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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VAMPIRE WEEKEND
인천공항 앞에 리무진이 멈추어 섰다.
벌써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박혔다. 저런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이는 대체 누구인가, 하고 어디 한 번 얼굴이나 보자 싶은 표정들이다. 혹시 연예인인가 싶어 휴대폰 카메라를 준비하는 이도 있었다.
리무진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동요했다. 그냥 지나가던 남자들 걸음을 멈췄다.
"전용기 사자니까."
"탈일도 잘 없는데 굳이 살 필요는 없잖아요."
"치."
먼저 내린 것은, 금발 벽안의 눈부신 미녀다. 짧은 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선글라스는 정수리에 걸쳤다. 흘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 도발적인 자태에 남자들은 넋을 잃었다.
그리고 이어 내리는 것은, 보는 이의 심장이 떨릴 정도로 고혹적인 흑발의 미녀다. 앞서 내린 금발의 여인처럼 화려한 복장은 아닌데, 몸매 때문에 핏이 확 살아서 왠만한 모델들은 그냥 도망칠 정도로 아름다운 옷맵시였다. 그녀는 무심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흘리며 긴 다리를 뻗어 걷는다.
다음엔 두 소녀가 함께 내렸다. 엄청난 미녀 둘에 이어 인형 같은 두 소녀가 내리자 이젠 외국 모델 에이전시 차량이 분명하다고 속삭이는 이들도 생겼다. 흑발의 소녀는 부끄러워했고, 현실 같지 않은 은발의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한 소년이 내렸다.
그동안 남자들의 눈이 즐거웠다면, 이젠 여자들의 차례였다.
상상도 못한 아름다운 용모의 미소년이 내리자, 다들 휴대폰을 들어 찰칵거리기 시작했다. 흠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용모의 다섯 사람이 함께 서 있으니 묘하게 비현실적이다. 마치 3D로 짜넣은 애니메이션 CG 같다. 게다가 금발의 미녀가 소년의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귀에 뭐라고 속삭이자, 그 허물 없는 스킨쉽에 모두가 흥분했다.
"저거 뭐야. 분명히 위험한 관계야."
"모델들 맞지? 처음 보는데 패션 모델들이겠지?"
"저 여자 개쩐다. 존나 쩐다."
"저 남자애 너무 예쁘지. 아 납치하고 싶어."
그들은 인파를 지나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진귀한 광경을 본 이들은 빨리 페북에 올려 좋아요를 받고 싶어 안달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진 앨범에 들어서자 그들이 찍은 사진들은 모두 오류라도 난 듯 검은 화면으로 칠해져 있었다. 미녀들과 소년의 모습이 들어간 사진은 모두가 그랬다.
어느 날 아침 인천 공항에서 벌어진 헤프닝이다.
***
"저 목 마른데 콜라 좀 갖다주실래요?"
"네."
"누나신 것 같은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누나라고 불러도 돼죠?"
"으, 응. 아니, 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이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뜨자 올가가 다가가 수현을 꼬집었다.
"아야."
"주인님, 요새 들어 더 헤퍼졌어요."
"그냥 말 걸었는데 왜 그래."
"눈만 마주치면 아무나 꼬실려고 드는 게 탕아가 따로 없네요. 이게 다 내기의 영향이에요. 그러니 내기는 취소하고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욧."
"싫어. 일주일 채울 거야."
그들은 일등석을 비행하고 있다.
일등석에는 그들과 뒤늦게 합류한 챠오메이, 여섯 사람 뿐이다.
이 참에 전용기를 장만하고 싶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예브게냐가 결국 일등석을 모조리 예약해버렸다. 비행기가 뜨자마자 예브게냐와 정하는 와인을 마셔대며 술판이다. 예브게냐는 즐거워서 마시는 것 같은데 정하는 묘하게 삶을 비관하며 현실을 잊으려 술에 취하는 비참한 모양새다.
"정하 씨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닌가요?"
"난 취할 거야. 취하고 싶어."
"무슨 괴로운 일이 있으시길래."
