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03화 (10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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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VAMPIRE WEEKEND

뱀파이어의 연회를 본 적 있니?

산 제물의 피를 길게 핥으면서 창백한 눈을 빛내는 음험한 괴물들?

하시시가 피어오르고 취한 이들이 드러누워 꿈틀거리는 가운데 피묻은 이를 드러내고 미소 짓는 천년 묵은 흡혈왕?

아니야, 아니야.

그들은 명랑하고 즐거운 존재들이야. 삶을 즐기고 예술을 이해하고 시간이 무한하기에 순간을 영원으로 박제하는 이들이지. 그들의 파티는 아무도 모르게 시작돼. 그들은 뱀파이어가 아닌 친구들과 데이트를 하고, 근사한 저녁을 하고, 그리고 서로의 비밀에 대해 속삭여. 그리고 세상이 너에게 숨긴 비밀들을 하나하나 알려주다가, 이윽고 짠, 하면 주위는 어느새 뱀파이어들과 그들의 인간 친구들로 가득해. 그들은 서로 윙크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지. 초는 영원할 것처럼 밝게 타오르고, 그들의 그림자는 깔깔거리는 재주꾼 곰처럼 흔들려.

왜 인간을 초대하냐고? 그야, 파티에는 음식이 필요하잖아. 우리는 피를 먹는 존재들이고, 너희는 피를 만드는 존재들이니까. 죽지 않을 만큼이니까, 화내지는 마. 너희가 기꺼이 목을 내밀어주면 우리는 기꺼이 너의 친구가 되어준다는 걸 알아둬. 우리는 친구들에게 친절해. 상냥하고, 너그러운 청중이지. 네 삶의 음율은 때로는 환하고 때로는 우울하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영원할 것처럼, 실은 영원하니까, 우리답게 너희를 보아줄 거야. 나의 첫 연회 파트너였던 곱슬머리 소녀는 이제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 주름진 눈으로 내게 손자 손녀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빙그레 웃어. 나는 그녀보다도 나이가 많은데 그녀가 나를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생각하는 걸 느끼면 기분이 좋아져. 그녀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지만, 그녀가 곧 죽을 거라는 생각에 때로 슬퍼서 눈물이 나. 내 순수를 위한 한 방울. 자, 봐. 뱀파이어도 눈물을 흘린단다. 나는 그녀를 위해 그녀의 아이들을 지켜주기로 약속을 했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그야 넌 오늘 나의 파트너니까.

놀랐니?

짠!

*

"오늘의 연회는 대성공이었어. 내 덕이야. 내가 데려온 몬드리오의 춤솜씨 봤지?"

"아니야 아니야. 내 파트너였던 마누엘라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파티를 구했어."

"바보들! 나의 조르주는 벌써 열 번째 참가인데도 항상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단 말이야. 그 덕분에 다들 폭소했어."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재잘대지만, 그들은 우아한 외모의 청년들이었다. 상대를 유혹하는데 값비싼 와인 대신에 자판기 콜라를 마시는 것으로 충분한 그런 부류의 얼굴들이다. 그들은 지난 파티의 화려함을 떠들어대다가, 그들이 모은 새로운 예술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미 고전이 된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들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꼬리를 물었다.

갑자기 쿵, 하는 소음이 그들의 대화를 잘랐다. 청년들이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드러누워 있던 여인이 침대에서 내려와 벌떡 서 있었다.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붉다.

그녀는 중국의 치파오와 같이 허벅지가 길게 열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계속 누워 있었으나 옷과 몸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맵시가 맞았고, 다만 눈만이 졸린 듯 살짝 비스듬하다. 그녀가 청년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시끄러워."

"어. 어어어. 엘리제가 눈을 떴어."

"잘 잤어? 이제 깬 거야? 다시 안 잘 거지?"

"믿을 수 없어. 축제를 열어야겠어."

청년들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엘리제는 천천히 청년들에게 걸어갔다. 창에는 만월이 떠 있고, 샹들리에 불빛은 잘게 떨어져 내렸다. 엘리제는 그들이 둘러앉아 있던 테이블 위의 와인잔을 들어 한모금 들이켰다. 피처럼 붉은 그것이 그녀의 목을 적시는 순간, 마른 땅에 물이 차오르듯 감각이 되돌아왔다. 오래 잊었던 것들이 하나하나 눈을 떴다.

엘리제.

백 년을 잠들었던 뱀파이어가 눈을 떴다.

"지금이 몇 년도지?"

금발의 청년이 스마트폰을 들어 액정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건 뭐지?"

"오, 가엾은 엘리제. 엘리제는 이제 구식이야. 하하하. 이건 기본인데."

청년이 화면을 밀어서 잠금해제하자, 화면이 뒤바뀌었다. 엘리제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티는 내지 않고 동공만 굴렸다.

"벼, 별로."

"걱정 마. 엘리제 너도 곧 이 시대에 익숙해질 테니까."

청년이 가볍게 엘리제의 이마에 키스했다.

엘리제는 그녀가 잠든지 정확히 백 팔년이 지난 것을 알게 되었다. 긴 잠을 끝내자 다가온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고요가 아니라 이 시끄러운 세 장난꾸러기 뱀파이어였다.

하기야 대부분의 뱀파이어는 장난을 좋아하고 쉽게 들뜬다. 그러한 낙천성으로만 그들은 기나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다. 우울한 뱀파이어는 빨리 죽는다. 대부분은 자결한다. 그러므로 기나긴 삶을 살아온 뱀파이어는 그에 합당한 소명이 있거나, 그 모든 걸 떨칠 수 있을 만큼 명랑한 이들이다.

