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80화 (80/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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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보지 못한 것

예지윤은 피곤한 얼굴로 교탁에 선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가만히 출석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제 조사서 잘 봤고, 아직 헷갈리는 녀석들 있는 것 같은데 잘 생각들 해. 사실 대학이 인생의 다는 아닌데, 거의 태반이야."

우, 하는 소리가 들린다.

"샘 어제 술 좀 드신 얼굴인데요."

"너같이 성적 암울한 애들 미래가 안타까워 한 잔 했다. 됐냐?"

"누구랑 먹었어요? 남자친구?"

금새 남자애들이 시끌거린다. 예지윤이 못말리겠다는 듯 픽 웃으며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아냐. 니네도 나중에 나이 들면 혼자 청승 맞게 술 먹고 그래. 그러니까 그만 캐묻고 수업이나 준비해라. 수업시간에 보자."

그리고 잠깐 시선을 돌린다. 소희는 고개를 숙인 채 온몸으로 삐쳤다고 자기를 어필하는 중이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니.

멀리 앉은 수현이 마주 쳐다보며 생긋 웃는다.

그 맑은 웃음에 잠시 눈길을 빼앗기고, 괜찮다고 마음 써주는 것 같아 고맙다. 얼굴이나 잘났지 영 싱거운 것 같은 녀석인데, 근래 들어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고 있다. 알게 된 건 생각보다 어른스럽다는 것, 그리고 의외로 남자다운 점일까. 아, 요새 저 녀석에 대해 생각하는 때가 잦은 것 같다. 지윤은 고개를 내저으며 교실을 나섰다.

휴대폰이 다시 찌르르 울린다. 남자친구 영진에게서 온 메세지였다. 곧 주말이니 어디 나가서 데이트라도 하잔다. 그리고 말미에 덧붙인 말들.

내가 과했어. 미안했어. 어제.

제자들한테도 잘 좀 전해줘. 내가 가끔 다혈질이잖아. 사랑해.

아, 지윤은 웃고 말았다. 그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싸웠거나 혹 갈등이 있었어도 금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다가올 줄 아는 게 그의 매력이었다. 그는 자주 실수하지만 또한 사과할 줄을 알았다. 못한 것들은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지윤은 그가 좋았다. 지윤은 알겠다고 답장하고는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어제 느낀 묘한 불안감들과 현재에 대한 회의는 이러한 것들에 씻겨내려간다. 어제 있었던 제자들과의 헤프닝도 미래에는 농담거리가 될 것이다. 이렇게 착한 제자 녀석들과 부대끼면서 늙어가고, 이따금 스승의 날에 찾아오는 아이가 있으면 밥이라도 먹으며 지난 일들을 나누고, 그게 삶이겠지. 지금 해야할 건 우선은 수업, 기말고사 시험 출제, 진로 상담, 그정도이다. 아무 것도 버거울 것 없으니 웃을 수 있다.

그렇게 웃으며 복도를 걷는다.

수업이 있는 옆반 교실로 들어섰다.

"안녕. 좋은 아치……."

수업 직전의 시간대인데도 시끄러웠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교실 뒤편을 둘러싸고 있다.

그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 욕설이 들려왔다.

지윤은 문제를 직감했다.

지윤이 성큼성큼 걸어가 아이들을 헤친다. 인파의 가운데에서 남자애 둘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둘 다 얼굴에 피가 흥건한데 죽일 듯이 몸을 부딪친다. 씹새끼, 개새끼, 찢어지게 욕설을 내지르며 사정 없이 서로의 얼굴에 주먹질한다. 바닥에도 누군가가 흘린 피가 뿌려져 있다.

몸이 굳었다.

교사로서 이 상황을 멈춰야 하는데, 솔직히 무섭다. 억지로 손을 꾸욱 쥐고 소리쳤다.

"멈춰! 뭐하는 짓이야!"

하지만 둘은 개의치 않고 격투를 이어갔다. 한 녀석이 넘어지자 곧바로 올라타서 얼굴에 미친 듯이 주먹질한다. 뻑, 뻑하는 소리가 엄청난데 누구도 말리지 못하고, 뒤에서는 여자애들 비명 소리가 시끄럽다.

"그만 하랬지!"

지윤이 걸어가 주먹질하는 아이의 어깨를 붙잡는다. 녀석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거세게 뿌리쳤다. 지윤이 휘청하며 바닥에 넘어진다.

"씨발! 방해하면 다 죽는다!"

녀석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선언하고는 다시 주먹을 들었다.

그 틈을 타 누워있던 녀석이 발로 걷어차 넘어뜨리고는 벌떡 일어나 물러섰다. 엉망이 된 얼굴로 뒷걸음질치며 두리번거리다가 철로 프레임된 교실 의자를 집어들었다.

"이 개새끼야!"

그리고 의자를 강하게 집어던졌다.

지윤은 주저앉아 고개를 들다가, 녀석이 의자를 던지는 것을 보았다. 정면의 남자애가 몸을 웅크리며 피하고, 의자가 그 너머로,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의자 다리가 점차 확대되는 것을 본다.

