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8 / 0180 ----------------------------------------------
20. 이미 나에게로
"선생님 괜찮으세요? 피곤해보여요."
여학생이 불쑥 묻는다.
영진은 당혹스러워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티가 났을까.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었다. 피부가 까칠하다. 어제 잠을 자지 못해 뒤척였었다. 새벽은 잠에 이르기까지 적막을 감내하시는 긴 시간이었다. 학생이 눈치챌 정도로 오늘 내가 형편 없었나, 하고 자책하며 영진이 쓴웃음을 짓는다.
"어제 잠을 못잤네. 티 나니?"
"김민주 대박. 난 전혀 몰랐는데. 선생님 수업 평소보다 정열적이셨는데? 정열맨인 줄."
"선생님 잠 왜 못주무셨어요? 여친이랑 싸우셨어요?"
늘 영진을 따라다니는 여학생 그룹이 웃으며 재잘댄다. 영진은 그 속에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제자, 김민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다들 끙끙 앓는 고삼인데도 구김 없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기 좋다.
"별 일 아니니까 신경 꺼. 여하튼 걱정해줘서 고맙다."
민주가 배시시 웃었다. 영진은 다시 웃음을 짜내어 올리고는, 그녀들을 뒤로 하고 교무실로 걸었다.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아, 펜을 들고 종이 위에서 빙글빙글 돌린다.
무엇인가를 써내려야 한다. 영진은 자신을 잠못들게 하는 것들을 순서대로 떠올린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이리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고민의 태반은 해결할 수 없거나, 시간이 해결하는 것들이다.
부모님과 누나, 에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의 증세는 악화되기만 했다. 어머니는 결코 아버지를 시설이 맡기려들지 않았다. 영진은 월급의 일부를 매일 전하는 것으로 문제를 이어 붙였다. 당분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 두 분 중 하나가 먼저 가시는 날 끝이 나겠지.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나는, 자신이 도울 수 없다. 돈을 주는 게 해결할 수 없다는 건 명확하다. 그녀의 추락한 삶이 안타까우나, 그녀가 감당할 몫이다. 영진은 눈을 감는다. 씁쓸한 현실은 어쩔 수 없으므로, 지금에 충실하면 된다고, 결론짓는다.
가슴을 무겁게 하던 것들을 치우자.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하고 있다.
그리고 지윤에 대해 생각한다.
가슴이 뛴다. 그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다른 고민들은 잦아들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미소가 떠오른다. 휴대폰에 저장된 그녀의 얼굴을 본다. 서로 뺨을 대고 렌즈를 향해 브이하고 있다. 지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영진이 미소지었다.
수업을 할까. 아니면, 어쩌면.
그녀도 자리에 앉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노래를 들으면서.
영진은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늘 듣던 그 노래, 질리도록 반복한 곡을 다시 재생했다. 이 음악의 전주는, 언제나 그에게 지윤을 연상케 하여 가슴 설렌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그녀는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지.
이 꿈이 멀어져버린 순간에 난 깨닫고 널 생각해.
…….
이미 나에게로 하여 집착하게 만든 넌
방황에 지쳐 쓰러져버린 내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
생각하며 날 찾을 수 있니…….
*
이미 나에게로 하여 집착하게 만든 넌 실패에 주저앉은 처참한 날 본 후
다시 용기 얻는 모습 생각하며 날 사랑해줄 수 있겠니
지윤은 엎드려서 혼자 흥얼거린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든다.
수현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지윤이 흠칫했다.
"깜짝이야."
"어, 저도 그 노래 좋아하는데."
수현의 말에 지윤이 피식 웃는다.
"너한텐 조금 옛날 노래 아닐까?"
"임창정 노래는 다 알아요."
"걸그룹 노래나 들을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전 아이돌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현재 수현은 아이돌과 비교하기도 미안한 미녀 넷과 동거하고 있고, 여자친구는 가히 아이돌급이다. 텔레비전 속 미녀들에겐 관심이 없다. 사실 임창정 노래를 아는 것도 정하의 영향이다. 그녀는 한국 가요계의 보컬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지윤이 겹친 팔에 턱을 괴고는 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일이니?"
