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90화 (90/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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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미 나에게로

지윤이 수현의 오피스텔을 올려다본다.

땅값 비싼 운무시에서도 가장 호화스러운 곳이다. 그녀도 이곳을 알아봤었지만 가격이 부담스러워 포기했었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도 차들도 온통 외제에, 입구에 선 경비도 헌병 마냥 흔들림이 없다.

지윤이 이런 곳에 기 눌릴 사람은 아니다. 그녀의 본가도 이에 못지 않다. 다만 고등학생에게 이런 오피스텔을 선뜻 사준 그의 부모에 대해 궁금해졌다.

생활기록부에도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그저 사업 때문에 해외에 거주한다고만 되어 있다. 이따금 입국하여 수현을 만나지만 그조차도 일 년에 몇 번, 어릴 때부터 부모와는 정 붙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녀의 곁을 지나쳐 걷던 여자가 흘끗 뒤돌아 지윤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 짧은 스캔은 여자들끼리 익숙한 것이다. 특히나 지윤은 익숙하다. 그 여자는 비싸보이는 핸드백을 어깨에 다시 걸치며 오피스텔을 향해 걷는다. 왜인지 지윤을 의식하는 듯한 워킹을 바라보면서 지윤은 픽 웃고 만다.

지윤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오피스텔 입구에 걸어갔다.

수현의 오피스텔 번호를 눌렀다. 깨알같이 로얄층이다. 기준은 모르겠지만 예전 이곳 오피스텔을 부동산에 물었을 때 로얄층이라며 부산 떨었던 기억이 난다. 지윤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신호가 울리며 입구가 열리고 지윤이 들어선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 여자와 다시 만났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입구에 선 지윤을 흘끗 쳐다보고는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거 같은데. 새로 오셨어요?"

"아뇨. 여기 안살아요. 잠깐 들렸어요."

"아하. 그러시구나."

지윤이 시선을 올렸다. 엘리베이터는 자꾸만 중간에서 걸린다. 여자가 이어 말했다.

"여기 분 아니셔서 하는 말인데 여기 비싸긴 한데 비싼 값은 못하는 거 같아요."

"아. 네."

"친구 만나러 오셨어요? 혹시 남친?"

"아니에요. 그냥 일이 있어서."

"아하. 네. 그렇구나. 알겠다."

여자가 픽 웃는다. 지윤은 황당한 눈으로 그 여자를 흘끗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얼굴로 엘리베이터 층수를 세고 있다.

지윤은 그녀가 뜻하는 바를 알 것도 같고, 사실 알겠는데 짜증나서 그냥 잊기로 한다.

거지같이 생긴 게…….

하고 생각했다가, 머리를 휘휘 젓는다. 이런 생각은 말자, 예지윤.

얼굴은 그냥 타고난 거지. 내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닌데. 내세울 게 그것뿐이면 정말 저 여자가 비웃는 그런 수준의 여자가 되는 거다. 지윤이 숨을 내쉬었다. 가라앉힌다. 그녀는 그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다. 수현과 이야기해야 한다.

사실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수현과의 키스가 싫었냐고. 노. 지윤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 관계가 지속가능하냐고. 아마도, 노. 하다못해 수현이 삼학년이라도 되었으면 그녀는 눈 딱 감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현은 고작 일학년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남자친구가 싫냐고 물으면, 그것도 노. 영진은 좋은 사람이다. 최소한 그녀가 만나온 남자들 중에서는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수현의 층에서 내린다. 공교롭게도 여자도 같은 층이었다. 지윤은 흘낏거리는 그녀에게서 신경을 끄고 수현의 집 번호를 찾아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수현이 서 있었다.

*

수현은 반바지에 후드티 차림이었다.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흰 얼굴이 도드라진다. 좀 귀엽다.

"가정방문이라니 어쩐 일이세요."

지윤은 수현의 집을 둘러본다.

생활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집이다.

