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04화 (104/180)

0104 / 0180 ----------------------------------------------

25. VAMPIRE WEEKEND

올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브게냐는 전화에서 신경을 끄고 챠오메이에게 다른 방법을 물었다. 정하가 괜히 옆에 앉아서 깐죽댔다. 그냥 할머니 되서 늙어 죽는 게 자연스럽고 너 답다는 악담에 예브게냐가 눈을 치뜨고 노려보았고, 순간 방전하듯 뿜어진 정신지배의 기운에 챠오메이가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이브린은 늘 그렇듯이 차음막을 설치고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그간 화면만 들여다보던 이브린은 이제 팝콘과 감자칩, 콜라를 늘어놓고 우적우적 씹는 수준에 이르렀다.

"네?"

전화 받던 올가가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아직도 으르렁거리는 예브게냐와 정하, 그리고 둘 사이에 끼어서 고통 받는 챠오메이가 있었다.

"저기, 언니……."

올가의 호소는 그들에 귀에 닿지 않았다. 요새 잠잠하다 했던 둘의 개싸움이 시작되려나 하는 충돌 직전의 순간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올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현관이 열리고 교복을 입은 수현이 들어왔다. 엉거주춤 서 있는 올가와 눈이 마주치고, 식탁에 앉은 세 여인을 발견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지직거리며 힘이 대치하는 것을 보았다.

"……."

순간 챠오메이가 애타는 눈으로 수현을 본 것도 같다. 수현은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린다.

"아. 덥다. 올가 시원한 거."

"주인님. 여기 전화가……."

수현이 쇼파에 앉았다. 이브린이 수현을 보고서는 사뿐히 떠올라서는 수현의 무릎 위에 앉았다. 요새 이브린의 아무렇지 않은 듯 행하는 강력한 스킨쉽에 다른 세 여인들이 긴장하는 중이다. 정하와 예브게냐가 노골적인 색기로 수현을 유혹한다면, 이브린은 마치 성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는 듯 수현에게 안기고는 자연스레 행위로 잇는다. 수현이 기쁜 듯 웃으며 이브린의 뺨에 키스한다.

올가는 그 모습에 질투심을 느끼고, 아직도 싸우는 식탁 위의 여인들에게 당혹감을 느끼고, 자신이 받은 전화를 해결해야 하는 부담감을 느꼈다.

수현과 이브린은 같은 거실에 있지만 공간을 두절시키는 차음막 너머에 있다. 올가가 한숨을 내쉬고는 식탁으로 다가갔다. 정하와 예브게냐는 챠오메이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싶지 않은지 아직 무력충돌에는 이르지 않았다.

"꼬마, 내가 흡혈귀로 만들어줄까? 전처럼 침대 위에서 나한테 물리고 오줌 지리면서 언니언니 거리게 만들어줘?"

"그, 이, 비, 비밀로 하기로 했으면서, 역시 예의도 없고 배신만 일삼는 흡혈귀인 거네. 주인님 아니었음 바로 니 송곳니부터 부러뜨렸을 거거든? 너야말로 어제 나랑 주인님 사랑 나누는 중에 끼지도 못하고 내 뒷구멍이나 핥고 있었……."

"시, 시끄러 이 망할 코쟁이가!"

"어머 나잇값 하네. 하긴 할머니시니까 네가 태어난 시절엔 코쟁이라는 미개한 단어를 썼겠지? 주인님은 내 콧날이 예쁘다고 항상 키스해주는데?"

"너 나한테 페니스 밴ㄷ……."

"닥쳐!"

둘이 둘의 치부를 폭로하다 분에 못이겨 힘으로 싸우려는 순간.

둘의 머리 위에서 얼음이 떨어졌다.

후두두둑, 하고 잘게 부서진 얼음덩이들이 양동이를 부은 것 마냥 둘을 덮쳤다. 예브게냐와 정하는 그대로 굳었다.

둘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올가를 보았다. 올가가 전화기를 어깨에 귀 사이에 걸친 채로 양손을 뻗고 있었다. 단호한 표정이다.

"싸움은 금지입니다."

"……."

"……."

"어쨌건 정하 언니한테 이상한 전화가 왔어요."

