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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해피 엔드 트리거
구름이 몰려오던 하늘은 이내 흐려지더니, 가느다란 빗줄기를 떨어뜨린다.
풍경이 일제히 젖어들었다.
영진이 열린 창으로 손을 뻗어보았다. 투둑, 툭 떨어지는 비가 손바닥에 하나, 둘 파문을 남긴다. 손에 맺힌 물기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얼굴을 쓸었다. 차다. 찬 비가 정신을 조금 깨우는 것 같다. 명료해진 머리로 시커멓게 죽어가는 가슴을 더 선명하게 직시할 수 있다.
눈을 깜빡였다.
"……님. 선생님."
영진이 고개를 돌렸다. 반장이다.
"수업 끝났는데요……."
"아, 그래. 미안하다. 딴 생각 좀 했어."
정신을 차리니 수업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영진은 말 없이 교탁으로 돌아와 교과서와 프린트들을 모았다. 한데로 모으고 나서도 다음에 무얼 해야하는지 멍하니 생각했다. 수업이 끝났으니까…….
가야 되는구나.
뭉치들을 품에 안고 교실을 나간다.
영진이 떠나간 교실은 좀체 활기를 찾지 못하고 조용하다. 와중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영진샘 아까 운 거 맞지?"
"빗물 아냐?"
"실연이라도 당했나?"
민주가 바깥을 보았다. 창 너머 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와, 빗줄기는 점점 굵어질 것 같다. 체육하던 남학생들이 신나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민주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엎드렸다. 노래는 언제나 듣던 그것이다.
영진은 복도를 걸으며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흔든다.
그는 안다.
지윤을 사랑했고, 늘 그녀만 바라보았던 영진은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이별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끝은 갑작스런 호우처럼 찾아와 영진을 두들긴다.
하지만 대체 왜일까.
평생을 함께 하자는 자신이 부담스러웠을까. 자신의 집안 사정이 탐탁치 않았을까. 아니, 아니다. 지윤은 그런 여자가 아니다. 영진은 더 걸을 수도 없어서 잠시 멈춘다. 비는 점차 거세져, 빗물 부서지는 소리가 귀를 가득 메운다.
문득 누군가가 눈에 밟힌다.
그 남학생이다. 병원에서 울었던 그 남자애는 지금, 낯선 여학생과 함께 웃고 있다. 우리 헤어졌어요, 하던 여자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다.
둘은 함께 소근거리며 웃다가, 손을 잡았다. 여자애가 발꿈치를 들어 남학생의 귀에 무어라 속삭이고는 다시 웃는다. 지독한 기시감이 몸을 휘감는다. 그 여자애를, 낙태하고 울던 그 여자애로 바꾸면 이전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더 예쁘고, 어리다. 영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기가 힘들어 벽에 기댄다.
너희는 어떻게.
희미하게 열린 복도 창 틈으로 빗방울이 튀었다. 일정히 튀어오르는 그 고동을 느끼면서 영진은 눈을 감는다.
그렇게 쉽게 변하니?
영진은 아까부터 속을 비집고 기어다니던 감정의 정체를 깨닫는다.
분노가 들끓었다. 창틀을 붙잡은 손이 떨렸다. 더 볼 수가 없어서 애써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울던 너희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른 사람과 함께 웃을 수 있는가.
예지윤. 네가 어떻게 이렇게 나를 내쳐버릴 수 있는가.
두 눈 시야 가득히, 비내리는 도시를 담는다. 마음으로 빗줄기를 들여와 화상으로 흉진 속을 식힌다. 그러나 그것들은 피와 진물과 뒤섞여 구정물이 되어 흐르고, 안을 메우고 목까지 차오른다. 영진은 금방이라도 역류할 것 같은 처참한 속을 억눌렀다.
아직은 아니다.
영진은 어떻게 남은 수업들을 진행했는지, 퇴근까지의 일정을 어떻게 끝마쳤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시계바늘이 마침표에 이르는 것을 기다렸다. 때가 되었을 때 정신 차리니 그는 자동차에 앉아 시동을 걸고 있었다. 와이퍼가 쉬지 않고 뽀드득 유리를 닦아내지만 비 또한 계속해서 창을 흐린다.
차는 빗속을 나아간다.
몇 번, 경적이 거세게 울리며 욕설이 들리고는 했다.
하지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해서 머리를 맴돈다. 왜 이별을 고하는지, 두 눈을 마주하고 직접 들어야 한다. 그녀가 찾아온 나를 보고 다시 안아주지 않을까하는 헛된 망상만이 잡음처럼 끼어든다.
어떤 이유로든,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지윤의 오피스텔에 도착해, 빈 자리 아무 곳에나 차를 구겨 넣는다.