그야 수현이 여기서 안살기 때문이지만, 지윤에게는 그것이 수현의 마음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홀로 사는 수현이 안쓰럽고 안타깝다. 괜히 집을 둘러본다. 의외로 정돈은 잘 되어 있다. 물건은 별로 없는데, 가끔씩 뜬금 없이 고가의 물건들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일단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다.

"커피 좋아하니?"

"아뇨. 부모님이 사주신 거에요."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티비 곁에는 최신 게임기와 팩들이 자리하고 있고, 거치대에 올려둔 자전거는 그녀가 알기로 왠만한 바이크 값인 물건이다. 그러고보면 신발장에는 신지도 않는 듯한 유명 브랜드의 신발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게임이랑 자전거 좋아해?"

"별로요."

수현이 냉장고를 열며 지윤에게 콜라와 쥬스를 물었다. 지윤은 콜라를 택한다.

콜라 든 유리잔을 들고 수현이 쇼파를 향해 걸어왔다. 반바지 아래로 소년의 날씬한 다리가 움직인다. 말랐지만 근육으로 모양새가 잡혀 있었다. 수현의 맨 살갗에 지윤은 잠깐 눈길을 빼앗긴다.

지윤과 수현이 쇼파에 앉는다.

"부모님이 보내신 거에요. 그냥 자전거 있으면 좋겠다, 하면 며칠 후에 저런 비싼 게 날아오죠. 별로 쓸모도 없이. 저것도, 전에 시험기간이라 커피를 자주 마신다고 했더니 주문한 거에요. 그런 식이죠."

지윤이 콜라를 양손으로 든다.

"곁에 없으니까, 돈으로라도 보상하려는 거에요. 보고 싶다는 말보다는 뭐가 갖고 싶다, 돈 좀 달라는 말을 더 좋아하세요. 해줄 수 있는 거고 해주는 기분도 나니까. 그래서 저도 별 말 안해요. 돈 필요 없어도 때 되면 굳이 뭐 사달라, 용돈 좀 보내달라고 해요. 마음 편하시라고."

수현이 미소짓는다.

"전 진짜 괜찮은데. 아들 노릇도 힘드네요."

지윤은 할말이 없어서 그냥 콜라를 마신다. 옳지도 그르지도 않고 그냥 수현의 가정사였다. 엇나가는 일이 없으니 해줄 말은 그냥.

"수현이 기특하네."

수현도 그저 생긋 웃는다.

지윤이 마시던 콜라 든 유리컵을 수현이 받아들어 꼴깍거린다.

지윤은 순간 아무렇지도 않았다가, 새삼 깨닫는다.

제자랑 아무렇지도 않아선 안되는 것들이, 아무렇지 않아지고 있었다.

"이수현. 내가 여기 온 건……."

"저도 알죠."

수현이 말끄러미 지윤을 본다.

이 녀석의 이런 무구한 표정은 반칙이다. 지윤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뻗어 수현의 뺨을 툭툭, 건드린다.

"그럼 뭐가 최선인지도 알고 있겠네?"

수현이 지윤의 손목을 잡는다.

지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수현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 상체를 열면서 앞으로 다가간다. 지윤은 자신을 향해 가까워지는 수현의 얼굴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 그 입술이 속삭였다.

"모르겠어요."

이제 둘은 가까워 입술이 움직이는 그 미묘한 기척이 피부를 간지른다.

"……모르겠어요."

수현의 손은 이미 그녀의 허리를 안아 당기고 있다. 쇼파 위에서 둘의 허벅지가 닿는다. 수현이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안으로 파고들어, 지윤이 허벅지가 수현의 다리 위에 얽힌다. 입술은 닿지 않았으나, 코는, 이마는 이내 접촉한다.

"가르쳐주세요."

수현이 지윤에게 코를 기대며 웃는다.

지윤은 다가오는 수현의 향기에 몽롱하다. 아, 턱을 돌려야 하는데. 그런 생각도 그저, 희미해진다.

젖었어.

아랫배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인식하면서, 지윤은 입술에 느껴지는 감촉에 눈을 감았다.

*

영진이 술을 따랐다.

