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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요람을 흔드는 손
꿈을 꾸었다.
수현의 꿈속에서 세상은 언제나 어두웠다. 까마득한 밤의 장막이 드리운 꿈의 풍경은 자궁의 그늘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에 안겨 아름다운 것들만을 꿈꾸던 그 시절이다. 수현이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몸을 식혔다. 나른한 가운데 잠이 들까, 말까 하는 기로에서 문득, 세상이 흔들렸다.
고요히, 앞으로 뒤로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일정한 반동에 취해 한층 몸에서 힘이 빠졌다. 이대로 육신의 감각을 잊고 꿈의 바다로 침몰할 것 같다. 끼익. 끼익. 요람은 수현을 안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앞으로, 뒤로 흔들리는 가운데 수현은 눈을 들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요람을 붙잡은 흰 손을 보았다.
그 손이 요람을 밀어올릴 때마다 정신은 한 걸음씩 아래로 가라앉는다.
***
챠오메이가 저택의 반경에 들어서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의 마킹은 너무 어두워서 끝을 알 수가 없다.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구분은 부질 없는 거였다. 그 힘은 굳이 이를 드러내고 위협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의 어둠을 드러내고, 그 까마득한 깊이에 보는 이로 하여금 덜덜 떨리게 하는 것이다. 지금 그녀가 만나러 가는 사람은, 생각 이상으로 괴물이었다.
저택 입구에서 초인종을 누르자, 예의 전화기 속 목소리로 들어오세요, 하고는 문이 열렸다. 챠오메이는 괜히 머리를 정돈하고 저택으로 들어섰다. 정원은 얼핏 평범해보이는데, 여기저기에 이따금씩 어마어마하게 귀한 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마력을 먹어치워 기르기도 힘든 푸른 장미를 보았을 때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챠오메이가 들어서자, 메이드복을 입은 소녀가 생긋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거실로 들어서자, 저택의 주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벽안의 화려한 백인 여성이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흘끗 챠오메이를 바라보았다.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훌륭한 비율과 미모였다. 그녀는 흥미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린다. 챠오메이는 그녀의 얼굴이 아름다워 더 보고 싶었지만, 불쑥 시야 가장자리에서 떠오르는 은빛이 다시 눈을 돌렸다.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소녀였다. 그녀는 마치 자신을 샅샅히 훑는 듯한 눈으로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녀의 동공 깊숙한 곳은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루비색 눈을 마주하자 감히 더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쇼파에 흐트러져 있는 두 명의 흑발을 발견한다.
자신을 향해 웃는 것은 흑발의 고혹적인 미녀였다. 그녀는 같은 여성인 챠오메이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매혹적인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챠오메이를 올려다보며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돌려 곁에 앉은 이에게 무어라 속삭인다.
그곳에,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소년이 있었다.
흑발이 가지런히 이마를 덮고 있다. 고요한 표정이 마치 잠든 신의 얼굴처럼 보인다. 그녀가 여태 본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모든 얼굴선이 완벽한 비율로 자리하고 있어서, 어떤 예술가도 더이상 손댈 곳을 찾을 수 없을 조각 같았다. 곁의 여인이 속삭이자 가느다랗게 눈을 뜨는 그 모습은 성화의 한 장면 같았다.
소년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챠오메이는 문득 자신이 맡고 있는 아이돌 팬클럽 회장직이 헛되게 느껴졌다. 그녀는 차마 더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케이 챠오메이, 다들 닥터 케이라고 불러요."
"반갑습니다."
소년이 웃었다.
챠오메이는 깨달았다. 어느새 메이드복을 입었던 소녀도 소년의 뒤에 서 있었다. 이 아름다운 여인들은, 저 소년을 둘러싸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 소년이 이곳의 왕이다. 어둠을 흩뿌린 짐승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갸웃하는 흰 얼굴에는 티가 없고, 새까만 눈동자에는 끝이 없다.
"무슨 일로 절 부른 거죠?"
"그건……."
소년이 곁에 앉은 여인의 배를 흘끗 쳐다보았다. 챠오메이는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챠오메이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끝을 얹었다. 마력을 다루는 그녀에게 진료 도구는 필요하지 않다. 그녀는 필요한 모든 정보를 손끝으로 얻어낼 수 있다. 챠오메이가 눈을 감고, 그녀의 안으로 침잠해들어갔다.
여인의 안에 자리한 새 생명은 작고 여리나, 속에는 어둠을 품고 있었다. 낯익은 어둠이었다. 이 아이가 저 소년의 씨앗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둘의 피를 타고난 아이는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일는지. 그러나…….
챠오메이가 한숨을 쉬었다.
