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95화 (9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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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해피 엔드 트리거

영진이 휴대폰을 떨군다.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 소리가 조용한 교실에 울려퍼진다. 학생들 몇이 고개를 들어 영진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깨닫지 못하고 창밖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샘 여친이랑 잘 안되는 거 아냐? 하고 속삭이며 여학생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울렸지만 영진은 자기 생각에 골몰하여 듣지 못한다.

지윤과 눈에 띄게 소원해졌다.

카톡을 날리고 메세지를 보내도 시큰둥한 단답이거나, 애매한 회피뿐이다. 만나자고 할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기는지 바빠서 힘들다고 한다. 예전의 그였다면 이런 머뭇거리지 않고 찾아가 두 눈을 마주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과감했기에 불우한 가정사를 이겨내고 교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다.

그 날, 지윤의 집에서 자고 나왔던 그 날 지윤의 눈빛을 기억한다.

흔들리고 있었다. 나가는 영진을 배웅하며 웃는데, 어쩐지 슬픈 빛을 띄었다. 안녕이라고 말할 때 영진은 그것이 마치 이별을 고하는 것마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문이 닫혔을 때, 영진은 다시 오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영진은 망설인다.

정말로 끝일까봐.

무슨 변덕일까 영진은 고민해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 날 아침 전까지 둘은 전에 없이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 사이에 부모가 이 사이는 절대 안된다고 전화라도 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생겨 자신을 떠나보내기 전 마지막 배려였을까.

너무 넘겨짚지 말자.

수업 마치는 종이 울렸다.

"수고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한다. 이상."

그리고 곧바로 교실을 나왔다.

그날 이후 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휴대폰을 확인한다. 연락은 없다. 영진은 그녀의 전화로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너무 고민하지 말자. 어디에나 굴곡은 있다.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영진이 깊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가슴의 불안을 다 쏟아내려는 듯 천천히 뱉는다.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다가, 영진은 인사하는 학생 중에 유난히 깊히 목례하는 여학생을 발견한다. 영진이 멈추었다.

그녀였다. 남몰래 영진에게 찾아와 아이 생긴 일을 상담했던 여자애다. 남자친구와 함께 부둥켜 울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이후로 잘 지내는지 얼굴빛은 나쁘지 않다. 영진이 웃으면서 말했다.

"요즘 어떠니?"

"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여학생이 웃는다. 밝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현철이는 요새 안보이네. 잘 있니?"

"아……."

그녀의 남자친구를 언급하자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그게……."

"무슨 일이라도 있어?"

"저희 헤어졌어요."

영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한 의미를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할 시기를 놓친다.

둘이 그렇게 좋아 못살고 아이까지 만들었다가 낙태했는데, 서로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울던 이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라 영진은 침묵했다.

절대 헤어질 것 같지 않았는데, 헤어지는구나.

영진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침묵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간신히 입을 연다.

"그렇구나…… 너희들이 잘 생각했겠지."

"네……."

여학생이 애써 웃는다.

"어쨌건 선생님 감사했고 전 가보겠습니다."

"그래."

영진은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했다.

지윤에게도, 저 아이에게도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한다.

영진이 쓰게 웃었다.

순간, 휴대폰이 진동한다.

영진은 그 기다리던 소식임에도 차마 손을 뻗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다. 이 시각에 연락할 사람이라고는 지윤 뿐이다. 그래서 더 머뭇거린다.

혹시 열면 아픈 글만 담겨 있을까봐.

영진은 천천히 휴대폰을 빼어들었다. 메세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천천히 주머니에 다시 넣는다.

멍하니 창밖의 먼 산들을 바라본다. 도시의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산은 간신히 고개를 쳐들고 있다. 영진이 걸음을 옮긴다.

"선생님?"

어느새 민주가 와 있었다. 영진이 웃는다.

"왜?"

"저 다 썼어요."

그녀가 공책을 내밀었다.

보통은 컴퓨터 파일을 보내는데, 그녀는 이렇게 아날로그를 선호했다. 직접 손글씨로 써내려간 글을 읽고 있으면 그녀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글은 더 슬프거나 아름다워진다. 영진이 노트를 받았다.

"나중에 감상 들려줄게. 제목이 뭐니?"

"제목은 아직 못지었어요."

"지으면 말해줘. 그때 읽을게. 제목 없는 글은 쓸쓸하잖아."

"고맙습니다."

민주가 눈치를 보다가 툭 던진다.

"그런데 헤어지셨어요?"

"응?"

"표정이 실연당한 얼굴인데……."

영진의 어색한 웃음에 민주가 입을 다문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어쨌건 고삼은 공부하러 갑니다. 수고하세요."

"그래."

영진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아까 채 마주하지 못한 메세지를 지금 제대로 응시한다.

영진 씨, 당분간 우리 관계 조금 더 생각해보자.

휴대폰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가라앉히고 주머니에 넣는다. 관계를 생각해보자니, 영진은 헛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무슨 생각일까.

*

혀가 얽힌다.

지윤이 서둘러 타액을 삼킨다. 눈앞에 자리한 수현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를 흥분시킨다. 언뜻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저 눈가는 지윤을 원할 때면 파르르 떨리며 욕망을 드러낸다.

"하아……."

"신성한 학교에서 제자에게 무슨 짓이에요?"

"……너."

지윤이 흘겨본다. 수현이 웃었다.

지윤은 결국 수현에게 굴복했다. 먼저 다가가, 안아달라고 속삭였다.

