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82화 (82/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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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보지 못한 것

지윤이 차에서 내렸다. 이른 아침이라 학생들도 그다지 없는 시간이다. 휴대폰을 확인하며 주차장을 나선다. 그런데,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정도야?"

"응. 아, 몰라. 미치겠어."

익숙한 목소리다. 그녀의 반 학생이자, 운무고 일학년의 비주얼을 담당하는 이인조 중 하나, 이소희다. 다른 목소리는 이인조의 남은 한 명, 그녀의 친구 송진하일 것이다. 지윤은 슬그머니 멈춰서 귀를 기울였다.

"이수현 장난 아닌데?"

왜 또 그 녀석 이름이 나오는지. 지윤이 머리를 쓸어넘긴다.

"그렇게 잘해?"

"머리가 이상해진다니까. 크기도 이래."

"뭐? 안아파?"

"이젠 적응돼서…… 이거 큰 거 맞지?"

"나, 나도 잘 몰라. 동영상에서 본 건 안그랬어."

지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제자들의 개인사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은데, 갑자기 흥미진진해졌다.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지윤은 숨을 죽이고 목소리에 집중한다.

"자세는 특별하게 안해? 그냥 수현이가 위에서?"

"그냥 여러가지……."

소희의 묘사를 엿들으며 지윤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녀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자. 남자친구는 있었지만, 성행위는 상상도 못했다. 대학에서야 남자친구를 몇 거치며 경험을 했고, 그나마도 기껏해야 발가벗고 서로 허리를 흔드는 정도였다.

"그치. 이상한 거 맞지? 걘 몇 시간을 해도 안끝낸다니까."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 좋은 거 아닐까?"

"으으…… 나만 기분 좋은 거 같아서 그러지…… 어제도 나만 계속……."

두 제자의 비밀 이야기를 듣는다는 죄책감도 사라지고, 지윤은 온통 집중하기 시작했다.

병원 가랬더니, 녀석이 여자친구랑 놀아나. 지윤이 미간을 찌푸린다. 계속해서 진하가 물었다.

"몇 번?"

소희의 고백에 지윤은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 한다.

쟤네가 한 게 섹스 맞아?

"뭐? 착각한 거 아니고?"

"그걸 어떻게 착각해. 막 번쩍번쩍하고, 오줌처럼 물 나온단 말야. 나 완전 비명 질러. 이대로 잘못되는 거 아닌가 불안하다니까. 너무 좋아가지구."

지윤은 어제 자신의 제자가 느꼈다는 절정의 횟수가 두 자릿수에 가깝다는 것에 놀라고, 그녀가 말한 절정의 묘사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는다.

그녀도 섹스하며 절정을 느껴보았다. 하지만 소희의 설명에 문득, 자신이 오르가즘이라고 믿은 것들이 실은 착각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천국, 천국.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소희의 목소리에 지윤은 문득, 그녀를 질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친다. 고개를 홰홰 저으며 생각을 떨쳐낸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느낀 그 황홀함들이 너무 궁금해서 상상은 꼬리를 문다.

둘의 정사를 그려본다. 수현의 마른, 그러나 근육이 자리하고 있는 예쁜 선의 몸과, 소희의 날씬한 몸이 뒤엉켜서 짐승처럼 헐떡인다. 수현이 허리를 흔들 때마다 커다란 물건이 소희의 안으로 진퇴하면서, 소희는 자지러지게 수현을 끌어안는다. 서로 혀를 나누는 난잡한 키스.

그냥 예쁘게만 보였던 애들인데.

지윤은 자신을 더 못견디고 소리 죽여 자리를 떠난다.

붉어진 뺨에 손을 얹어 열기를 식힌다.

드문드문 가방을 짊어지고 오는 아이들에게 이따금 인사 받으며 교무실을 향했다.

그런데 문을 열자, 또 거기에서, 뜻밖에 수현이 서 있다.

지윤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해두산 선생과 이야기하고 있다. 프린트 뭉치를 받으면서 무어라 이야기하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저 농담하며 웃는 옆얼굴의 수려한 선이 눈에 들어온다.

저 나이대, 교복은 잘 입혀도 어른의 눈에는 어딘가 어색하고 촌스럽기 마련인데 녀석은 왜 저렇게 옷맵시가 딱 떨어지는지.

요새에 키도 큰 것 같다.

시선을 느꼈는지 수현이 지윤을 향해 꾸벅 고개 숙인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그 프린트 뭐에요 선생님?"

