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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미 나에게로
영진이 곁에서 잠든 지윤을 내려다본다.
그녀가 영진을 불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는지. 지윤은 그저 외로운 얼굴이었고, 둘은 늘 하던 대로 몸을 겹치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서로를 껴안은 채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아직 채 밤이 스러지지 않은 새벽에 영진은 홀로 눈을 떴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그녀가 곁에서 무방비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 잠든 신의 얼굴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영진은 손끝으로 지윤의 콧날을 쓸어내린다. 그녀의 일정한 숨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선다.
지윤의 아파트 아래로 펼쳐진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해가 떠오르도록 불을 꺼뜨리지 않는 수많은 빛무리가 반짝였다. 이곳에서 풍광은 저 멀리까지 보인다. 그의 좁은 원룸에서는 볼 수 없을 도시의 부감도가 영진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는 창을 살짝 열었다. 바깥의 싸늘한 공기의 그의 정신을 깨운다.
해가 떠오르기까지 남은 시간들은 영진을 들뜨게 한다.
그 시간이 아름다운 것은 저기, 잠든 지윤 때문이다.
그녀가 곁에 있으므로, 영진은 그것만으로도 들뜬다. 그녀를 안았다. 둘은 서로 지쳐 허덕일 때까지 얽히고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의 안에 사정하고, 그것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사정하고, 그녀에게 키스했다. 둘은 서로를 갈구하다 지쳐 하나된 채로 잠들었다.
하지만 그 섹스보다도 좋은 것은, 사랑을 확인한 후에 찾아오는 이 안온한 밤이다. 그녀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어느 때보다도 명확한 시간에, 밤은 고요하여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해 뜨면 눈 뜰 그녀를 기다리며 그 모습을 오래도록, 홀로 바라보며 잠든 그녀에게 취한다.
창을 다시 닫고, 침대에 걸터 앉아 지윤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그녀의 숨소리를 좋아하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사랑한다. 아름다운 얼굴을, 군더더기라고는 없이 잘 짜인 날씬한 알몸을, 그녀의 수줍은 비처를 경애한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지윤을 처음 만난 것은 교사들의 모임에서였다. 다른 여교사들의 시샘 어린 뒷얘기들을 곧잘 듣고는 해서, 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었다. 그곳에서 지윤은 단연 눈에 띄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는 그러한 소문이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는 사람이다. 그런 것들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기준대로 세상을 보고, 행동했다. 그 자신감이 부러웠다.
대화에는 능숙하지만 결코 속은 비치지 않는다. 영진은 어느 순간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짓 하나, 미소 짓는 얼굴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대로 접점 없이 멀어진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윤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그 또한 그녀를 따라갔다. 일생일대의 결단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과 이어지게 되리라 상상도 못했던, 그저 마음을 따랐던 그 날.
그녀는 횟집 벽에 기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난 너무 힘들어서 그런 이유로 만나기 미안해
둘이 할 때는 너만을 생각하려 했는데 문득 어떤 고민에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가락이었으나 곡명은 기억나지 않았다. 영진이 곁에 다가오자, 지윤은 미소지은 얼굴로 눈인사를 하면서도 노래를 계속 흥얼거렸다.
고심하며 떠올린 수많은 인사들, 첫마디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벽에 기대어 흥얼거리는 그녀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영진의 머리에 박혔다.
그래서 영진은 그냥 그녀의 곁에 주저 앉아서,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날 사랑해줄 수 있겠니
노래가 끝나고, 지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영진이 물었다.
"왜 밖에 계셨어요?"
"지루해서요. 그쪽은 왜 거기 앉아 계세요?"
영진이 고개를 들자, 지윤은 영진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영진도 마주 웃었다.
"지윤 씨 노래가 저 사람들 떠드는 것보다 훨씬 듣기 좋아서요."
"제 이름 기억하시네요?"
"아, 네…… 뭐."
"죄송해요. 전 잊었는데. 그러니까 이름이……."
그녀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 뺨을 긁으며 웃는다.
김춘수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꽃이 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는 무엇이 될까. 그녀의 입에서 나올 자신의 이름은 어떤 느낌과 발음으로,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어줄까. 영진은 잠시 말할 수가 없어서, 그저 그녀를 올려다본다. 영진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한다. 영진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똑똑히 듣도록 힘주어 말한다.
"안, 영진입니다."
잊지 않도록. 선명한 목소리로.
아, 하고 알겠다는 듯 그녀가 눈을 휘며 웃는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지윤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영진 씨.
하고, 그녀가 말한 그것.
그 울림.
그게 정말 나의 이름이었나.
영진은 가끔 혼자 되묻는다.
정말로 나의 이름이었을까.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로 빚어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때 들은 그 아름다운 소리가, 정말 나였을까.
우리는 실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영진은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로 인해,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실현되었다.
영진이 미소지으며, 잠든 지윤의 입술을 매만진다. 이 입술 안에는, 그 아름다운 소리가 아직 몸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문득, 지윤이 몸을 뒤척이다가 속삭였다.
으응…… 수현아…….
영진은 웃고 말았다.
꿈 속에서도 수업이라도 하고 있을까.