"형, 형은 프로포즈 어떻게 했어?"

"짜식. 너도 그런 걸 다 묻고. 사귄지 얼마나 됐냐?"

"사백십오일."

"외우고 다녀? 이 자식 장난 아니네."

둘이 동시에 잔을 부딪치고 소주를 들이킨다. 쓴 것이 식도를 타고 짜르르 몸을 울린다. 영진은 그 들끓는 쓴맛을 가라앉히려 안주를 집어 먹었다. 영진이 예전 대학교 동아리에서부터 알게 된 선배, 재균은 안주도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반지 줬지. 주면서."

"주면서?"

"평생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어."

"에이, 그냥 평범하네?"

"와이프 부모님 무덤 앞에서 무릎 꿇고."

"……."

"비석에 엎드리고 이 사람 꼭 행복하게 만들테니 믿어달라고 하니까 와이프가 울면서 안아줬지."

영진이 재균에게 잔을 다시 한 잔 따랐다. 영진이 제 잔에 스스로 따르려다가 재균의 손짓에 소주병을 넘긴다. 재균이 영진에게 딱 넘치지 않을만큼 술을 채운다.

"형 애정이 과하시네."

"너 결혼하고 나면 떡 되게 마시지도 못할 텐데 오늘 한 번 죽여야지."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닌데 뭘. 나 혼자 생각하는 거지."

"이름이 지윤 씨랬나?"

영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균이 큭큭거렸다.

"새끼, 빨리 프로포즈 해."

"섣부른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해. 너 표정 보니까 딱 나오네."

재균이 잔을 들고서는 영진의 탁자 앞에 놓인 잔으로 혼자 탁, 친다. 그제야 영진이 잔을 들었다.

"이름 나오는 순간 씩 웃는 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구만."

"뭐……."

영진이 웃는다.

"그래서 프로포즈하면, 오케이할 것 같냐?"

"글세……."

"그러고보니, 부모님은 만나봤고?"

"아니……."

"흠…… 나야 뭐 처가 어른들 안계셔서 서로 좋아 결혼했지만 그게 순서 아니겠냐."

영진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지윤의 부모님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할지 확신할 수가 없다. 가진 것 없이 안정적인 교사라는 직업, 그 하나뿐인 자신이다. 오히려 가정사는 불우하다.

"임마, 어깨 펴! 이제 차근차근 진행하면 될 거 아냐. 부모님 만나 봬."

재균이 술잔으로 탁자를 탕탕 친다. 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런데 형은 왜 여태 아기 소식 없어? 뭐하는 거야 대체 실망스럽게?"

"야, 이놈이."

둘이 웃으면서 다시 잔을 부딪친다. 의식이 둔해져가는 가운데, 부딪치는 잔 너머로 휘황한 조명이 유달리 선명하다.

슬슬 재균이 혀 꼬인 소리를 내고, 영진도 이따금 정신을 붙잡으려 머리를 흔든다. 빈 병이 늘어가고, 안주는 몇 번 다시 주문을 했고 술잔은 다시금 비었다. 몸과 정신이 잘 이어지지 않아 머리만 부유하는 기분이다. 현실감이 사라진다. 앞에서 무어라 이야기하는 재균의 목소리는 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함께 웃는다.

문득 지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영진이 휴대폰을 든다. 늦은 시간은 아니다. 내일은 휴일이니, 지윤도 깨 있을 것이다. 영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휴대폰에서 찾는다.

그래 임마. 전화 해봐. 나도 제수씨 목소리 좀 듣자!

재균의 목소리가 멀다. 영진이 웃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지윤은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 이미 나에게로를 컬러링으로 설정했었다.

처음 그녀에게 전화했을 때 들렸던 노래, 그 설레던 마음을 잊지 못한다.

그녀는 아직 받지 않는다.

연결음이 계속된다.

지윤의 목소리를 기다리면서, 무미건조한 연결음 속에 영진은 그 예전의 선율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영진은 혼자 흥얼거렸다.

이미 나에게로 하여 집착하게 만든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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