그리고 엘리제는 세계에서도 꼽히게 오래 살아온 뱀파이어다.

체페슈의 딸, '묘비를 찌르는 장미' 엘리제였다.

"자, 이 여왕님이 드디어 눈을 떴으니 다들 인사하러 오라고 해."

"파티다!"

"엘리제가 눈을 떴으니 최고로 즐거운 축제를 열자."

아직도 긴 잠의 여운이 떠나지 않아 머리가 어지럽다. 엘리제는 청년들이 잔을 부딪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잠들기 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왜 잠이 들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 속에 어떤 여자가 있었던 것도 같다. 엘리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내 혈족들 모아."

"네."

"네,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지 마."

"Yes, my lord."

"우리의 여왕님."

이 세 청년은 엘리제의 직계이다.

그녀는 뱀파이어들의 왕, 체페슈를 아래에서 떠받치는 세 기둥 중 하나인 장미의 혈족의 수장이다.

그녀가 눈을 떴다는 소식이 곧 정글에 퍼질 것이다. 소동이 일겠지. 엘리제는 앞으로 겪을 이 시대의 흐름을 기대하며 미소지었다. 이 장난꾸러기들이 모여 시시덕거리는 걸로 보아 삭막한 시대는 아닌 것 같다. 뱀파이어들은 명랑하지만, 전쟁의 시대에는 누구보다 잔혹해지고, 누구보다 우울해질 수도 있는 이들이다.

저기 깔깔대며 사과 세 개를 저글링하고 있는 청년이 백 년 전에는 라이칸슬로프 수십을 찢어버리고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씻지도 않은 채 화폭에 죽음을 조언하는 바니타스 정물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렸다는 걸 누가 알까.

엘리제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성에 있던 다른 뱀파이어들이 찾아와 크게 기뻐했다. 엘리제는 이후에 있을 연회를 기약하며 그들을 물렸다.

그리고 가계도를 가져오게 했다.

그녀의 혈족에 대해 상세히 써내려온 족보였다. 가장 높은 곳에 체페슈를, 그 아래에 엘리제를 두고 그녀로부터 이어져온 피의 계보가 기술되어 있다. 뱀파이어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다른 모든 동물처럼 성행위로 수태하거나, 전설처럼 피로써 다른 뱀파이어를 만들거나. 하지만 뱀파이어의 임신 확률은 낮았다.

그녀가 잠든 백년 사이 수많은 새 혈족들이 생겼고, 몇몇의 옛 혈족들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낯선 선이 옆페이지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엘리제, 그녀에게서 이어진 것이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그녀의 직계는 눈앞의 세 청년과 알래스카로 떠난 하나, 그리고 오랫동안 얼굴도 보지 못한 둘이 전부였다.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엘리제가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두 개의 이름이 이어져 있었다.

정하.

키시노.

동양의 이름이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동방에 가 있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풍경과 문화에 취해 홀린 듯 떠돌았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더라.

엘리제가 이마를 짚었다. 기억이 떠오를 것 같다.

***

정하가 챠오메이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일 끝났는데 왜 자꾸 찾아와?"

"시끄러. 지금은 내 컨설턴트야."

예브게냐가 말했다.

챠오메이가 곤란한 듯 웃었다.

예브게냐와 챠오메이가 식탁에서 마주 앉아서는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보험사 직원처럼 뭔가 서류를 여러 개 늘어놓고 하나하나 장단점 따위를 이야기했다. 저것들 대체 뭐하는 건가 싶어서 정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어느새 다가온 올가가 말했다.

"불로(不老) 연성 때문이에요."

이 집에서 예브게냐만이 인간이었다. 수현은 이제 인간인지 뱀파이어인지 아님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괴물이고, 올가는 엘프의 혈통, 정하는 불멸의 뱀파이어, 이브린은 설명이 필요 없는 드래곤이다.

챠오메이 또한 인간이지만 백 년을 넘게 살았다. 충분한 부와 자원만 있다면 정글에서 불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불가능한 것은 불사이지, 불로가 아니다. 그래서 챠오메이는 경험자이자 최고의 의사로서 예브게냐의 불로 작업에 대해 상담해주고 있었다. 예브게냐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예브게냐는 어린 나이일 때부터 이미 멘탈마스터로 러시아를 휘어 잡았던 몸이다. 불로를 취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했지만, 그녀는 다만 기다렸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불로를 취하면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예브게냐는 늘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판단했고, 이제 그녀는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수현을 만나고, 함께 하는 지금 이 시간 그녀는 가장 아름다웠다. 참고로 예브게냐가 현재 이 집에서는 사실상 가장 가슴이 크다. 그래서 그녀는 미루어왔던 불로의 작업을 취하는 것이다. 챠오메이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 중 하나는 뱀파이어가 되는 것이다.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지요. 뱀파이어로 만들어줄 상대를 만나는 게 어려운데, 예브게냐 씨의 경우에는 뭐……."

챠오메이가 정하를 쳐다보았다. 예브게냐가 진저리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뱀파이어가 되면 불멸을 얻고 피를 음미할 수 있게 되지만, 또한 무엇인가 잃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예브게냐는 정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하가 이름을 떨친지는 오래 되었지만 그녀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본래 인간이었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다면 정하를 뱀파이어로 만든 직계는 누구일까.

예브게냐는 궁금해졌다.

그때 문득,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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