"아, 이거 이거 왠 미친놈이 동네 돌아다닌다고 경찰서에서 수배서 보내줬습니다. 혹시나 학생들이 이 사람 만나면 피하고 바로 경찰서 연락하라고. 생긴 것도 완전 흉악범이네 흉악범."

그가 보여준 프린트지에는 평범하게 생긴 삽십대의 남자의 사진이 있었다. 아래에는 그가 저지른 일련의 범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폭행과 강도가 많고, 강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놈이 대낮에 얼굴을 들고 돌아다니다니. 어이 이수현이 어떻게 생각해?"

"말세네요."

"그렇지. 그거지. 그러니 너희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게 이거랑 무슨 관계가……."

"그 관계가 궁금하면 공부를 해라. 책 속에 답이 있느니라."

싱거운 소리를 하던 수현이 문득 지윤을 본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얼굴 빨개요."

"아니. 아냐."

얼버무리고는, 태연한 척 웃으며 덧붙인다.

"어제 병원은 갔다 왔어?"

"네. 아무 문제 없대요. 제가 강하잖아요."

"난 그 강함 성적에 반영해줬음 좋겠다."

"항상 강하면 부러지기 마련이죠. 전 필요할 때에만 강합니다. 샘."

"너 성적표 나오는 날엔 강해질 필요가 있을 거다."

수현이 프린트 뭉치를 들고 교무실을 나간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학년 담당의 선생님이 말한다.

"쟤가 이수현이에요? 자알 생겼네."

"수현이 아세요?"

"일학년에 귀여운 애 있다고 애들 난리던데."

해두산이 껄껄 웃는다.

"이수현이 얼굴이 문제네, 문제야. 내가 젊을 때 같네."

"어딜 속이실려고. 해 선생님 젊을 때도 저랑 같이 근무했었는데 지금이랑 똑같아. 그냥 곰이었어요. 곰."

지윤이 웃으며 손에 들린 프린트를 다시 훑어보았다.

흑백 사진 속 수배자의 얼굴에는 감정이 없다. 눈은 평온하게 정면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아래로 늘어선 범죄의 기록들은 끔찍한 금수의 것이다. 그 리스트와 사진 속 얼굴이 이어지지가 않았다. 가장 최근에 목격된 곳은 운무시의 시내, 번화가였다. 경찰들이 총력을 기울인다고 하니 곧 잡히리라. 지윤은 혹시나 마주칠까,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

그는 어둠을 걷는다.

밤을 헤매는 자에게 질문하지 마시라. 그의 주머니에는 잘 갈린 폴딩 나이프가 다음 타겟을 기다리며 침 흘리고 있다. 혹시라도 그와 마주치면 당장 뒤돌아 달리시라. 그는 상대의 등을 꿰뚫을 때 가장 황홀하므로.

그는 곰곰히 생각한다. 경찰들의 수색은 정밀해지고 있다. 앞으로 그가 즐길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다. 경찰에게 붙잡히고, 사형을 선고 받고, 형의 연기로 무기한의 징역에 이르게 될 그 지루한 시간들을 생각하며 진저리친다. 하지만 그 결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그가 피할 수 없이 살해를 탐닉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그는 최대한 그 시간을 연장하고, 가능한 모든 즐거움을 누리고 갈 것이다.

모자를 눌러 써 시야는 아래로만 환하다. 얼굴도 모를 수많은 학생들의 다리들을 본다. 그 중에서도, 치마를 입은 여자애의 다리들은 그에게 각별한 집착을 유도한다. 그 가느다란 선을 보고서 그는, 다음의 타겟이 여학생, 이 될 것을 예감하고 웃는다. 하지만 거리에서 일을 치를 수는 없다.

어디엔가 조용히, 한 아이와 내밀한 시간을 가질 장소가 있을 것이다. 품 안의 나이프로 그 빛나는 시절을 도려내어 영원으로 박제할 수 있을, 그런 곳이 있을 터였다. 그는 골몰 끝에 불이 꺼지기 시작하는 학교를 발견한다.

이 시간이면  대부분 떠났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기대 하나에 걸고 남자는 유유히 불 꺼진 학교로 걸어들어간다. 어디엔가 저 어둠 속에서 길 잃은 양 하나가 그에게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달이 뜬 밤이다.

졸린 눈으로 꾸벅거리는, 나이든 경비를 속이는 것은 쉽다. 죽이는 것은 더 쉽다. 그는 아직  남은 즐거움들을 생각하며 살인을 보류하고, 그의 눈을 피해 홀연 학교로 스며든다. 교실은 어두우나, 복도에 줄지어 자리한 창으로 보이는 달은 지독하게 밝다.

저 멀리에 불켜진 교실이 보인다.

