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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보지 못한 것
수현은 입을 벌린다.
어둠에 스며들어 둘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가 알던 웃기고, 과장되고, 회초리 잘 휘두르던 유쾌한 국사 선생 해두산은 그곳에 없다. 도수 두꺼운 안경 너머에 자리한 그의 진짜 얼굴은 날카롭고, 서늘하고, 잔혹하다. 그의 회초리가 흔들릴 때마다 범인은 허공을 휘돌아 나가떨어진다. 그가 바닥을 기며 흘린 핏물이 바닥에 길게 자국을 남긴다.
"정글에도 들지 못한 그저 칼에 홀린 잡것이라 듣지 못했나본데."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굵고 우렁우렁하지만, 안에 담긴 것은 평소의 웃음기가 아닌, 여지 없는 살의다.
해두산이 저벅저벅 걸어간다. 남자는 바닥에 웅크려 바들바들 떤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시린 나이프가 들려져 있으나, 칼끝은 해두산을 향하지도 못하고 흔들린다. 해두산이 발로 걷어차자, 그가 키에엑, 하고 비명을 지른다. 이빨이 바닥을 굴렀다.
"운무고는 건드리지 않는다. 이 도시의 룰이다."
해두산이 웃으며 그의 칼을 빼앗아 든다. 칼은 해두산의 손에서 고주파와 같은 찢어지는 소리를 울린다. 해두산이 손에 힘을 주자. 마치 쥐어짜이는 새앙쥐처럼, 칼은 꺽꺽거리며 빛을 잃어간다.
수현은 어둠에 몸을 숨기고 더 다가간다. 해두산을 응시한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단전이 열려 있다.
대자연의 기운이 그의 몸을 통해 순환한다.
무인들, 도사들, 선술을 부리거나 정순한 무공을 가진 이들의 특징이다. 수현은 해두산의 몸에서 오랜 수련의 흔적을 본다. 어떻게 이것을 여태 몰랐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해두산의 몸은 힘으로 가득하다. 눈앞의 남자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해두산의 기세에 짓밟힌다. 그가 회초리를 휘둘러 허공에 문자를 떠올린다.
"네가 어떤 쓰레기든, 어떤 사연으로 이런 흉기에 홀렸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너는 이걸 알아야 한다."
범인은 그 광경을 보고서, 떨리는 눈을 해두산에게서 돌려 저 창에 걸린 달을 본다.
그가 홀린 것, 그가 즐긴 모든 살육의 진미, 그것은 저곳으로부터 왔다. 우주의 외로운 황야에서부터 수신한 광기는 어느덧 절정이다. 눈부시게 하늘에 떠오른 달은 그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광소하고 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
회초리가 그려낸 문자는 환하게 빛난다.
그 뒤로 떠오른 해두산의 얼굴은, 고요하다.
문자는 이내 허공에서 뒤섞이며 하나의 힘으로 화한다. 범인은 서서히 의식을 잃고 바닥에 허물어져, 이내 가쁜 숨을 쉬다가 눈을 감는다.
허망한 최후였다.
해두산이 눈을 감는다.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말을 허공에 이어나간다.
"사회가 먼저 바로 서면, 정글에도 도가 설 것이다."
남자의 시신은 풍화되듯 가루가 되어 스러진다.
"그러나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해두산이 창을 열었다. 문득 인 바람에 가루가 창밖으로 흩날렸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그리고 해두산은 뒤돌아 간다. 그의 낡은 구두 뒤축이 또각거린다. 수현은 어둠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언제나 덩치가 커 곰이라고도 불리는 해두산의 뒷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그 날을 기억한다. 수현이 매점에서 다 마신 음료캔을 쓰레기통에 던졌다가 들어가지 않자,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리려 했던 그 날, 해두산이 다가와 그것을 주워 쓰레기통에 담았었다. 회초리에 맞을까 움츠렸던 수현에게 해두산은 그저, 짜식, 하면서 지나갔었다. 그리고 수현은 그날 이후로 캔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에서 시작한다.
해두산과 같은 이들이 없어 수현이 엇나갔다면, 수현이 힘을 악용했다면 정글이, 세상이 온통 짓밟혀 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현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해두산을, 그리고 그를 닮은 사람들을 만나 그렇게 되었다.
