.

"위험하지 않을까?"

예브게냐가 이브린을 쳐다보았다. 감자칩을 우물거리던 이브린이 말했다.

"능력들에는 대개 상성이 존재하지만 결국은 힘의 총량에 비례하는 것이니라. 그 힘이 특이하긴 하다만은 세계의 법칙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것은 아닐 터. 자신과 엇비슷한 이들은 그렇게 죽이더라도, 훨씬 강한 존재는 그 힘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예브게냐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밑에서 수현이 옷깃을 끄는 게 느껴졌다. 수현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가리킨다. 예브게냐가 고개를 숙여 키스해주었다. 수현이 기쁜 듯이 예브게냐의 목을 끌어안고 혀를 얽었다.

"……낯선 여자 맛이 느껴지는데."

예브게냐가 입술을 떼고는 갸우뚱했다. 수현이 웃었다.

"설마 그 여자랑 하고 온 거야?"

"했어요."

"와. 진짜 바람둥이. 탕아."

수현이 다시 예브게냐를 끌어당기며 키스해달라고 졸랐다.

"치. 카사노바. 헤픈 남자. 이 걸레."

예브게냐가 걸레라는 폭언을 하자 수현이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홱 당겨 키스했다. 예브게냐가 입을 열고 타액을 교환한다. 그때 갑자기 수현이 예브게냐를 물어버렸다. 갑작스런 흡혈에 쾌감에 휩싸인 예브게냐가 몸을 떨자, 수현이 그녀를 문 채로 말했다.

"그 폭언 더 해보시지."

"으흣…… 흐앗……."

결국 흐물흐물 녹아버린 예브게냐가 항복하고 수현에게 안겼다.

그렇게 예브게냐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득 폰이 울렸다. 수현이 확인해보니 살 클랜의 그 여자, 박주경이었다. 그녀는 수현이 살 클랜에 가입한다는 각서를 쓰게 한 다음 교묘하게 유혹해서는 수현에게 올라타 허리를 흔들었었다. 미소년 페티쉬가 있는 것 같아 장단을 맞춰줬더니 그녀는 수현에게 푹 빠진 모양이다.

내일 학교 마치고 곧바로 자신의 저택으로 오라고 한다. 새로운 임무가 하달되었다고. 정말 임무인지 수현과 뒹굴고 싶은 건진 모르겠지만 수현이 알겠다고 답변했다. 옆에서 수현의 메세지를 함께 보던 예브게냐가 수현의 허리를 꼬집었다.

"……[누나 아랐쪙♥]?"

"맞춰줘야죠."

"아. 보는 내가 현기증 난다."

"어. 미세한 질투가 느껴지는데? 누나도 이런 거 좋아해요? 해줘요? 응?"

수현이 예브게냐를 껴안으며 장난쳤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C의 벽을 넘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닭살스런 멘트를 속삭여주자 예브게냐가 하지 말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수현이 굴하지 않고 그녀의 귀에다 대고 애교를 부리자 예브게냐가 이제는 빨개진 얼굴로 수현의 옷깃을 잡고 올라가자고 끌어당겼다. 수현이 그녀의 팔짱을 끼고 함께 침실로 올라갔다.

거실에 혼자 남은 이브린이 문득 중얼거렸다.

"권능언령살이라…… 흐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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