"너도 백년 넘게 살았으니 알겠지. 가끔 과거가 비수가 돼 현재를 찌르지. 나는 지금 피 흘리고 있다고."
"제 피라도 좀 드려요?"
"난 주인님 피만 마셔."
이브린은 쿨쿨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수현이 사진을 찍어댔다. 얼마나 귀여웠냐고 하면 바로 승무원들을 다 정신지배로 재우고 이브린과 비행기 위에서의 뜨거운 행위를 해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잘 쓸 줄도 모르는 비싸고 큰 카메라로 잠든 여자애나 몰래 촬영하는 모습이 마치 오타쿠 같아서 올가가 경악했다.
"주인님 점점 저질이 되고 있어요…… 이게 다 금욕의 영향이 분명해요."
긴 비행 끝에 그들은 프랑스에 도착했다. 계속 자던 이브린이 어느새 깨어서는 수현의 어깨에 기대 자는 올가를 깨웠다.
그들은 내리자마자 그들을 기다리는 리무진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은 창백한 얼굴의 사나이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정중히 인사했다. 불어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더니 차문을 열었다. 예브게냐가 불어로 무어라 말을 걸자, 그가 다시 대답했다.
"수화물은 얘네가 알아서 가져다준대."
리무진 안에서 올가가 일행들에게 작은 구슬 크기의 돌멩이를 나누어주었다.
"'바벨탑의 파편'이라는 물건이에요. 불어 버전인데 이걸 쥐고 있으면 불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게 해줘요. 참고로 아주 비싸답니다."
수현이 곧바로 불어를 해보았다. 진짜 가능했다. 마치 불어가 모국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왔다. 신기해서 계속해서 문장을 만들어보았다. 오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미의 피를 이으신 분이여."
그들이 바벨탑의 파편을 쥐는 것을 보고서 운전석에 앉은 사나이가 말을 걸었다. 그가 이르는 것이 정하인 것을 알고 모두가 정하를 쳐다보았다. 정하는 이제 자포자기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저도 영광이네요."
"장미의 여왕께서는 잠에서 깨자마자 당신을 찾으셨다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정하님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정하라는 발음은 좀 어색해서 그녀를 부르는 것 같지 않았다.
"저러라고 그 여자가 시켰나?"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정하에게 엘리제는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짧았고 이후에는 수면에 들어 다시는 보지 못했다. 과거에는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를 새로 태어나게 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엘리제가 떠난 이후 그녀의 삶은 홀로된 투쟁의 연속이었고, 수현을 만난 이후로는 그녀 스스로도 평하기를, 이제 삶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이대로 영원히 저택에서 노닥거리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녀에게 엘리제는, 평온을 깨는 귀찮은 존재였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보았다.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예쁘긴 했다…… 하고 생각하다가 수현을 번뜩 쳐다보았다.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위험하다.
아니, 설마 그러겠어.
수현에게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기세가 무섭다. 저 기세로 연회에 가다간 분명히 아무나 데리고 자버릴 것 같다. 엘리제는…… 정하가 한숨을 쉬었다.
그 여자가 어땠더라. 정하가 턱을 괴었다. 앞에서 운전수 뱀파이어가 무어라 떠드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파리의 풍경은 낯설었다. 온통 현대적인 한국과 달리, 옛 것들의 냄새가 배어나왔다. 그녀 또한 옛것이므로,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하나하나 뒤이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엘리제는 그녀를 구원했었고, 또 나락에 집어넣기도 했다.
파리에는 온 적이 있다.
"간만에 파리에 오니 좋구나. 이곳의 기사들이 내게 도전하다가 내 브레스에 구워지기도 했었지."
최연장자인 이브린이 웃었다.
수현이 이브린을 안아서 무릎 위에 앉혔다. 요새 저 포지션을 선호하는 수현이다. 이브린이 수현의 양팔을 잡아 자신을 둘러 안게 만들었다. 수현이 이브린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향을 맡았다.
"향수 뿌렸어?"
"예브게냐가 뿌렸느니라."