"선생님 보고 싶어서 왔어요."
"……."
지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녀와 수현의 관계는 헝클어진 그대로다. 수현과 한 키스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윤은 어떻게 대응해야하나, 곁의 의자에 앉는 수현을 보면서 곰곰히 생각했다. 선생과 제자, 이외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지윤은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말을 골랐다.
문득 곁을 지나던 해두산이 수현의 어깨를 친다.
"너 또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불려왔냐?"
"앗,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오늘 하루는 어떠셨습니까. 식사는 드셨는지 걱정됩니다. 건강 챙기셔야죠."
"뭐야 이놈 이거. 이놈이 갑자기 왜 이러지…… 무서워서 못있겠네."
해두산이 회초리를 휘휘 저으며 도망쳤다.
지윤이 피식 웃는다.
"너 해두산 선생님 되게 좋아한다?"
"수업 좀 졸린 것만 빼면 흠잡을 데 없는 참스승이시죠."
흠, 그렇구나. 지윤은 조용히 대답하고는 수현을 빤히 바라본다.
사실은, 신기하다. 지윤은 수현을 본다. 수현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소년들보다도, 더 흠 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고칠 곳이 없어서, 신기하다. 저 조형미와 비율을 보고 있자면, 눈뗄 수 없이 매혹된다. 지윤이 후, 하고 차오르는 열기를 내쉬었다.
수현도 고개를 갸웃하며 지윤과 눈을 마주했다. 그 까만 눈동자가 가슴 한 구석을 찌르는 것만 같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너는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니.
지윤은 목구멍까지 올라와 억지로 눌러 앉히려던 그 말을, 그만 내뱉고 말았다.
"소희랑은 어떠니?"
아, 제발 지윤아. 지윤은 짐짓 피곤한 척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수현이가 그렇게 멍청한 애가 아니잖아 지윤아. 널 어떻게 생각하겠니. 지윤은 속으로 온갖 자학을 쏟아내며, 팔짱을 꼈다. 차마 수현과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한다.
수현은 여전히, 엷게 미소띤 표정 그대로다.
"잘 지내요. 사이 좋아요."
그 말에 지윤은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렇구나."
저 말에 마음 상하는 자신이 더 싫다.
지윤이 눈을 돌렸다.
점심 시간의 한산한 교무실, 대부분 나가고, 일부는 무언가를 타이핑하거나, 뒤적거린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속한 곳을 되새긴다. 나는 선생이다. 수현은, 그저 학생이다. 문제되기 전에 제대로 잘라내야 한다. 지윤이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
"선생님 얼굴도 봤으니깐, 이제 갈게요."
수현이 불쑥 말했다. 지윤은 말을 잇지 못하고 수현을 본다.
"종례 때 뵐게요. 지윤 샘."
지윤, 이라고 말할 때 목소리가 낮아서 지윤은 조금 두근거리고 만다.
"수현아. 일단……."
마음 먹었을 때 말하리라, 지윤이 말을 이으려는 참이었다.
쉿.
수현이 검지를 입가에 댔다. 쉿. 하는 그 제스쳐였다. 지윤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수현은 그대로 지윤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흰 피부 위로, 가늘게 웃는 수현의 눈이 아름다워서 지윤의 시선은 홀린 듯 그를 향한다.
쉿.
수현의 검지가 빙글 돌아, 지문 쪽을 입술에 댔다.
손끝에, 입맞춤을 올린다.
그리고 수현의 눈매가 더 가늘게 휘며, 그 손끝이 지윤을 향한다.
때는 점심이라, 높이 뜬 해가 온통 세상을 밝히고 있다. 해를 받은 수현의 얼굴은 유난히 더 희고, 입술은 붉다. 장난기 어린 눈가와 그곳에 자리한 긴 속눈썹이 선명하다.
다른 교사들의 인기척이 지척인데, 교무실의 높은 칸막이 아래에서, 지윤은 수현의 손끝이 자신을 향해 느리게, 완만하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향하는 저 새까만, 깊은 눈동자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긴 손가락의 끄트머리.
