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7 / 0180 ----------------------------------------------
20. 이미 나에게로
그날 이후 둘은 서먹하다.
말하자면 지윤이 예전처럼 수현을 편히 대하지 못한다.
"선생님 뭐하세요?"
이렇게 홀로 복도에서 걷고 있으면, 수현이 불쑥 나타나고는 한다.
그때와 같이 수현은 체육복을 입고 있다. 땀에 젖어 들러붙은 브이넥 티셔츠 위로 드러난 수현의 쇄골이, 조금 섹시하다고 생각해버리곤 억지로 떨친다.
지윤이 손에 든 박스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전에 봤잖니? 참고서 옮긴다."
"또요?"
"김 선생님 나한테 잘 떠넘기셔."
"제가 들어드릴게요."
"괜찮아. 이번 건 별로 안무겁……."
수현이 지윤의 손에서 박스를 빼앗아 들며 싱긋 웃는다. 지윤은 그 얼굴을 보고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괜히 발끝으로 바닥을 찬다.
그날 본 남자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얼굴 가득 주름을 만드는 그 기괴한 웃음이 꿈에도 나와 그녀를 괴롭힌다. 하지만 그 꿈은 언제나 수현의 모습으로 끝맺는다. 수현이 나타나 그녀를 붙잡고 복도를 달리기 시작하면, 모든 불안은 사라지고, 둘은 어둠 속 어딘가에 몸을 맡긴다. 수현이 그녀를 껴안고 괜찮다고 속삭이자 정말로 편안해지고, 그렇게 수현의 곁에서 잠들며 꿈은 끝나는 것이다.
그래, 저 얼굴이었다.
지윤이 부루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요새 자주 보인다?"
"학생이 학교에서 보이는데 왜요?"
"나 따라디니니?"
"자의식이 과하시네요, 선생님."
수현이 어깨를 떨며 웃는다. 지윤이 흠, 하고 앞을 본다.
"맞아요."
이어 떨어지는 수현의 말에, 지윤은 고개를 들었다. 수현은 지윤을 보지도 않은 채 참고서 박스를 들고, 허리를 곧추세운 그 모습으로 다시 말했다.
"선생님 보려고 따라다녔어요."
"……그."
지윤은 당황하여 할 말을 찾는다.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지윤이 억지로 입을 뗀다. 어색한 게 느껴져서 더 어색해진다. 아, 예지윤. 예지윤. 너 제발 좀. 집에서 이불 걷어찰 거야 분명.
지윤은 살면서 크게 당황한 적이 없다.
그녀는 예쁘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에 그녀는 우러러지는 존재였다. 그녀 정도로 아름다우면, 그걸로도 충분히 삶을 수월하게 만든다. 거기에 더해 집안도 부유하다. 그녀를 마주한 상대는 대개 움츠러들거나, 혹은 선망하며 그녀를 떠받들었다. 이런 식으로 슬쩍 호감을 드러내는 멘트는 숱하게 들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되려 여유롭게 웃으며 대응할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재치 있게 받아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자신다운 모습이고 예지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어라 말할 지 생각도 안나고, 뱅뱅 돈다.
교사로서 지난 밤의 키스에 대해서도 제대로 매듭 지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도 끊어내지 못한 채 지금, 그녀는 그저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등을 댄다.
"키스하고 싶어서요."
이은 발언에 지윤은 굳는다.
수현이 몸을 돌려 지윤을 향했다.
명백한 일탈이다. 그녀는 이 엇나간 방향을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현의 얼굴을 마주하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수현아. 난 교사고 넌……."
"이거요."
수현이 참고서 박스를 지윤에게 건내자 엉겁결에 받고 만다.
수현은 그대로, 지윤의 어깨에 손을 올려 부드럽게 벽으로 밀어붙인다.
"수현아. 수현……."
"싫으면 소리 지르세요. 아니면 제 뺨을 때리고 밀치세요. 제가 선생님을 추행했다고 하세요."
수현의 얼굴은 다가오고 있다. 흠이라고는 없는 깨끗한 피부는 지척에서 더 선명하다. 새까만 눈동자는 보는 사람을 진탕시킨다. 그의 땀에 젖은 체취가 끼쳐와 지윤은 다리가 풀릴 것 같다. 저 입술은…… 분명 달콤할 것이다.
달콤했었으니까.
"아니면, 허락하시는 거에요."
"아……."
수현의 입술이 닿는다.
그 젖은 점막이 서로 잇닿는 순간 지윤은 척추가 오싹하는 낯선 감각을 느낀다.
복도는 조용해서, 인기척이라고는 없다.
그곳에서 입술이 끈적하게 부딪치며 마찰하는 소리가 번진다.