올가가 손을 휘둘러 얼음들을 다시 없애자 좀 누그러졌는지 정하와 예브게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하가 젖은 머리카락을 틀어올려 묶으면서 말했다.

"무슨 전화?"

"무슨 연회를 연다고…… 혈족은 참가를 하라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정하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뭐?"

"전화 받아보세요."

정하가 전화를 들었다. 수현도 무슨 일인가 싶어 쇼파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브린은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수현이 이브린에게 무어라 속삭이자, 이브린이 다시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하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상대가 무어라 떠드는지 정하는 한참을 들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안 가."

그리고 전화기를 꺼버렸다. 누가 봐도 제대로 된 대화의 끝이라고 보기 어렵다. 수현이 다가왔다.

"뭐에요?"

"응, 별 거 아니야."

왔어, 하고 정하가 수현의 가슴에 살짝 안기며 입 맞추었다.

문득 챠오메이가 수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하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닥터 케이, 정체는 답 없는 얼빠 아이돌 팬클럽 회장이다. 수현의 외모가 비현실적이긴 하다. 아무래도 또 한 여자가 수현에게 빠진 것 같다. 그녀의 주인님 또한 여자라면 마다하지를 않는 성욕 넘치는 소년이니, 앞으로 잘 커트해야겠다.

……하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수현이 챠오메이를 바라보며 생긋 웃고 있었다. 정하가 한숨을 쉬었다.

"또 오셨네요. 무슨 일이세요."

"사, 상담을 좀. 헤헤. 수현 씨는 학교 갔다 오셨나봐요? 교복이 참 잘어울……."

정하의 아이를 가차 없이 없앨 때는 괴물 보듯 하더니, 이제는 선망의 눈이다. 정글에서 백 년이나 산 여자가 정상일 리 없지. 지금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방금 키스까지 한 남자를.

흘끗 식탁에 늘어놓은 서류를 보니 예브게냐가 대충 결정한 것 같았다. 모든 방법 중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코스인 것 같다. 그냥 확 물어서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릴까보다, 하고 생각하다가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의 백 년만인데……."

"뭐가요?"

"아니……."

"나한테 비밀 만들었어요?"

수현이 짐짓 서운한 눈으로 아직 안겨 있는 정하를 쳐다보았다. 저런 눈으로 보면 또 저항을 못하는데. 정하가 애써 눈을 돌리는데 돌아간 턱에 수현이 키스했다. 새가 쪼듯이 턱에서 뺨으로 올라오며 입을 맞추자, 정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 열렬하게 딥키스했다. 둘의 침이 뒤섞이고 혀가 얽힌다.

……젖었어. 정하가 애써 키스를 멈췄다.

"하아……."

"빨리 말해줘요."

"날 뱀파이어로 만든 사람이 깨어났나봐. 연회에 오래."

정하가 말하자 모두가 놀랐다.

예브게냐가 답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떴고, 올가가 입을 벌렸다. 이브린은 예상했다는 듯 다시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렸고, 수현은 가만히 정하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안아 당겼다. 둘의 아랫배가 닿았다. 뜨겁다. 수현이 묘하게 질투하는 눈을 하고 있어서 정하는 기분이 좋아졌다.

"주인님은 누군지 알잖아?"

수현이 다시 입을 맞추었다. 둘의 여린 살이 겹쳐지는 순간, 수현이 이를 세워 정하의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나왔다. 정하는 가벼운 오르가즘이 몸을 휘돌아서 휘청, 수현에게 기댔다. 수현이 그녀의 배어나온 피를 핥았다.

"연회에 가요."

"응?"

"언제 한 번 보고 싶었어요. 그 여자."

정하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든 여자, 엘리제가 그래, 여자이긴 하다. 거기 생각이 미치자 정하는 불안해졌다. 주인님과 여자. 주인님 옆에 여자가 붙으면 그냥 불안하다.

"아아니, 굳이 갈 필요는 없……."

"유럽 여행도 하고 좋잖아요. 다같이 가요. 재밌겠다."

수현이 이미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눈치 없는 올가는 이미 동조하고 있다.

"와. 좋아요. 누군진 모르겠지만 정하 언니를 만든 분이면 대단하겠죠? 혹시 흡혈귀왕? 언제 출발하죠? 짐 싸고, 옷도 사야겠는데."