"옷도 내가 입힐 거니까 그 여행자복은 다음 기회에 입어. 아마존 이런 데 가면."
그 모습을 보던 운전수가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친구분들을 두셨군요. 호텔은 저희가 예약해두었습니다. 연회는 모레입니다. 이후에도 혹여 더 파리에 머물고 싶으시면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떠나고 싶은데. 정하가 생각했다.
이윽고 호텔에 도착했다. 그가 모두를 체크인 시켜주고는 연락처를 주고 떠났다. 오성급에, 한 사람에 방 하나, 킹사이즈 베드였다.
"뱀파이어들은 돈이 많나봐요."
올가가 자기 방에 짐을 두자마자 수현의 방으로 들어와 시트 아래로 들어갔다.
고개만 내밀고 수현을 쳐다보았다.
"주인님 만나기 전엔 인생이 가시밭길이었는데 덕분에 이런 데도 와보고…… 고마워요."
"여기 온 건 내가 아니라 정하 누나한테 덕이잖아."
"아니에요. 다 주인님 덕이에요. 와서 키스해주세요."
올가가 안아달라는 듯 양팔을 벌렸다.
수현이 다가가자, 올가는 그녀답지 않게 수현의 목을 끌어안고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여리고 가느다란 육체가 수현에게 매달리며 작은 새처럼 약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수현을 말끄러미 쳐다보더니, 귀엽다는 듯 뺨에 키스하고는 입술을 비볐다. 그 틈으로 혀를 내밀어 수현의 입술을 할짝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수현을 이끌어 자신에게 올라타게 하더니, 시트를 천천히 내렸다. 그 아래에서 올가의 하얀 가슴이 드러나 있다. 그리 크지는 않으나 모양새가 예쁘고, 그 위에 자리한 분홍색 젖꼭지가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빛으로 곤두서 있었다.
수현이 미소지으며 가만히 내려다보자, 올가가 토라진 표정으로 수현의 목을 더 끌어안더니 수현의 귓불에 혀를 밀어넣어 안쪽을 핥고 빨았다. 갑작스런 자극에 수현이 반응했다. 올가가 다시 수현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입술을 벌려 안에서 타액으로 젖은 설육을 내밀었다.
어서 다가와 범해달라는 듯이.
수현이 손을 뻗어 올가의 코끝을 튕겼다.
"아얏."
"올가도 욕구불만이 되니까 이런 식으로 유혹도 하는구나."
"히잉."
"끝까지 가면 어떻게 될지 보고 싶은데?"
수현이 장난스레 웃었다. 올가가 치, 하고 입술을 내밀었다.
점점 수현이 고단수가 되는 기분이다. 예전에는 조금만 자극하면 바로 반응하는 풋풋한 맛이 있었는데 이제는 점점 그녀들을 갖고 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수현에게 안기지 않은지 며칠 째. 혼자 위로하는 걸로는 결코 채울 수가 없다.
"이번엔 강력했어."
수현이 올가의 손을 쥐고 자신의 바지춤으로 가져다댔다. 물건이 맹렬히 성이 나 있었다. 올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기는 내기고. 나중에 둘이서 데이트라도 하자."
수현이 싱긋 웃었다. 올가는 행복해졌다.
"주인님 그런데 정하 언니 요새 왜 그렇게 주인님 눈치를 봐요? 뭐 잘못했어요?"
"아, 그거. 별 거 아니야. 뭐냐 하면……."
수현이 씨익 웃었다.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가 아니라 심술로 똘똘 뭉친 사악한 미소였다.
"엘리제가 누나 애인이었어."
"……네?"
"그 흡혈귀가 정하 누나 애인이었고, 첫키스도 그게 가져갔지. 후후. 별 거 아냐."
……지금 주인님이 마치 예브게냐 언니처럼 흡혈귀, 그리고 그거라고 했어……. 올가가 수현을 껴안고 달래주듯 등을 토닥거렸다. 별 거 아닌 것 치고는 표정이 장난 아니에요 주인님. 올가가 연회를 걱정하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