너무 짧은 순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멍하니 응시하는 것뿐이다.

온몸의 신경이 위험을 경고한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붙잡았다. 몸이 휘돌고, 무엇인가 그녀를 덮쳤다.

빠악!

그리고 멀리서 치솟는 비명.

지윤은 자신의 목덜미에 닿는 숨결을 느끼고, 이어 자신을 껴안은 누군가의 몸을 인식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잠깐 생각하고, 숨을 들이켰다.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아흐윽……."

자신을 덮친 소년의 어깨가 경련하는 것을 인식하고, 정신이 확 들었다. 지윤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무겁다. 학생들이 다가와 돕는다. 지윤은 자신을 감싸 안았던 소년의 얼굴을 보고서 가슴이 울렁였다. 수현의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어깨를 부여잡은 채 주저앉아 낮게 신음한다. 지윤이 수현을 부축해 일으켰다.

"수현아. 이수현."

통증에 수현은 대답하지 못한다.

"괜찮아? 양호실 가자. 빨리. 너 그러게 왜……."

괜한 짓을, 이라고 말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아서 지윤은 말을 잇지 못한다. 수현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정면으로 얻어맞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을지. 그냥, 고맙고 미안해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주먹질하는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수현의 친구, 정태가 둘을 상대하고 있었다. 실없이 착한 녀석인데, 이럴 때는 든든하다. 싸우던 두 녀석은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쩔쩔매고 있다.

"정태야. 그 둘 교무실로 보내."

"네."

지윤은 수현과, 함께 부축하는 남학생 하나를 데리고 교실을 나선다.

싸움이 끝났는데도 아이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너 또라이냐? 또라이 새끼야. 의자를 왜 던져, 미친 새끼야. 너 대가리 없어? 좆도 못치면 그냥 쳐맞지, 왜 그걸 던져? 어, 병신아. 대답해. 대답하라고 씨발 새끼가."

퍼억. 퍼억. 퍼억.

"아윽! 흐윽!"

"넌 뭐, 방해하면 다 죽인다며. 죽여봐. 어, 죽여봐 씹새끼야. 너 뭐 되냐? 뭐 돼? 보니까 좆도 아닌데? 어? 근데 왜 나대 찌끄래기 새끼야!"

짜악! 짜악!

"아흑! 미, 미안……."

"죽여봐, 응 병신아?"

짜악! 퍼억!

아이들은 정태의 저런 모습 처음 보았다. 전학오기 이전, 그 지역 학교들을 모조리 주름 잡았던 양아치 싸움꾼 시절 버릇이 나온다. 평소 수현과 붙어다니며 왠만하면 날 세우는 일 없이 늘 웃고 다니던 정태가 빡쳐서 오히려 둘을 두들기자 대다수 학생들은 오히려 둘이 한창 피터지게 싸울 때보다 겁 먹은 모습이고, 일부 여학생들은 무엇인가 알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괜찮아요. 이제 안아픈데."

"헛소리 말고 지금 병원 가서 엑스레이 찍어. 조퇴해."

"오, 조퇴, 그거 좋아요."

"어디 새지 말고."

수현의 날개뼈 부근이 부어올랐다. 곧 푸르죽죽하게 멍이 될 것이다.

지윤이 파스를 들었다. 수현은 상의를 탈의한 채라, 적당한 근육들이 자리한 마른 몸이 그녀의 눈앞에서 약동하고 있었다. 지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제자의 몸에 어색해하는 게 스스로도 한심해서 애써 손을 뻗는다.

그녀의 서늘한 손이 수현의 등에 닿는다. 맨살이 뜨겁다. 지윤은 연고형 파스를 들었다. 흰 피부 위에 파스를 짜내고는, 손바닥으로 수현의 등을 쓰다듬었다. 파스는 차가운데, 그 너머로 닿는 수현의 몸은 화끈거린다.

"움직이지 마."

수현의 뒤에서, 다른 쪽 어깨를 붙잡는다.

시답잖은 소리나 하던 수현이 입을 다물자 지윤도 조금 어색해진다. 조용히 수현의 어깨뼈를 문질렀다. 남자 녀석이 피부가 고와, 손에 착 달라붙는다.

"안아파?"

"안아파요. 선생님 손 부드러워서 오히려 기분 좋아요."

순간 지윤의 손이 느려진다. 손도 입도 잠시 헤매다가, 겨우 말했다.

"그…… 고마워."

"뭐가요?"

"너 아니었으면 내가 다쳤지 엄청. 덕분에 살았다, 이수현."

"말로는 부족한데."

"농담하는 거 아냐."

지윤이 수현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돌렸다. 수현의 깨끗한 얼굴이 말끄러미 지윤을 향한다. 지윤은 파스 묻지 않은 손을 뻗어서, 수현의 뺨에 얹는다.

"고마워."

수현도 가만히 지윤을 마주 보았다. 한동안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느낌이 든다. 지윤은 이 묘한 분위기를 어떻게 끝낼까, 그런 고민을 했다.

하지만 너무나 녀석답게도, 이내 수현은 그저 맑게 웃었다.

"네."