몇 번이고 방문했던 오피스텔은 이미 익숙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층을 눌렀다. 표시하는 층수가 그녀에게 가까워질수록, 심장도 빠르게 뛴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다.
어떤 대답이 가장 아플까.
나 이제 영진 씨 사랑하지 않아.
아마 그것일까.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영진은 익숙하게 왼쪽으로 몸을 돌린다. 늘 가던 그 길이다. 그녀가 집에 있을까, 하는 일은 문제가 아니다.
저 문이다.
가까워 오는, 한 발짝 다가가면 다시 멀어지는 저 문 너머에 그녀가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영진이 하는 생각은, 몇 분 후 나는 어떻게 이별을 받아들일까, 이다. 조용히 눈물 떨어뜨릴까, 아니면 흐느낄까 통곡할까, 화가 나서 거리에 뛰쳐나가 소리지를까. 가능성들을 생각하며 걸음을 문으로 옮긴다.
그녀가 호흡한 공기들이 이 너머에 있겠지.
영진이 벨을 누르려는 찰나였다.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다.
문틈으로 긴박한 숨소리와, 가느다랗게 흐느끼는 신음이 새어나온다. 영진은 순간 머리가 정지했다.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것이다.
모든 경우의 수들이 부서져내리고, 영진은 믿을 수 없어 귀를 문가에 가까이 댄다.
하악…… 하으응……! 좋아하앗……!
이미 비명에 가깝게 헐떡이는 목소리는, 그가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어서 귀를 문에 댄다. 심장이 치달리기 시작하고 머리가 달아오른다.
죽는 소리를 내며 신음하고, 틈마다 애교 부리며 요구하는 지윤의 목소리가 너무 낯설다.
자신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녹아내릴 것 같은 신음이었다.
영진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다. 귀만은 여전히 문에 붙어서 내부의 소리들을 수신한다.
듣는 누구나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여자는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자신은 본 적도 없는 지윤의 흐트러진 모습을, 음탕하게 단 모습을 누군가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일까. 이내 삽입이 일정해지는지 리듬을 따라 지윤의 소리도 높게 반복한다.
하앙! 핫! 하앙! 하읏……! 하아앙……!
철썩거리는 살소리가 그의 머리를 쳐낸다.
영진이 일어나 뒤돌았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고통스럽다.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뇌가 기능을 정지하고 일제히 셧다운한다.
온통 공백이다.
엘리베이터가 열린다.
타고 있던 이들은 영진을 흘끗 보고는 다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거나, 거울을 보거나 한다. 영진은 그 무리의 하나가 되어 서서는, 멍하니 엘리베이터가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작동하고, 몸이 하강하는 그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추락하고 있다. 끝 모를 아래로 아래로 수렴하며 까마득한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눈꺼풀 위로 선연하다.
일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무리의 하나가 되어 걸어나갔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그의 심상은 아직도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 그의 엘리베이터는 멈출 줄을 모른다. 바닥이 없다. 그러므로, 몰락은 끝이 없을 것이다.
오피스텔을 나왔다.
집으로 가야하는데.
차에 시동을 걸며 생각한다. 집으로 가야하는데…….
빨리 가야하는데…….
이내 호우는, 온 세상이 녹여내리고 있다.
젖은 도로를 미끄러지면서 영진은 가슴을 부여잡는다. 마음이 풍경이, 온 세상이 온통 흐려 분간할 수가 없다.
균열은 부분에서부터 전체로 확장한다. 댐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노도이다.
영진이 길가에 급히 차를 멈추었다. 놀란 차들이 욕을 하고 클락션을 울리지만 영진은 핸들에 이마를 대고 신음한다. 가슴이 부서져, 날카로운 조각들이 입으로 쏟아질 것 같다. 쏴아아아, 차를 때리는 빗소리가 이내 균열의 한 점을 부순다.
영진은 무작정 차에서 내렸다.
비가 머리를 대리고 어깨를 때린다. 옷이 젖어들었다. 웃음이 나올 것 같다.
눈가가 뜨겁다.
비가 내려서 다행이다.
혼자 뇌까린다.
비가 쓸어간 거리는 한산하다. 영진은 빗물을 자박거리며 멍하니 걷는다. 문 닫은 가게들의 윈도우에서 불빛이 새어나와 거리를 밝힌다. 우산 쓴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영진을 흘끗거리며 피해가고는 했다. 영진은 그들을 헤치고 하염 없이 걷는다.
문득 그는 오열하고 있었다.
속에서 자꾸만 치미는 것을 막지 못하고, 들끓는 절망을 게워낸다. 억누른 울음 소리가 빗속에 스민다. 목이 메어서 짐승처럼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아아아아
흐으아아아
빗속에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빗물과 눈물로 뒤섞여 얼굴은 온통 흐리다. 끅끅거리는 목을 쥐어짠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영진이 주저 앉아서 고개를 쳐박는다. 차가운 빗물이 이마를, 머리를 적신다, 눈물은 역류하여 빗물이 된다.