수현과 지윤을 혀를 얽는다. 지윤은 박스를 옆으로 떨어뜨리고 만다. 책이 쏟아져 바닥에 널부러진 가운데, 수현이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지윤은 수현을 밀어내려는 듯 어깨에 손을 얼리지만, 이내 힘없이 그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수현의 혀는 집요하게, 받아내는 그녀가 난처할 정도로 그녀의 입 안을 맛보았다.
아래에서 뜨거운 게 자꾸 뒤섞이며 요동친다. 자꾸만 열이 올라와, 이윽고 가득 찬 그것은 뜨거운 물줄기가 되어 흘러내린다. 지윤이 허리를 비틀기도 전에, 마치 그날 그랬던 것처럼, 수현의 허벅지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다.
아아. 허벅지가 벌벌 떨린다. 전율이 치밀었다. 황홀한 키스였다. 지윤이 눈을 질끈 감고 감각에 몸을 맡긴다. 수현의 혀와 그녀의 혀가 서로 뒤섞이며 타액을 교환한다.
계속되는 혀와 타액의 유희.
이윽고, 영원 같은 시간 후에 수현이 그녀를 놓는다.
지윤이 가느다랗게 신음했다.
지윤은 아직도 가까이에서, 양 옆 벽에 손을 짚은 채, 두 눈이 마주하는 그 높이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수현의 얼굴을 향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너는……."
지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너는 어떻게, 언제 이렇게.
이런 남자가 되었니.
지윤은 눈가를 구기며 고개를 떨군다. 그녀의 위에서 오르내리는 수현의 숨소리가 들리고, 눈앞에 자리한 수현의 육체를 전신으로 느낀다.
"떨어뜨리셨네요."
수현이 주저앉아 참고서를 주워 들었다. 지윤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뛰는 가슴을 억지로 다잡는다.
문득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 길지는 않은 머리카락이 단정히 떨어져내리는 그 실루엣.
그 아래에서 빛나는 까만 눈동자와 자신을 말끄러미 보는 그 시선.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한 근육이 자리한 늘씬한 옷맵시. 수현이 웃는다. 드러나는 흰 이와 깨끗한 분홍색 입술이, 지윤의 심장을 쳤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게 무슨 우스운 꼴이니. 예지윤.
지윤은 수현에게서 참고서 박스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걸어나갔다. 뒷통수로 수현의 시선이 느껴진다. 지윤은 온통 이지러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걸음을 빨리 했다. 제자와 키스했다. 자신은 저항하지도 못했다. 달콤한 그 체향이 아직도 남아서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선생으로서 딱 잘라 선을 긋지도 못하고, 지금 그녀는 이렇게 도망치고 있다. 추하다. 부끄럽다. 지윤은 걸음을 빨리 했다. 모르겠다. 이게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 어떻게 매듭 지을지,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수현과 침대 위에서 키스하는 상상을 떠올리고는 소스라치며 이마를 짚는다. 창밖에서 공차는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어깨가 떨렸다. 고개를 내저으며, 박스를 든 손에 힘을 주다가 이내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쉰다.
*
"어머니, 아버지는 잘 계시죠?"
[잘 있기는. 일 없다. 그 냥반이야 이제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애처럼 히히덕거리는데 어쩌누. 다 업보려니 하고 하루하루 견디는 거지. 너는 잘 지내냐?]
"저야 잘 지내죠. 아무 문제 없어요. 적응도 다 했구요."
[네가 그래도 번듯하게 자라 선생님이라도 되서 내가 마음이 편하다. 네 누나라는 자는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연락도 없는데 네 아비는 정신을 놨으니, 속 썩는 건 나 하나뿐이지…… 내가 괜한 소리를, 우리 걱정 말고 네 길이나 잘 살피려무나. 너 행복하게 사는 게 내 죽기 전까지 유일하게 걱정하는 것이니라.]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수화기 너머로 늙은 아버지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가 무어라 핀잔을 주자 아버지는 소리를 빽빽 지르며 울기 시작한다. 영진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이내 무어라 말을 잇던 어머니는 결국 통화를 끝맺었다.
[이만 끊는다. 몸조리 잘 하구.]
"네 어머니. 다시 전화드릴게요."
통화가 끝나고, 노인의 긴 울음소리도 끊긴다. 영진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린다.
안절부절한 모습으로 손톱을 깨무는 여자가 있다.
진한 화장 때문에 본연의 모습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온통 피어싱을 하고, 옷자락 아래로는 이따금 타투가 부분부분 드러나 있다. 영진이 통화를 끝내자, 그녀가 고개 돌리며 턱을 든다.
"뭔 통화를 길게 해? 나 할망구한테 안간 거 맞잖아?"
"그동안 어머니께 연락도 안했어?"
"할망구한테 연락해봐야 뭐 떨어지는 게 있어야지."