왁자지껄한 소리. 아직 귀가하지 않은 아이들이 빨리 떠나자며 웃고 떠든다. 그는 몸을 숨긴다. 너무 많다. 그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의 목숨과, 둘만의 내밀한 공간이다.

이제는 욕구가 치밀어 참기 어려우므로, 이제 그에겐 처음 목적했던 사냥감, 여학생이라고 전제했던 그 조건은 중요치 않다. 누구든지 어둠 속에 홀로 남는 순간, 그의 칼날이 달빛을 흠뻑 마실 것이다. 그의 사냥감 또한 온 내장으로 그 빛을 받아내겠지.

펄떡이는 심장과 저 황홀한 달의 첫 눈맞춤.

그 첫인상을 묻겠다.

그는 전율하여 낮게 웃고는 학교를 헤맨다.

소리가 시끄럽다.

아래는 교무실인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선생들이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어두운 계단에 앉아 아래층에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교무실의 불빛과 소음을 느낀다.

차츰 떠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마지막에 남을까. 고대하며 그는 미소짓는다. 품 속의 나이프가 부르르 떤다.

*

소희가 곁에서 투덜거린다.

"갑자기 왠 야자를 시키고 난리야."

"샘이 하라시니까 해야지."

"웃겨. 왜 너만?"

"나 말고도 몇 명 더 있어. 성적 떨어진 애들."

"너는 올랐잖아. 넌 왜?"

"글세. 무슨 상담도 한다는 거 같던데. 너도 야자 하자. 내가 가르쳐줄게."

"싫어. 난 야자가 제일 싫어. 간다."

"와, 이소희 나 버려?"

"야자 딸린 남친은 필요 없네요."

소희가 메롱하고는 교실을 나간다.

운무고는 야자가 정말로 자율이기 때문에 대개는 신청자에 한해 교실을 운영한다. 물론 신청자가 많지 않으므로 교실을 몇 개로 합친다. 오늘은 담임 예지윤이 몇몇 학생들을 지정하여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남았다.

수현은 책을 펼친다. 예브게냐의 정신지배를 얻은 후 그에게 시험은 무의미해졌다. 공부도 대학도 이제 그에겐 의미가 없다. 하지만 시험 점수를 떠나, 그저 골 빈 난봉꾼이 되기는 싫으므로 억지로 책을 펼친다. 정하가 지적이지 않으면 섹시하지도 않다고 했던 것 같다.

한 명씩 예지윤에게 불려간다. 아마 이것 때문에 야자를 권유했던 것 같다. 수현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야, 뭐했어?"

"걍 진로상담. 전에 썼던 종이 있잖아."

수현과 함께 남은 서은이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대체 어떤 터무니 없는 걸 썼길래 담임이 남겼냐고 놀리려다가 얼굴이 어두워서 관둔다. 수현은 책상에 길게 엎드려 하품하고는 서은을 빤히 쳐다본다.

"뭘 보니?"

"니 썩은 얼굴."

"……."

서은이 조용히 수현을 노려본다. 정말 기분 안좋은 것 같다. 서은의 이런 반응 드물어서 수현은 곧바로 수정한다.

"아니 표정이 썩었다고. 안좋은 일 있어?"

"얼굴이 썩었는데 무슨 표정이 소용이겠니. 미안. 얼굴 썩어서 눈 상했겠다."

"그런 말 아닌 거 알잖아. 미안. 화내지 마."

"화 안냈거든."

"너 화낼 때는 항상 거든거든 이러거든 거든아. 너 예뻐. 그러니깐 삐지지 마."

서은이 펜 윗부분으로 수현의 머리를 톡 때리고는 책을 펼친다.

"담임 때문에 짜증나서."

"왜? 너 지윤샘 좋아하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다르지. 진로 조사하는데 무슨 꿈이니 뭐니 꿈나라 얘기하고 있으니까."

"뭐 썼는데?"

"비밀. 말 걸지 마. 공부할 거니까. 말 걸면 진로 방해다."

수현이 책에 엎드려 턱을 괸다. 서은의 집이 금전적으로 여의치 않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간 전혀 티를 내지 않았는데, 진로라는 주제에서 그 일부를 본 것 같다. 아마 그런 류의 문제였을 거다. 담임인 예지윤은 넉넉하게 잘 자랐다는 게 눈에 보이고, 그래서 그런 쪽에서 순진한 구석이 있다.

상담이 길어지는 것 같다. 야자의 거의 막바지에 수현의 차례가 되었다.

수현은 공부하는 서은의 등을 괜히 찔러 방해하며 교실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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