그러한 것들의 총합이다.
그의 손을 거친 열매라고 해도 좋다.
수현은 사나이 울리는 해두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국사 성적을 올리기로 결심한다.
*
"괜찮나, 이수현이! 지윤샘도 괜찮으십니까. 별 일 없어서 다행입니다. 다 제가 이 그 범인을 쫒아낸 덕분에 무사한 거 아닌가. 헛헛헛."
"……아무 말도 안하셨으면 고맙다는 소리 들으셨을 텐데."
"뭣, 고맙다구요? 같은 교사인데 무슨 별 말씀을, 헛헛헛."
해두산이 호방하게 웃는다. 지윤도 아직 쫓긴 여운이 남아 불안해보였지만, 진정되었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수현은 아무 말도 없이 멀뚱히 서서 해두산을 바라본다.
수현이 지윤을 데리고 나오자 어느새 신고했는지 경찰차들이 몰려와 있었고 해두산이 무언가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학교에서 범인을 마주했는데! 교사로서 학생을 지켜야 하므로 물러서지 않고 회초리를 휘둘렀더니! 범인이 해두산의 기세에 혼비백산하여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을! 쳤다고 했다. 지윤은 분명 거기 엄청난 과장이 섞였으리라 수현에게 말했지만, 진실을 아는 수현은 선망의 눈으로 해두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엉? 이수현이 갑자기 눈초리가 불손한데? 이 용감한 선새임을 감히 못믿어!?"
회초리에 팔뚝을 가격당하며 수현은 다 취소했다.
아무튼 고로, 지윤과 수현은 학교를 벗어나 귀가한다.
수현은 조수석에 앉아 턱을 괴고 주변 풍경을 바라본다.
무심한 얼굴들, 웃는 사람들과 찡그린 눈, 휴대폰에 눈을 박고 걷는 학생들, 술이 올라 기분 좋게 설렁거리며 걷는 어른들,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그 모든 풍경들에 실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하고 수현은 생각한다.
"너 사는 오피스텔 여기지?"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수현의 오피스텔이다.
운무고에서 가장 비싼 동네다. 수현은 잠시 건물을 올려다본다.
"안내리니?"
"선생님 댁으로 가요. 이 길이잖아요. 같이 가드릴게요."
지윤이 수현을 쳐다본다. 수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하는 그 단정한 이마, 그 아래로 깊은 눈매가 아름다웠다. 그녀의 뒤로 스쳐지나가는 자동차들 헤드라이트가 춤을 추었다.
"혼자 가시기 무섭잖아요?"
"너가 이러는 게 더 무섭거든."
"오늘 일도 있고, 선생님 혼자 보내기 불안해요."
지윤이 입을 다문다.
선생님에게 건방진 소리나 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는다. 오늘 그 범인 앞에서 그녀는 떨었고, 수현은 침착했다. 실은,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그 남자의 얼굴이 잊혀지질 않는다. 어둠에서 뒤켠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주차장에서부터 집으로 홀로 걷는 그 길이 불안하다.
아, 모르겠다. 지윤은 생각을 멈추었다. 선생님으로서 해야할 것들, 계산하기도 지친다. 그녀는 그냥 고개를 돌렸다. 마음 가는대로, 했다.
말 없이 차는 다시 주행하기 시작한다.
수현의 오피스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에 지윤의 아파트가 있다.
아파트 단지의 지하주차장으로 지윤의 차가 진입한다. 시동을 끄고 지윤과 수현이 내린다. 둘은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수현은 묘하게도 이런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주차장 위로 올라와, 지윤이 향한 곳은 벤치다. 그녀의 아파트 건물 곁에 자리한 자판기와 벤치, 그 곁에서는 나트륨등이 귤색 불빛을 밝히고 있다. 그녀는 지폐를 밀어넣고서 콜라 하나를 빼내어 수현에게 건낸다.
"고마워. 오늘."
수현은 싱긋 웃는다.
"네."
"그리고 이거."
지윤이 만원짜리를 두개 꺼낸다.
"택시비. 이수현 꼴에 남자라고 선생님 데려다줘서 고맙다."
