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83화 (8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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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보지 못한 것

수현은 불켜진 복도를 지나 상담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 지윤이 있다.

수현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탁자의 서류들을 내려다보며 무엇인가를 골몰한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에 내려앉은 모습이 수려하다. 안경을 걸쳐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 수현은 더 다가가지 못하고 잠시 멈추어 지윤을 본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녀와 같은 이들은 진하게 화장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거나, 자신을 굳이 꾸밀 필요가 없다. 그저 삶의 양식들, 자그마한 미소와 손짓들이 마치 미리 의도했던 것처럼 모든 풍경에 맞아 떨어진다. 날씬한 몸은 군더더기라고는 없어 경쾌해서, 어떤 표정이나 각도에서도 우아하여 사람들의 눈을 잡아끈다. 단지 시대의 미의식에 걸맞는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것만으로, 그녀는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

그녀의 매력이란 그저 아름다움 때문일까.

모르겠다.

문득 종이 울렸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는 종소리에 지윤이 고개를 들다가 수현을 발견한다. 눈썹을 기울인다.

"거기서 뭐해?"

"그냥 선생님 구경했어요."

"그러니까 날 원숭이보듯 했다고 고백하는 거니?"

수현이 웃으면서 지윤의 맞은 편에 앉는다. 그녀의 손에는 수현의 진로조사서와 성적표, 생활기록부 따위가 함께 있다.

"있잖아……."

지윤이 진로조사서를 내밀며 무어라 말을 잇는 찰나에.

복도의 조명이 꺼졌다.

수현이 돌아보았다. 시간이 늦어 불이 하나하나 꺼지고 있었다. 수현이 지윤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한다.

"괜찮아. 오래 안걸려. 어두워서 무섭다고 못가는 거 아니지?"

"그거 맞는데. 무서우니까 나중에 데려다주세요."

"또, 또 이런다."

"아니 진짠데."

지윤이 픽 웃으면서 수현이 썼던 진로조사서를 내밀었다.

"니가 쓴 거다."

"네."

"……그게 수현이 꿈이니?"

"그렇습니다."

장래희망은 치킨집 사장.

대학 진학할 생각 없음.

"졸업하면 치킨집 차릴 거에요."

"무슨 돈으로?"

"부모님께 받으면 돼요. 돈은 썩어나니까."

수현이 시니컬하게 대답한다.

"치킨집은 왜? 치킨 좋아해?"

"별로요. 대세잖아요?"

"남들 따라서? 하고 싶은 걸 못찾았다는 소리네. 고민중이니?"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지윤은 가만히 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은 몸을 뒤로 물린다.

지윤이 수작질을 받아주자 오히려 수현이 불편하다. 평소라면 그녀답게 받아치거나, 비꼬거나, 혼냈을 텐데 그녀는 드라마에서 본 심리상담사 마냥 부드럽게 받아주고 있다. 지금 이건 지윤의 게임일까. 혹 그게 아니라면, 더 마음이 불편하다. 수현은 눈을 내리깔았다. 별로 진지하고 싶지 않은데.

"……."

수현이 침묵한다.

이 정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길어지고, 그 불편한 시간들을 지윤은 아무렇지도 않게 기다린다. 수현은 생각한다. 생각들은 정리되지가 않았다.

내가 이제 그런 게 필요한가?

만약 내가 힘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자랐더라면, 정하와 예브게냐를, 올가와 이브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무얼 꿈꾸고 있었을까.

그런 거 없었는데.

이제 그녀들과 함께 할 기나긴 시간들을 어떻게 할까. 그저 집에서 침대에서 뒹구는 걸로 충분할까.

내가 왜 이런 것 따위를 고민하고 있지.

수현이 눈을 든다.

여전히 기다리는 지윤이 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허망하다.

이 순간이 우스워진다. 나에게 미래를 묻는 그대는 누구인가.

예지윤. 27세. 교사. 발레리나를 꿈꿨다지만 기껏해야 학생 때 작은 대회에서 입상하고 그만 둔. 그저 남들 따라 공부해서 대학 가고, 남들 따라 준비해서 교사 되고, 남들 다 가진 남자친구 없으니 허전해 적당한 남자 만나 사귀는. 그 시시한 남자와 섹스하는. 좋은 것만 보고 자라 꿈타령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에 둔감한.

그러면서도 꿈과 미래에 대해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수현이 막 입을 여는 찰나에.

상담실 불이 꺼진다.

일순, 학교가 어둠에 잠긴다.

어둠에 놀라 잠깐 부스럭대던 지윤이 이내 말했다.

"뭐 보이니?"

"아무 것도……."

"그게 네 미래다."

"……."

전기가 돌아올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여전히 어둡다. 애초에 야간자율학습은 끝났으므로 학생들은 서둘러 빠져나갔을 터이다. 수현의, 어둠에 적응한 눈은 지윤을 볼 수 있다. 턱을 매만지며 모호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수현을 찾는 듯 눈이 헤맨다.

"아직 안끝난 거 알지?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네."

지윤이 일어난다. 수현이 마주 일어났다.

