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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VAMPIRE WEEKEND
오랜 비행의 여파로 다들 잠이 들었다.
수현이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밤은 그의 시간이고 칠흑은 그의 영역이다. 해가 침몰하고 저 머리 위로, 그의 연인인 달이 고개를 내밀 때면 수현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지고, 저 먼 하늘의 이야기들도 손에 잡힐 듯이 들려온다. 이곳 땅이 바다 위로 떠오른 이후 항상 여기 있었을 밤의 어둠은 그의 방문을 환영하는 것처럼 그를 감싸안았다.
밤이 속삭이는 소리를 이제 수현은 들을 수 있다.
밤은 그의 시간이다.
창 밖 도시는 불을 꺼뜨리고 있다. 한국과는 달리 파리는 밤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 밤이 내리면, 그들의 하루도 저무는 것이다. 이따금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의 간판들이 거리를 밝힐 뿐, 나머지는 그들의 곁에 어둠을 들인다.
밤을 숨쉬는 뱀파이어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수현이 미소지었다. 밤의 일족들은 파리에 번성하고 있었다. 수현은 그들이 좋아졌다. 정하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개와 늑대의 시간에 눈을 뜨고, 어둠이 깔리면 날개를 펼치는 이들이다. 밤의 장막 아래를 나는 이들을 수현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아, 저 달.
수현이 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왔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닥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눈을 감으니 파리에서 약동하는 정글의 주민들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그들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다. 싸우지도, 약탈하지도 않고 감상에 젖어 거리를 걷거나,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웃고 있었다. 함께 노래하고 어둠 속에 모여 춤을 추었다.
어둠을 타는 명랑한 뱀파이어들이 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수현은 파리에 가득한 그들의 화음에 귀를 기울였다.
아름다운 곳이다.
수현도 눈을 감고 미소지었다. 그저 엘리제가 어떤 여자인지 보고 싶어서 왔는데, 파리가 좋아질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낯설고도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어딘가에서 한 번은 마주쳤을 것 같은, 그러나 마치 알던 사람이 생전 색다른 옷을 입은 것처럼 분위기는 낯설은 그런 느낌이었다. 수현은 흥미가 생겨서 테라스 난간 너머로 한 걸음 내딛었다.
세상이 온통 어두우므로, 수현은 먹물에 다시금 먹물 한 방울 떨어뜨리듯 어둠에 스며들어 날아올랐다.
수현이 조용히 내려앉은, 인적 드문 골목에서 한 남자와 여자가 대화하고 있었다.
"왜 안알려주는 거야?"
"엘리제님의 뜻입니다."
"푸. 그 언니도 오래 자다보니 감을 잃었나. 뭐 우리끼리 치정 싸움이라도 할까봐?"
"저는 그 분의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그냥 꺼져."
수현과 일행을 데려다 준 운전수가 곤란을 당하는 것 같다. 맞은 편에 선 여자는 늘씬한 몸매를 감추지 않는 타이트한 가죽바지에 스터드 박힌 캔버스화, 가슴이 깊이 파인 흰 티셔츠를 대충 걸치고 있었다. 등에는 키만큼 기다란 일본도가 매달려 있다. 맞은 편의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어둠 속으로 스러지자, 수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른 주제에 티셔츠로 보이는 가슴이 제법…… 여유만만한 미소는 꼭 정하를 닮았다. 그녀가 수현을 바라보며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쓰는데, 귀에는 은색 링 귀걸이가 여섯 개나 박혀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생긋 웃는 그 모습을 보니 기억이 났다.
"키시노 씨?"
"제 이름 기억하시네요?"
후후 웃는 모습이 귀엽다.
"뱀파이어들 연회 때문에 오셨어요?"
"네. 수현 씨는 애인이랑 같이?"
장난스레 새끼 손가락을 흔들었다.
"네, 뭐 그렇게 됐어요."
아까 운전수에겐 뾰족하게 굴더니 자신에게 곧바로 생글거리는 게 보통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수현에겐 악녀 페티쉬라는 고질병이 있다.
키시노가 수현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흐응. 지금은 혼자 밤나들이 온 것 같은데, 데이트나 할까요? 제 방에서 단 둘이?"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있다. 수현은 순간 혹했다. 키시노가 수현의 손등을 물었을 때의 감각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녀를 물어뜯어서 쾌감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하지만 이러면 그간 내기라고 네 여인들을 안아주지 않은 게 걸려서 고개를 저었다. 다음 기회에 꼬셔주세요. 그때는 바로 따라가드릴게요.
"생각보다 가드가 단단하네. 에잇."