수현의 체취가 남은 그 손끝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다.
그의 냄새가 난다. 지윤은 도리질하지도, 얼굴을 비틀지도 못한 채, 그대로 수현이 손끝에 전해온 입맞춤을 받아들인다.
수현은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서 눈짓한다.
지윤은 그저 멍하니, 눈가를 떨어뜨린다.
수현의 손끝이 더 깊이 밀려들어, 입술 틈새를 살짝 비집고서는, 안쪽에 자리한 그녀의 타액을 훔친다.
낮은, 전율.
수현이 웃는다.
손끝이 돌아가는 곡선 또한, 올 때와 같이 완만하게, 천천히.
수현은 손가락을 되돌려, 자신의 뺨 위, 허공에 손가락을 올렸다. 지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수현이 남긴 자취를 되새긴다. 입술에 남은 체취가 달큰하다.
수현은 지윤에게 눈 떼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기울여 손끝에 입맞추었다.
츄.
그 자그마한, 달콤한 소리.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지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할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고개 떨군다. 뺨이 뜨겁다. 머리가 고장나버린 것 같다. 지윤은 한동안 눈을 뜨지도 못하고 젖은 숨을 내쉰다.
수현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잘 가라는, 아니 더 중요한 그 말들은 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뺨을 감싼다.
수현의 발끝이 뒤돌아 걸어나갔다. 지윤은 고개 숙인 채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면서, 뒤섞인 감정들을 추스르려 애썼다.
휴대폰이 울리며 카톡 메세지를 알린다. 지윤이 책상을 더듬어 휴대폰을 든다.
[안영진 : 밥은 먹었어?]
지윤은 다시 휴대폰을 책상에 떨구고는, 입술을 매만졌다.
이젠 눈물이 날 것만 같다.
*
이미 나에게로 하여 집착하게 만든 넌…….
수현이 흥얼거리자 정하가 고개를 돌렸다.
"주인님, 갑자기 왠 노래야?"
"그냥. 명곡이잖아요?"
수현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올가가 말했다.
"거짓말. 지금 꼬시려는 주인님네 담임이 이 노랠 좋아한대요."
"앗. 비밀이랬잖아."
정하가 흥미로운 얼굴로 쇼파로 다가왔다. 올가의 반대편에 앉아서, 수현의 목을 감싸 안았다. 수현이 웃으며 정하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주무르자, 정하가 귀엽다는 듯 수현의 이마에 키스한다.
"흐응. 이 바람둥이가 이번엔 누굴 또 자빠뜨릴려고?"
"그냥."
올가가 뒤에서 수현의 귓바퀴에 혀를 밀어넣어 귀를 핥는다. 수현이 움찔 몸을 떨었다.
"흐응…… 주인님 그 선생님 예뻐요?"
"예뻐."
"나보다?"
정하가 묻자 수현이 고개를 젓는다.
"물론 누나가 최고로 예뻐요."
"후후."
올가는 또 시작된 둘의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애정표현에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정하가 수현의 코에 자신의 코를 맞대고는, 가늘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왜 그 여자 건드리는 건지 물어봐도 돼?"
"그냥……."
수현은 뒤에서 꾸물거리는 올가를 붙잡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수현의 손짓을 알아들은 올가가 아래로 내려와 수현의 바지 지퍼를 내리기 시작한다. 아래로 느껴지는 올가의 숨결에 가볍게 몸을 떨며 수현이 말했다.
"그냥 하고 싶어서요. 선생님이 나한테 빠져서 허덕이는 걸 보고 싶어요."
정하가 수현의 몸을 더듬었다. 아래에는 올가, 위에는 정하다.
"이거. 나쁜 건가?"
아니. 정하가 수현의 눈을 마주 응시하며, 고혹적으로 웃는다.
"주인님은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수현은 정하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눈에서 미간을, 그 아래에 자리한 코를, 뺨을, 그리고 턱을 지분거리다가, 속삭인다.
"지금 하고 싶은 건 키스에요."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