흠이라고는 없이 자리한 단정한 이목구비가 곱게 휘며 웃는 그 얼굴.

지윤은 순간 가슴이 뛰었다.

애써 일어나 열을 삭힌다.

"나 수업 들어가야 하니까 넌 바로 조퇴해. 병원 꼭 가고. 알았어?"

"네."

"일 있으면 전화해."

다친 수현의 등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양호실을 걸어나왔다.

문을 닫고는, 옆의 벽에 등을 기댄다. 콘크리트의 한기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휴대폰을 들자, 영진의 메세지가 여럿. 눈을 감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

선생님. 수현이 멋있죠.

여자애들이 재잘댄다.

이소희 복 받았나. 난 무슨 영화인 줄.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지윤의 주위로 여자아이들이 모여든다. 멋있는 어른이고, 대화에 능숙해서 아이들이 즐거워한다. 선을 넘지만 않으면 한없이 친근하게 대할 수 있다.

지윤은 그냥 웃고 만다.

다른 일 같으면, 수현이 녀석 괜히 멋있는 척이나 했다고, 영화 많이 봤다고 여유롭게 놀리겠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아직도 그 장면이 선명하다. 의자의 쇠 프레임이, 오래 되어 지지대 받침대가 사라지고, 콘크리트 바닥에 갈리고 쓸려 녹슬었던, 그 날카로운 모서리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수현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몸서리 쳐진다.

무거운 짐을 들어주거나 한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녀석에게 보호 받았다.

그녀를 살렸다.

그래서 지윤은 그녀답지 않게 그저 고개 끄덕이며 그래, 맞아…… 하고, 대답할 뿐이다. 지윤의 고요한 기색에 여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주며 말을 가린다.

"어쨌건 선생님 안다치셔서 다행이에요."

"샘 없으면 남자애들 학교에 볼 사람 없다고 울 걸요."

"푸, 니 이야기 아냐? 아까 이수현 조퇴해서 학교에 볼 거 없다고 징징대더니."

"뭐, 뭐래 이게."

마음이 고마워서 지윤이 애써 웃었다.

"볼 게 왜 없니. 곧 모의고사야. 책 봐야지?"

"으으으."

"아 잊고 싶었는데!"

"그냥 눈을 감겠습니다. 샘."

"선영아 그래도 시험 끝나면 눈 떠라. 성적표는 봐야되니까."

아이들의 웃음과 한탄을 뒤로 하고 지윤이 교실을 나왔다.

교무실로 들어서니 해두산이 아까 싸웠던 그 남학생들을 혼내고 있다. 늘 허공에 회초리를 휘두르며 다니는 재밌는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는데, 정색하고 혼내고 있으니 오랜 교사생활의 무게를 느낀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정태가 끼어 있다.

지윤이 다가가자 그녀를 알아본 해두산이 고개 숙인 두 남학생의 고개를 누른다.

"빌어 임마들아. 예 선생님 다쳤으면 어쩔 뻔 했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둘을 보자 지윤은 무언가가 치밀어서 잠깐 말을 삼키고, 해두산을 본다. 후, 하고 숨을 고르곤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정태는 왜 여기에……."

"좋은 제자 두셨습니다."

"네?"

"감히 담임 선생님을 위험에 처하게 한 이 놈들을 참지 못하고, 이 박정태 이놈 이게 이 둘을 좀 혼냈답니다. 물론 주먹으로, 그래서 이 교사로서 당연히 벌해야 하지만 또, 같은 사나이로서, 크…… 차마…… 그래서 이놈은 그냥 예 선생님께 맡기겠습니다."

지윤이 쳐다보자 정태가 딴청을 피웠다.

정태를 데리고 가 주의를 주고, 다시 수업을 시작하고, 몇몇을 불러 진로를 상담하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무엇인가 멍하다.

지윤은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가만히 앉았다.

나른한 가운데, 심장이 뛰는 것 같다.

심장 고동소리를 세다가, 곧 수를 놓친다. 지윤은 휴대폰을 들어 연락처를 확인한다. 수많은 이름들을 밀어 올리다가, 이윽고 이수현, 을 발견하고 멈춘다. 병원은 갔을지, 혼자 살 텐데 밥은 챙겨 먹었을지, 온갖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그리고 다시, 녀석의 웃는 얼굴. 지윤은 마지막까지 통화 버튼은 누르지 못한다.

갑자기 왜 이리 녀석이 어려울까.

문득, 화면이 뒤바뀌며 수신전화를 표시한다. 영진의 전화다. 지윤이 버튼을 눌렀다.

응. 나야. 별 일은 없었어. 애들이 싸웠는데, 뭐, 그냥 그래. 그리고.

영진과 늘 하던 이야기를 한다. 늘 하던 이야기들은 늘 하던 거라 이미 잘 알면서도, 그냥 목소리를 나누는 것으로 위로가 된다.

지윤이 말했다.

……자기 우리 집에 올래?

영진이 기쁘게 대답한다.

지윤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멍하게 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엇인가 멍하다. 이게 오늘 낮의 일 때문인지, 조퇴하고 연락도 없는 제자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도 인식 못한 무언가가 어긋나 마음이 불편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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