수현과 관계했던 경험은 그녀에게 마약 같은 것이었다. 한 번도 상상한 적도 없고, 느낀 적도 없었던 쾌락이었다. 약물에 육신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차츰 몸뚱이가 수현에게 좀먹혀 드는 것은 그녀의 재량 밖이었다. 그녀는 금단증세에 못이겨 마약을 구하는 중독자처럼 수현을 찾았다.

그리고 그날 수현은 지윤을 끌고 가 학교 화장실에서 그녀를 범했다.

점심시간, 동아리실만 몇 개 남은 구 교사의 화장실에서의 짧은 밀회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지윤은 영진이 밤새 헐떡여도 주지 못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지윤은 화장실 벽에 기대어 서서 바지를 내렸고, 수현은 뒤에서 그녀를 찔렀다. 학교에서 제자에게 범해진다는 부도덕함은 그녀를 제어하지 못한다. 쾌감은 자꾸만 한계를 허물고 그녀의 몸과 마음을 잠식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거듭할수록, 수현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게 몸정이라는 것인지. 고작 몸의 감각 때문에 추락한 자신이 저열해 소스라치면서도, 육체관계로 흐트러져 매달리는 자신의 모습에서 피학적인 쾌감을 느꼈다. 그녀의 집으로 수현이 예고 없이 찾아와 멋대로 그녀를 안았을 때, 작살이 꿰인 듯 수현에게 삽입 당해 저항도 못하고 흐느끼는 상황에서 홀로 절정해 소변까지 지린 그녀였다.

스스로가 이렇게 음탕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상황 또한, 진로상담이라며 반학생 모두의 앞에서 수현에게 점심 먹고 상담실로 오라고 헸고, 이렇게 짧은 시간을 밀회하는 것이다.

"남자친구는 어떻게 했어요?"

뒤에서 수현이 껴안으며 속삭인다.

"그러는 너는 여자친구 어쨌니?"

"어쩌긴요. 소희랑은 잘 사귀고 있죠. 너무 사이가 좋아서 탈인데."

"……."

"그래서 남자친구분은요?"

"당분간 좀 생각해보자고 했어."

"언제요?"

"일주일 전쯤에……."

"이제 헤어져요."

지윤이 고개를 숙인다.

수현에게 굴복했던 날 지윤은 영진과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에게 미안해서라도 관계는 지속할 수 없다. 이런 여자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길 기원해야지.

차마 곧바로 잘라낼 수는 없었다. 근래의 둘은,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관계였다. 영진이 결혼을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윤 또한 그런 흐름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현으로 인해 모든 것이 변했다.

"아직은…… 곧 말할 거야."

"지윤이 마음이 약하구나?"

수현이 지윤의 귓바퀴에 키스하며 웃는다.

수현이 이렇게 기어오를 때면 지윤은 다시 한 번 짜릿한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그 예지윤이 한참 어린 제자의 손에 떨어졌다는 게 실감나면서 묘한 흥분이 오른다.

어쩌다 관계를 맺은 타락한 여교사가 아니라, 이렇게 동일한 위치의 연인인 것처럼 대해줄 때면, 첫사랑이라도 시작한 것처럼 두근거린다.

지윤이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애써 말했다.

"회초리를 어디 뒀더라. 지금 딱 필요한데."

"지금 필요한 건 이거잖아."

엉덩이에 남근이 닿아온다. 지윤이 숨을 삼켰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무장해제된다.

예지윤, 모두가 동경하는 여교사는 지금 이 소년의 손에 떨어졌다. 그것을 자각하면서 지윤은 천천히 몸을 돌린다.

수현과 몸을, 얼굴을 마주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 아름다운 얼굴에 자신은 매혹된 것이다.

"내 이름 또 불러줘."

"지윤아. 예지윤."

지윤이 수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열렬히 키스했다.

수현도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호응했다. 둘의 설육이 뒤엉키다가, 문득 탁자 위의 지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수현이 휴대폰을 들어 지윤과 함께 확인한다.

이야기 좀 하자는 영진의 메세지였다. 지윤과 수현의 눈이 마주친다. 수현이 씨익 웃었다. 지윤이 고개를 젓는다.

"지금 보내."

"하지만……."

"지금 안보내면 나 그냥 나갈 거야."

지윤이 입술을 깨문다. 수현이 그녀에게서 휴대폰을 빼앗아, 그녀 대신 문자를 타이핑했다.

우리 이제 끝내자. 미안해.

그리고는 다시 지윤에게 건낸다. 지윤이 울 것 같은 눈으로 수현을 바라본다. 수현이 그녀의 뒤로 돌아가 허리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마치면 같이 집으로 가. 내일까지 같이 있자."

"……응."

그 제안에 벌써부터 지윤의 육체가 떨려온다. 수현이 미소지었다.

"지윤아. 그 사람보다 내가 좋으면 그거 보내고, 나보다 그 사람이 더 좋으면 내가 빠질게. 그렇게 생각하면 쉽잖아."

누가 더 좋아, 하고 묻는 수현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맺혀 있다.

지윤은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가상 키보드를 두드려 메세지를 수정한다.

자신이 만든 문장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전송 버튼을 꾹, 누른다. 카톡 대화창에 그녀의 메세지가 표시된다.

[우리 이제 끝내자. 정말 미안해.  1] 1:03pm

수현이 잘했다는 듯 지윤의 뒷덜미에 키스한다. 지윤이 홀가분한 얼굴로, 뒤돌아 수현을 열렬히 껴안았다. 둘의 입술이 부딪친다. 휴대폰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우리 이제 끝내자. 정말 미안해. ] 1:03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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