그녀가 헤매며 벽을 짚는다. 천천히 천천히 부딪치지 않게 복도로 걸어나온다. 수현이 그녀를 지켜보며 조용히 에스코트했다.

복도에 드리운 달은 만월이라, 서로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해에게서 달로, 달에게서 그들에게로, 떠나와 마모된 빛이 전하는 것은 그저 어슴푸레한 윤곽이다.

그 윤곽들을 지나며 수현은 감상에 젖는다.

예전에 그 자신이었다면, 곁을 걷는 지윤이 그저 선생님이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향수 냄새가 코끝에 선명하다. 어둠을 꿰뚫는 그의 눈에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와 목선이 들여다보인다.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성큼성큼 걷는 그 우아한 걸음새가 매력적이다.

아름다운 여성이다.

문득, 환한 빛이 켜진다. 지윤이 휴대폰 플래쉬를 켰다.

"선생님, 무서우세요?"

"곧 계단이잖아."

수현이 웃는다.

지윤이 앞장서서 계단을 돌았다. 수현은 문득 기척을 느끼고 멈춰선다. 지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계단을 내려간다. 희미한 콧노래 소리. 수현이 지윤에게 말을 걸려는 찰나에, 지윤이 스스로 멈춘다.

"……."

지윤의 몸이 굳어 있다. 수현의 시선이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향한다.

계단의 끝에 한 남자가 서서 히죽 웃고 있다.

양 입꼬리는 최대한 끌어올리고, 눈은 잔뜩 휘고 콧잔등을 찡그려진, 얼굴 거죽을 최대한 당겨 만든 최대한으로 밝은 미소다.

그의 손에는 나이프가 그의 미소처럼 함께 빛나고 있다.

수현과 지윤은 동시에 상황을 이해한다.

수현은 생각한다. 우연인 척 격투 끝에 제압할까, 지윤을 피하게 한 후 짓밟아버릴까.

지윤은 생각하지 못한다. 손을 뒤로 돌려 수현의 옷깃을 붙잡는다. 수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를 밀쳐내며, 소리친다.

"도망쳐!"

"선생님."

수현은 그녀에게 말려 달리기 시작한다.

*

소리를 질러도, 비명에도 찾아오는 이 없다.

수현은 이 주위를 감싼 결계를 느낀다. 바깥과 내부의 소통을 차단하는 것이다. 남자에게서는 어떤 능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그가 가지고 있던 그 번뜩이는 폴딩 나이프, 그게 열리며 달빛을 쬐었을 때, 힘의 일렁임을 느꼈다. 아티팩트다. 그것에게서 뻗어나온 힘이 주변을 장악한다.

수현은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지윤이 보지 못하는 사이 그놈을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윤이 수현을 간절하게 붙잡고 떨고 있으므로, 수현은 참는다.

모든 게 유희가 되어버린 소년에게는 값싼 살육보다도 이러한 것들이 재미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회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

"쉬."

둘은 캐비닛에 몸을 숨기고 있다.

나가는 문들이 모두 잠겨 있어서, 학교를 헤매며 그에게 쫒겼다. 범인은 둘을 추적하며 즐기고 있다.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장난치면서 둘을 겁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유희이다. 수현은 가소로워 짓밟아버리고 싶었으나 지윤이 겁에 질려서는, 그러나 선생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수현을 자꾸만 이끌어 그녀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놓친 사이 지윤은 수현을 캐비닛으로 밀어넣고, 자신도 들어왔다.

좁았으나 둘이 날씬하여 어떻게 문을 닫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자세가 좋지 않다.

둘은 캐비닛에서 포옹하다시피 바싹 붙어서, 서로의 심장고동이 느껴질 지경이다. 수현의 상체에 지윤의 유방이 짓눌려서 그녀의 부드러운 살이 느껴진다. 둘이 호흡할 때마다 서로의 숨결이 뒤섞인다. 달콤하다.

지윤이 한숨을 쉬며 고개 숙인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향긋한 냄새가 난다. 수현이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을 거에요."

"……응."

교사로서의 책임감이 그녀를 여태 이끌었다. 헐떡이는 도주를 끝내고 나자 감정이 솟구치는지 그녀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듯 일그러진다. 수현을 생각하여 억지로 입을 막고 참는다. 캐비닛의 희미한 틈 너머로 학교를 헤매는 놈의 그림자가 보인다. 둘이 숨을 죽였다.

수배서에 있던 그 흉악범이 하필 이 학교로 왔을까. 수현은 놈이 콧노래를 부르며 둘이 숨었을 장소를 하나하나 뒤지는 것을 본다. 지윤은 품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지윤에게는 이 상황이 생명을 위협하는  극심한 스트레스일 것이다.

어, 이럴 수가.

수현이 경직됐다.

이렇게 붙어 있어서 그럴까, 수현의 물건이 일어서 지윤의 몸을 찌른다.

============================ 작품 후기 ============================

마지막 줄 수정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졸면서 썼더니....ㅠㅠ 엉덩이를 찌른다를 몸을 찌른다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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