"후후. 내가 또 유러피안룩이 잘 어울리거든."

예브게냐는 이미 정하가 곤란해하는 걸 감지하고 신나서 부추겼다. 정하가 이브린을 쳐다보자, 그녀는 예의 싱그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다.

"재밌겠구나. 엘리제는 나의 친구이니라."

……아니 쟤는 뭐 어떻게 벌써 누군지도 알고 있어.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들의 여행이 결정되는가 싶었다.

수현이 정하의 눈맞춤하며 콧등을 비볐다. 정하가 에효, 한숨을 쉬면서 수현을 더 끌어안았다.

수현과 정하가 분위기를 타는데 배경에 멀뚱히 앉아 있던 닥터 케이 챠오메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띠링띠링띠리링하는 분위기 깨는 음악이다. 챠오메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닥터 케이입니다. 네. 어머, 어머. 네. 오랜만이시네요. 어머, 정말요? 축하드려요. 백 팔년 주무셨다고요? 긴 수면이셨네요. 그정도면 한 번 검진 받으시는 게 좋죠. 뱀파이어분들도 제가 자주 진료를 하니까 문제 없습니다. 보수만 적당하면…… 네, 충분하네요. 어머, 연회에도 초대해주신다고요? 영광이에요. 뱀파이어의 연회는, 특히나 엘리제님의 연회는 근사한 걸로 정평이 나 있는데."

"……."

혹까지 달릴 것 같다.

엘리제 때문에 질투하기 시작한 수현이 정하에게 위층으로 가자고 턱짓했다. 이럴 때의 수현은 격렬하고, 더 황홀하다. 정하는 벌써 아랫배가 오싹거려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정하는 씨익 웃으며 작은 복수를 감행했다.

수현의 목을 휘감아 안으며 귀에 속삭인다.

"잊었어? 우리 내기는 모레까지인데?"

"……!"

"뭐, 정 급하면 주인님 자위하는 건 도와줄 수 있는데."

씽긋 웃었다. 후후. 저 애타는 눈을 보니 이번 내기는 내 승리가 분명하군. 정하가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키시노가 벤치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극동 최강의 뱀파이어는 정하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키시노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는 정하처럼 먼지 풀풀 날리게 자신을 광고하지 않고서, 소리 소문 없이 일본을 장악했다. 한 클랜이 한 국가의 대부분을 집어삼킨다는 건 전세계에서도 드문 일이다. 특히 일본과 같은 경제대국에서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그녀의 클랜 타치바나구미는 일본의 어느 지역이든 최소 절반 이상의 영향력을 가졌다.

정하는 모습을 감추었다. 예전, 한 섬에서 우연히 그녀와 그녀의 애인이 된 소년을 본 적이 있다. 귀여웠었지. 애인과의 신혼생활에 젖어서 정글의 복잡한 일들은 다 잊고 살 터였다. 그 소년을 빼앗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정하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할 것 같아서 말았다.

정하는 몰랐겠지만, 그녀와 정하는 자매니까. 정하가 먼저 뱀파이어가 되었으니 언니라고 해야 할까.

같은 어머니에게 피를 받고 뱀파이어가 된 동류다.

엘리제. 그 아름다운 여인. 잊을 수 없는 장미혈족의 여왕. 묘비를 찌르는 장미.

그 생각을 하며 키시노가 벤치에서 발을 굴리는데 문득 한 소년이 다가왔다.

"마스터."

"응. 하야토. 어떻게 됐어?"

"……궤멸했습니다."

"끄응."

키시노가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일본에서 급격히 세를 불리는 조직이 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소녀였다. 샛노란 눈동자의 미소녀. 하지만 그 힘은 급격히 파괴적이어서 홀로 수많은 적들을 찢고 피웅덩이 위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잔혹한 괴물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정보도 있었다. 그들의 행로가 위협적이어서 한 번 탐색조를 투입해봤는데, 다 죽은 것 같다.

하지만 그녀에 비하면 아직 미미하므로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그래. 일단은 주시하고 있어. 난 잠깐 출장갈 것 같아."

"네?"

하야토가 눈을 크게 떴다. 키시노가 미소지었다.

"내 어머니가 눈을 뜨신 것 같거든. 인사는 드려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