미친 사람인가봐…….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쳐박은 고개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밑바닥과 구둣발, 쏟아지는 비가 바닥에 부서져 구정물이 되는 풍경뿐이다. 사람들의 발들이 영진을 피해 지나친다.
영진은 미친 듯이 오열하다가, 고개를 쳐든다.
눈물과 비 때문에 흐려진 시야는 온통 흐붓하다. 빛들이 번져 꿈결처럼 시야를 어지럽힌다. 영진은 길 한복판에서 무너진 채 비와 눈물을 흘려내린다.
검은 하늘이 도화지 같아 좋다고 했었지.
그래야 너를 그리기 좋으니까.
너는 내 어두운 삶에 달이고 별이었으니까.
비 내리는 밤하늘을 본 적 있니.
나는 지금 보고 있는데.
하늘이 너무 흐려서 널 볼 수가 없어.
너를 제대로 보고 싶은데.
비인지 눈물인지, 온통 네가 흐려.
영진은 아이처럼 울다가, 이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빗줄기는 더 거세져서 이내 폭우다. 비의 무게가 그를 아래로 쳐내려 아래로 꺼져버릴 것 같다.
다 젖어버린 주머니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영진은 하늘에서 눈 떼지 않은 채 휴대폰을 열어 귀에 댔다. 휴대폰이 비를 맞으며 희미한 소리를 전한다.
여보세요?
네.
안영진 씨 폰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농협중앙회입니다. 우선 축하 드려요. 이번에 로또 1등에 당첨되셨어요. 그래서…….
무어라 하는지 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떠드는 소리를 더 듣지 못하고 휴대폰을 떨어뜨린다. 비에 젖은 휴대폰은 이내 더 작동하지 않고 화면이 깜빡이다가 검게 가라앉는다. 영진이 픽 웃는다.
다 돈 때문이야. 임마. 돈 때문이야.
재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아니.
그런 게 아냐, 형.
영진이 낮게 실소한다. 웃음은 꼬리를 붙잡고 새어나왔다.
낮은 웃음은 이내 크게 번져들어, 미친 사람처럼 폭소한다. 어깨를 떨며 한참 웃어대던 영진이 다시 허물어지며 바닥에 이마를 쳐박았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고통스러운 웃음은 그치지 않는다.
오열과 웃음이 뒤섞여서 영진은 미친 듯이 발작한다. 이마는 땅에 부닥쳐 이미 피가 흐른다. 힉힉, 히히히힛, 하고 웃다가도 꺽꺽거리며 울음이 비집고 나왔다. 영진이 바닥에 웅크려 하염 없이 비를 맞으며 웃음 같은 울음을 토해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비가 내리지 않았다.
비가 그쳤구나.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세상은 빗줄기에 휘말려 있다. 영진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비 닿지 않는 곳에 앉아 영진은 온통 흐린 세상을 바라본다. 빗소리가 자욱하게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비에 젖는다. 지윤이 비 사이로 사라진다.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비에 젖는다. 그의 누나가 비 사이로 스러진다. 그의 꿈들이, 세상이 비에 젖어 하나하나 스러지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영진이 고개를 돌린다.
우산을 든 민주가 가만히 영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슬픈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고요한 표정이었다. 영진의 곁에 선 민주는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것처럼, 우산을 기울이고 있다. 우산 아래에 선 민주의 하얀 얼굴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그녀만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영진은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민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진 또한 아무 말도 않는다.
문득, 거리의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선율은 빗소리를 지우고 그들에게 다가온다.
이 꿈이
멀어져버린 순간에 난
깨닫고 널 생각해
어쩌면
난 너의 힘겨움을 함께
짊어지고 갈 수 있어
영진은 움직일 수가 없다. 민주는 고요히 우산을 든 채로, 손을 뻗어 영진의 눈가를 손끝으로 쓸었다. 멎은 줄 알았던 눈물은 다시 차올라 뺨을 타고 흐른다. 민주는 계속해서 그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이내 흐르는 눈물길 위에 손끝을 얹고 영진을 가만히 바라본다.
눈물로 온통 시야가 흐린데, 눈앞에 선 민주의 얼굴만은 선연하다.
비는 하염없이 쏟아지고.
둘은 눈동자를 통해 서로를 들여다본다.
노래는 빗줄기를 타고 떨어져 내린다.
이미 나에게로 하여 집착하게 만든 넌
방황에 지쳐 쓰러져버린 내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
생각하며 날 찾을 수 있니
이미 나에게로 하여 집착하게 만든 넌
실패에 주저앉은 처참한 날 본 후
다시 용기 얻는 모습
생각하며 날 사랑해줄 수 있겠니……,
<22. 해피 엔드 트리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