그 제자의 이름일까.
…….
영진은 순간 우두망찰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소리, 그 울림이다. 그것은 아름다워서, 어떤 글자였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혹, 그것은 사실 자신의 이름이었는지.
시계를 보자, 아직도 긴 시간이 남아 있었다. 영진은 행복해졌다.
*
지윤이 고개를 들었다. 교실의 구석에, 턱을 괴고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샤프를 끄적거리는 수현이 있다. 지윤의 표정도 묘해진다.
지윤이 교실을 걸어다니며 학생들이 문제 푸는 모양새를 훑는다.
모의고사다.
일학년이라고 피할 수 없는 고교생들의 행사다.
예전 아이들의 성적을 떠올린다. 전교 상위권에서 노는 녀석들 몇에, 전교 바닥권 노는 녀석들 몇이 있었다. 그리고, 저곳에서 뭔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가필도 않고 오엠알지를 컴퓨터용 펜으로 쓱쓱 긋는 저 이수현은 상위권과 중위권 사이, 말하자면 상위권이라고 볼 수도 있는 성적이었다.
문득 수현과 시선이 마주친다. 지윤이 짐짓, 고개 돌리지 말라고 눈으로 주의를 준다. 수현은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린다.
지금 뭔가 불만 있다고 시위하는 건가.
지윤의 입술도 비죽거린다.
무슨 생리하냐?
지윤이 수현의 자리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수현은 문제를 훑고는 곧바로 마킹하고, 문제를 훑고는 다시 마킹하고 있다. 언어 영역이라 시험지에 식이라도 적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시험지에 표시도 않고, 적색 펜도 없이 곧바로 컴퓨터용 펜을 그어대는 건 진지하지 않은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윤이 뒤에서 수현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시험 장난치는 거 아냐.
입모양으로 속삭인다. 수현도 똑같이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장난치는 거 아닌데요.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토라진 계집애처럼 구니 지윤은 머리가 아파온다.
나는 또 왜 이 녀석을 이렇게 신경쓰고 있는 거야. 지윤이 한숨을 내쉰다. 키스하는 사이이니 어쩔 수는 없지만…… 아니, 언제부터 키스하는 사이가 된 건데.
시험이 끝나고, 오엠알지를 걷었다.
모인 오엠알지를 확인하면서 흘끗, 수현의 자리를 본다. 수현은 곧바로 일어나 교실을 나선다. 눈을 돌리니, 소희는 주변 친구들과 답 맞춰보느라 정신이 없다. 지윤이 오엠알지를 탁탁, 정리하고는 수고했어, 한 마디하고 교실을 나왔다.
지윤이 뒷모습을 보이고 걷는 수현을 건드렸다.
"이수현. 잠깐 따라와."
"……."
지윤이 빈 상담실로 들어갔다.
수현이 뒤에서 문 닫는 소리가 들린다. 지윤이 말했다.
"너 생리하니?"
"저 남잔데."
"그리고 오엠알 마킹은 그게 뭐야. 신중하게 해야지."
"전 안해도 성적 똑같아요."
"오늘 태도도 그렇고. 뭐 안좋은 일 있니?"
"……."
혹시 수현이 아니었더라도 자신이 이렇게 나서서 풀려고 했을까. 아닐 것이다. 지윤은 편애를 인정했다.
"선생님 걱정되잖니."
수현이 한숨을 쉬었다.
"어제 남자친구랑 잤죠?"
"뭐?"
갑작스런 말에 지윤은 입을 벌린다.
온갖 생각이 교차한다.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게 왜? 남자친구인데. 왜 내가 죄 지은 기분을 느껴야 하지?
학생과 이런 대화하는 게 정상인가?
마치 내가 바람이라도 핀 것처럼 구네?
저는 어떻고?
혼돈에 빠진 머리를 억지로 털어내며 지윤이 말했다.
"아니, 그 어떻,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니."
"선생님 남자친구랑 섹스했을 거 생각하니 그냥 기분 나쁘네요."
지윤은 그 수현이 선택한 그 노골적인 어휘는 제쳐두고,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는 넌, 소희랑은?
하지만 교사로서 그 말만은 참는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치정극 꼴이 될 것 같아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쉰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수현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지윤의 뺨을 붙잡고 자신을 향하게 했다. 둘의 얼굴이 가깝다.
숨결이 느껴진다.
늘 키스하던 그 모양새였다. 지윤은 저도 모르게 살짝 입술을 벌리고서, 낮게 숨을 내쉰다. 몸에 열이 오른다. 어느새 수현의 키스에 익숙해진 몸은 그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지윤이 살짝 움츠리며 수현을 바라본다.
수현의 입술은 지척이다.
밀어내려고 수현의 가슴에 손을 올리려는 찰나.
수현이 뒤로 물러났다.
지윤이 수현을 쳐다본다.
"다른 남자랑 키스했을 거 생각하니 못하겠네요."
그리고 수현이 뒤돌아 상담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지윤은 천천히,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무얼 해야할지 그냥 모르겠다.
분명한 건 빨리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것.
빨리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 지윤은 마음을 다잡았다. 시계로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 수현의 집으로 가정방문을 가서, 이야기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