키시노가 갑자기 수현의 팔뚝에 이를 박았다. 흡혈의 쾌감에 수현이 이를 악물었다. 쾌감은 거품이 끓어오르듯 온몸을 휘돌았다. 오래 금욕한 영향인지 사정할 뻔했다. 송곳니를 살갗에 박아넣고 장난스레 웃는 키시노가 매력적이어서, 수현은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저으며 가라앉힌다.
"후후. 기분 좋죠. 더 기분 좋아질 수도 있는데…… 어, 어라."
수현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 떼어내고는, 벽으로 밀어붙이며 그녀의 목줄기를 물었다.
키시노가 입을 벌렸다. 압도적인 쾌락의 파도에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수현이 거칠게 피를 빨아들였다. 키시노가 수현을 밀어내려고 손을 들어올렸지만, 힘이 줄 수가 없어서 그저 바들바들 경련했다. 그녀의 입에서 타액이 흘러내렸다. 수현이 주는 흡혈의 쾌감에 아예 무장해제 당해버린 키시노가 축 늘어져서는 다리를 경련했다.
수현이 손을 그녀의 가죽바지 안으로 밀어넣어서는 꽃잎을 어루만졌다. 이미 싸버렸는지 잔뜩 젖어 있었다. 수현이 낮게 웃었다.
"이번에 말고, 다음에 오면 더 기분 좋게 해줄게요."
그리고 이를 떼어냈다. 키시노가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현이 고개를 숙여 키시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몸을 돌렸다. 다시 어둠 속으로 스러진다.
"저거 뭐야……."
이렇게 기분 좋은 거, 처음이었다.
……피만 빨렸는데 눈이 뒤집히고 온몸이 벌벌 떨렸다.
정하가 굉장한 애인을 만든 것 같다.
가랑이에서는 아직도 경련하며 꽃잎이 애액을 토해내고 있다. 샤워라도 하지 않으면…….
아직 채 꺼지지 않은 쾌락의 여파가 다시금 일어나, 키시노가 다시금 몸을 경련했다. 다시금 오르가즘에 도달하며 몸을 흔들었다.
***
이른 아침,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역시 올가다.
"일어나세욧."
수현이 눈을 뜨자, 곁에 누워서 생글생글 웃는 올가의 얼굴이 보였다. 아침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흰 피부와 곧은 콧날, 기쁜 표정이 도드라지는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서구적인 얼굴선이 마치 강아지처럼 헤프게 풀어져 있다. 오 샹젤리제, 그 키스하고 싶은 입술.
올가는 마치 첫키스하는 소녀처럼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츄. 하는 가벼운 입맞춤.
올가가 헤헤거리며 수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데이트 해요. 데이트. 데이트."
수현이 졸음에 겨운 얼굴로 웃었다.
"졸려."
"안돼요. 어제 한 약속 전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욧."
"으으…… 그럼 씻겨줘."
"주인님 모처럼 아기처럼 귀엽게 구시네요. 못할 줄 아셨다면 오산입니다."
올가가 주문을 외웠다. 수인을 맺자 허공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파워업!"
그녀의 양팔에 빛이 어렸다.
마치 시금치 먹은 뽀빠이 마냥 올가가 수현을 공주님 안듯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욕실로 데려갔다.
오성급 호텔답게 샤워부스와 욕조가 모두 완비되어 있다. 올가는 수현을 욕조 앞에 앉히고 머리만 기울이게 해서는 머리를 감겨주었다. 수현은 기분 좋은 듯 가만히 올가의 손길을 느끼면서, 이따금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희롱했다.
"주인님이 매일 이렇게 고분고분하면 좋을 텐데."
샴푸 거품을 내어 수현의 머리를 마사지해주던 올가가 헤헤 웃었다.
샤워기 물을 틀어 수현의 머리를 헹구고 곧바로 수건을 씌웠다. 자신의 가슴에 이마를 대게 하고는 아이를 다루듯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아냈다. 올가가 수건을 치우자,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에서 자신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수현의 얼굴에 올가의 얼굴이 붉어졌다.
"에잇."
올가는 굴하지 않고 손으로 수현을 세수시켰다.
이윽고 말끔히 수현을 다 씻긴 올가가 수현을 침대에 앉혔다.
"이제 뭘 입으시겠어요?"
"올가가 골라줘."
"우웅……."
수현이 고심하는 올가를 보았다. 올가의 취향은 하늘하늘한 드레스나 공주님 의상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하나 예브게냐처럼 쉬크하고 도시적인 의상을 동경하는 것 같다. 오늘 올가는 스키니한 검은색 면바지에 높은 굽의 스틸레토힐, 검은 브래지어가 희미하게 비치는 얇은 블라우스를 입고 쇄골이 도드라지게 단추를 풀어헤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선글라스를 걸고, 예브게냐가 사준 화사한 백금 목걸이에, 커다란 백금 링 귀걸이를 했다. 거기에 연하게나마 화장까지 했다. 평소의 올가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차림에 수현은 문득 욕구가 치밀었다.