"말 조심해."
"안그래도 조심할 게 많아서 말까지는 조심 못하겠다 야. 빨리 돈이나 내놔."
"언제까지 이럴 건데? 몇번 째야?"
"선생 나부랭이가 뭐 돈 쓸 일도 없잖아? 쓰고 갚는다고. 누가 떼먹는대?"
"갚은 적은 있고?"
"지금 내가 돈 먹고 튈까봐 이러니? 푸, 나도 난데 너도 참 속물이다. 누나한테 돈 빌려주는 게 그리 아까워?"
영진이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 앉는다.
그녀는 맞은 편 책상에 걸터 앉아서, 짧은 치마 아래로 뻗은 다리를 꼰다. 다리에는 그물처럼 성기게 얽은 스타킹을 신고 있다. 치익, 하고 불 붙이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담배 연기가 끼쳐왔다.
"대체 어디에 필요한 건데."
"알 거 없고."
"이젠 안돼."
"너, 나 정말 죽일 셈이니? 누나 길가에서 나자빠져도 신경 안쓸 거야?"
"돈 없어!"
"왜 없어! 월급 꼬박꼬박 나오잖아!"
"선생질한다고 돈이 엄청 나오는 줄 알아?"
"나오긴 한 거잖아!"
"누나한테 다 주면 어머니는? 아버지 아프시고 어머니께도……."
"나 팔려나가는 꼴 보고 싶어? 나 죽는다고! 어!? 그 새끼들이 나 찾는다고 눈에 불켜고 있단 말야!"
영진이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그녀가 화류계에 몸 담은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정정한다. 화류계는 무슨, 그냥 갈보짓하고 다녔다. 부모님께 비밀로 했을 뿐이다. 쉽게 벌어 쉽게 쓰던 그녀는 나이 들어 미모는 퇴색해가는데, 씀씀이는 줄이질 못했다. 게다가 그녀가 예전부터 약물에 손대는 것도 어렴풋이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영진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녀는 뚫린 독이었다.
영진이 얼굴을 감싼 채 한 손을 들어 문을 가리킨다.
"나가."
"하! 미친 새끼. 나가? 니가 선생이라고 뭐 되는 것 같아?"
"누나. 난 누나 도와주고 싶어. 그런데 돈 주는 건 돕는 게 아닌 것 같아. 애초에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꺼져달라고 하면 되지, 무슨 개소리를. 합리화는 관두렴. 이 거지 같은 년은 니 인생에서 꺼져줄테니까."
"누나도 이제 사람처럼 살아야지."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떨며, 아이고, 하며 깔깔 웃는다.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데 동생이 안도와주니 어쩌니. 응? 나쁜 새끼야."
그리고는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성큼성큼 방을 나선다.
문이 쾅, 닫혔다.
홀로 남은 원룸이, 지금은 너무 넓게 느껴졌다. 어딘가 누군가가 안아줬으면 좋겠다. 하다 못해 어딘가 구석에서 웅크리고 싶다. 하지만 벽과 벽은 멀어서 그가 기댈 수가 없다. 이 처참한 침묵을 무언가가 지워주었음 하는데, 흔한 자동차 경적소리조차 없다.
휴대폰을 들었다.
메세지가 둘, 와 있다.
[어머니 : 곧 네 누나 생일인데 혹시 연락 닿으면 전화 좀 달라고 해다오.]
[최윤혁 : 선생님...정희가 그냥 낳고 싶대요 도저히 못지우겠대요 어떡하죠......선생님 전화 부탁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끝이 액정 앞에 멈춘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전화번호부로 들어선다.
예.
예…….
예를 찾는다.
예, 로 시작하는 이름은 하나뿐이다.
예, 로 시작하는 그 이름 곁에서야 그는 지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다.
예, 만이 그가 유일하게 기대는 것이다.
예, 가 그에게 물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임창정의 이미 나에게로에요. 임창정 아시죠. 짝사랑하던 사람 이름이 이미나, 였대요. 제목 참 잘 지었죠. 저는요, 가만히 눈 감고,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진짜 저절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가사가 너무 아름다워요. 고등학생일 때에는 하루에 열 번도 넘게 계속 들었어요. 지금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듣죠. 하하. 영진 씨는 어때요. 그 노래 좋아하세요?
좋아합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그 날 이후부터요. 저는 그 날 이후로, 매일 그걸 들어서, 그 노래를 백 번도 넘게 들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니까요.
그래서 노래 가사처럼.
힘들고 지쳐서, 그런 이유로 만나기 미안해서.
전화하면 당신 또한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할까봐.
그래서 그냥 전화를 떨어뜨립니다.
당신이 계속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 하나면 지금의 고독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미래의 완성 속에서
당신은 웃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