태아는 강력한 힘을 이어받았으나, 그게 문제였다. 이대로 가다간 태아는 결국 어미의 힘을 다 빨아들이고도 모자라 그녀를 해하고 말 것이다. 또한 아비와 같이, 태아의 능력은 어둠이고 어둠은 그의 수족이었다. 그의 일부나 다름 없을 자궁 안의 어둠은 그의 숨소리에도 일렁일 것이고 곧 산모의 몸을 망칠 것이다.
갖은 수단을 동원한다면 둘 다 살아남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확률이 높지 않았다.
챠오메이가 표정을 억지로 굳혔으나 그 분위기가 전해진 것인지 소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챠오메이가 손을 뗐다.
이런 이야기는 언제나 꺼내기가 어렵다.
"이대로라면 아마 산모가 위험할 겁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는 있지만, 둘 다 살리려면 낮은 가능성에 도박해야 해요."
"그래요."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챠오메이가 여인의 표정을 살폈다. 담담했다. 이들 정도 되는 능력자들이면 아마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년이 씁쓸하게 웃으며 곁의 여인에게 키스한다. 애정이 묻어나왔다. 저런 관계였다면, 자신들의 사랑의 산물을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낮은 가능성에 모든 걸 걸고는 한다. 이런 도박에서 성공하는 이들은 분명 있었지만, 그 확률만큼 모든 걸 잃고 통곡하는 이들도 보았다. 챠오메이는 자신이 가진 도박수들을 생각했다.
"선택하기 몹시 어려우실테니 일단……."
"애를 없애죠."
소년이 불쑥 말했다. 챠오메이가 입을 다물었다.
소년은 평온한 얼굴이다.
그래서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다시 돌이켜보아도 그 말이 맞았다. 챠오메이는 산뜻한 얼굴로 자신의 아이를 없애자고 한 소년을 바라보다가, 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양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녀는 어떻게…….
"지워야겠네."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챠오메이가 잠시 할 말을 잃고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급하게 결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리스크를 감수하는 경우 선택 가능한 옵션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둘 다 살릴 확률이 얼마나 돼요?"
소년이 물었다. 챠오메이는 솔직히 대답했다.
"최대 높게 잡아도 삼십프로……."
"안돼요."
소년이 고개를 젓는다.
"실패 확률이 삼십프로여도 안할 건데."
"아쉽네. 주인님 닮은 아기 낳고 싶었는데."
"닮은 거 말고 본인이 여기 있잖아요."
챠오메이가 침을 삼켰다.
그 둘은 가까이서 속삭이며 키득거렸다. 이 저택에서, 그 결정에 동요하는 이는 정작 그녀 혼자인 것 같았다. 그제야 그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이곳에 흐르는 기운은 어두워서 끝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둠은 이 저택을 꽁꽁 싸매고 있고, 이곳의 여인들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옭아매고 있다. 그녀들의 터럭 하나도 놓치지 않고 어둠은 그녀들을 갈무리한다. 그녀들 또한 이 어둠에 입을 맞춘다.
그들 서로만으로도 충분한 무한정한 집착.
설령 그들의 아이라 할지라도, 이 관계를 해친다면 배제할 수 있는 극단적인 애정.
챠오메이가 입을 열었다.
"아이를 없애는 데 둘 다 동의하십니까?"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챠오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괴물의 저택이 아니었다.
괴물들의 저택이다.
***
"난 사랑의 결실을 위해 죽을 수 있다거나 하는 그런 여자가 못돼."
껴안고 있던 정하가 조용히 속삭였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주인님이 죽으면 따라 죽어버리겠지만, 난 절대 먼저 안죽어. 주인님을 계속 느끼기 위해서면 다른 누가 어떻게 돼도 난 상관 안해."
"나도 마찬가지야."
수현이 속삭였다. 정하의 체온이 느껴졌다. 둘은 그저 껴안고서, 조용히 잠을 기다린다.
수현의 꿈은 언제나 어둠 속이다. 수현은 흔들리고 있었다. 일정한 박동으로 그를 밀어올리는 손은 희고, 나머지는 어둠에 잠겨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수현은 혼곤한 눈을 들고 그 손을 바라보았다.
어린 아이의 손이다.
수현이 픽 웃었다.
수현이 손을 저었다. 그 손아귀는 좀처럼 요람을 놓으려들지 않는다. 세계가 뒤흔들렸다. 수현이 어둠을 휘둘렀다.
그 손은 이내 어둠에 먹혀들고 까마득히 침몰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어둠, 그리고 고요.
수현이 눈을 감았다. 일정하게 흔들리던 진동은 이제 가라앉아, 전신이 어둠에 잠겼다. 조용하다. 모든 것이 무에 가까운 어둠이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야, 황홀하리만치 안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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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 전엔 딸들 낳고 시간과 정신의 방에 집어넣은 다음 뺄려고 했는데 제가 겁이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