캐리어를 열고 뒤지느라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잘빠진 뒷태와 다리 라인이 수현에게 보였다. 귀여운 엉덩이가 면바지 너머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내리고 뒤에서 찔러주고 싶은 욕망을 수현은 참기가 어려웠다.
"올가."
"네에?"
"오늘 너무 예뻐."
올가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화악 붉어졌다.
이런 말 자주 해줬던 거 같은데, 마치 고백 받은 소녀 마냥 얼굴을 붉히는 게 더 귀엽다. 올가가 빨개진 얼굴로 수현을 흘겨보다가, 에잇, 하고 옷을 던져줬다.
그냥 청바지에 티셔츠였다. 청바지는 무슨 디로 시작하는 브랜드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격이 엄청 비쌌다. 마른 수현이라 핏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신발은 그냥 캔버스화를 신어서 힐을 신은 올가와 키가 비슷해졌다.
예전이었다면 힐이 높아서 조금 작았을 것도 같은데, 요새 부쩍 키가 크는 중이라 그래도 수현이 조금 더 크다.
예브게냐가 손목에 억지로 걸어줬던 비싼 시계를 차고 올가가 커플로 하자며 팔찌도 같이채우고 이것저것 하고 나니, 마치 연예계 모델 커플 같은 모양이 났다. 수현이 팔을 내밀자 올가가 기쁘게 팔짱을 꼈다.
올가와 나란히 서니 또 예뻐보여서, 수현은 충동적으로 그녀를 껴안고 키스했다. 수현도 올가도 입술을 좀처럼 떼지를 않아 둘은 한참 후에야 외출할 수 있었다.
올가는 택시를 잡고는 우선 에펠탑으로 끌고 갔다. 올가가 꼭 해보고 싶었다며 에펠탑 아래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둘은 마치 갓 사귀기 시작한 풋풋한 여인 마냥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생글거리며 빠뤼 커휘의 맛을 음미한다.
실은 둘 다 커피맛도 잘 몰라 그냥 달달한 카푸치노를 시켜서 빨대로 빨고 있다.
어쨌거나 보기 드문 절색의 소년 소녀 둘이 마주 앉아 다정하게 스킨쉽하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그림이라, 지나가던 사람들마다 눈길을 빼앗기고는 했다. 올가가 빨대를 입에 문 채 눈을 치뜨고 수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모양으로 키스, 라고 하자 수현이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을 땐 옆에서 낮은 탄성이 들렸다.
젊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둘을 쳐다보며 속삭이고 있었다. 올가는 수현과 연인처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주변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꽂히자 더 기분이 좋아져서 배실배실 웃었다.
"이거 마시고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있어?"
수현이 주문한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글세요…… 그냥 계속 이렇게 있어도 좋아요. 주인님만 있으면."
올가가 헤실거렸다.
"뭐 시간은 많으니까."
올가가 이른 아침부터 수현을 닦달한 덕에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수현이 손끝으로 올가의 입술에 묻은 커피 방울을 쓸어서 입으로 물었다. 수현의 기습적인 행동에 올가의 심장이 쿵했다.
"그리고 오늘은 데이트인데 자꾸 주인님이라고 그러면 어색하잖아? 그러니까……."
수현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냥 수현이라고 불러.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수현과 올가가 처음 만났을 때 올가는 조금 건방진 듯한 자신만만한 여자애였다.
지금은 이렇게 폭발적으로 귀여운 메이드지만.
"……."
수현이 눈을 내리깔고 카푸치노를 마시는데, 올가가 대답이 없자 수현이 눈을 들었다.
올가는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올가……?"
"……."
"우, 울어……?"
올가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흐끅거리며 신음을 참고 억지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수현이 당황해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옆에 앉았다. 올가가 수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소리 죽여 울었다.
"흐윽…… 죄송해요…… 저 너무 행복해서…… 히끅……."
수현이 꼭 껴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올가가 수현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수현은 올가가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한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장난기도 일었다. 그래서 올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올가를 침몰시키는 마법의 단어를 몇 번이고 속삭여주었다.
올가는 흐느끼다가 다시 픽 웃더니, 다시 앙앙 울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 수현은 자신 안에 비어있는 부분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올가를 꼬옥 껴안았다.
갑자기 주위에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휘파람을 불고 둘의 결혼을 축복한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수현이 프로포즈라도 한 것으로 오해한 것 같다. 수현은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반지를 꺼내 올가의 손에 끼워주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카페 점원이 둘의 사랑에 바치는 서비스라며 하트 모양의 작은 케이크를 가져다주었을 땐 모두를 위해 키스라도 해야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