수현은 고개를 젓다가, 지윤이 손을 거두지 않아 결국 받는다. 지폐를 받으면서 둘의 손끝이 닿았다. 다시 둘은 말이 없어진다. 수현이 콜라를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들어 지윤을 보았다.
그녀도 엉거주춤 돌리던 시선을 든다.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지윤이 눈을 피했다.
"그럼. 고마웠고, 내일……."
"선생님."
전처럼 어렵지도 않고, 범접 못할 위치의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냥 여성이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가 불빛을 받아 발그레하다. 이 주황색 등불은 사람을 왜 이리 더 예쁘게 보이게 하는지. 수현에게 그녀는, 여전히 캐비닛 안에서 숨죽여 떨던 그 지윤이었다.
수현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지윤은 그린 듯이 수현에게 안겨든다.
둘의 몸이 밀착됐다. 캐비닛에서 느낀 서로의 심장 고동이, 다시금 맥박친다. 순간 지윤은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 단정한 얼굴로, 눈을 키운 채 수현을 말끄러미 올려다본다. 얼굴이 가깝다. 수현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준다. 약동하는 그녀의 육체가 온전히 느껴졌다.
수현이 키스했다.
촉촉한 것이 닿고, 그 틈으로 뜨거운 것이 휘감긴다.
지윤은 수현의 어깨를 붙잡았으나 힘이 빠져서 저항할 수 없다. 그저 시늉으로 수현의 옷깃을 붙잡을 뿐, 이내 파고드는 수현의 혀에 순응한다. 머릿속에서 울려야 할 경고 신호는 침묵한다. 그저 지금 자신을 감싼 이 소년으로 머리가 가득하다.
마치 그곳에서처럼 수현의 허벅지는 그녀의 가랑이를 파고들어 자극한다.
아래가 뜨겁다. 지윤은 수현의 옷깃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준다. 밀어낼 기력이 없다. 온 몸의 통제권을 잃었는데 그저, 혀만 살아서 수현의 혀에 매달린다.
젖었어.
이윽고 수현이 입을 떼어냈다.
지윤이 애타는 눈으로 수현을 바라본다.
수현은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뒤돌아 걷는다.
지윤의 발걸음은 들리지 않았다. 수현은 그녀가 자신을 볼 수 없을 때까지, 저곳 모서리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
수현이 저택으로 들어왔다.
이브린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개 돌린다. 그녀는 마치 그린 것처럼 둥실 떠올라, 수현의 앞에 착지해서는 오연한 태도로 팔짱을 낀다.
"호오."
"왜?"
"호오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주인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군."
"뭐야. 말투가 건방진데."
수현이 이브린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올렸다. 그녀는 낭창한 다리를 뻗어 수현의 허리를 감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니라, 주인."
수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브린의 인형 같은 얼굴에 다시 한 번 감명받으며 웃었다.
모든 알고 있던 것들이 문득 낯설어지는 하루다.
여태껏, 서은의 그늘을 보지 못했다. 해두산의 또다른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지윤이 숨긴 여린 내면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내놓고 싶지 않아하는 것들은 그들의 뒤에 숨어서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각자의 자기 세계를 세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그들의 진면목이 있을 터였다.
"그냥, 내가 보지 못했던 게 너무 많았던 것 같아서."
"호. 알겠노라. 그렇다면, 위대한 드래곤으로서 주인에게 또 하나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뭔데?"
이브린이 짐짓 턱을 괴며 고심한다.
"하지만 대가가 필요한데…… 흐음…… 고작 사춘기도 지나지 않은 주인이 이 위대한 드래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수현은 결국 웃고 만다.
"됐고, 우리 키스할까."
수현의 말에, 짐짓 고심하던 이 작고 아름다운 드래곤이 고개를 든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이브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긋 웃었다.
수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 구김 없이 웃는 이브린의 환한 미소 또한, 전에는 보지 못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캐릭터 인기투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예상 외로 예지윤이 선두, 그 뒤를 정하가 따르고 있네요.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남자 박정태와 겨울을 닮은 쓸쓸한 잿빛 눈동자 요한의 선전이 눈에 띕니다.
1부 완결까지 계속하겠습니다. 근데 1부 완결은 제법 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