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79화 (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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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테레제를 위하여

오늘 저녁이나 먹을까?

라고 연락이 왔다. 지윤은 한숨을 픽 내면서 일어나려던 몸을 다시 의자에 앉혔다. 동료 선생들도 하나하나 퇴근하고 있었다. 그녀는 책상을 톡톡 치면서, 날아온 카톡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미 봐버렸으니, 상대도 그걸 안다. 지윤이 문자 입력창을 열었다.

"선생님 퇴근 안하세요?"

뒷자리의 동료 교사가 묻자 지윤이 뒤돌아 웃었다.

"예. 이제 가려구요."

"차를 안가져왔는데 전에처럼 좀 태워주시면 안될까?"

"아…… 죄송해요. 저 약속이 있어서 다른 방향으로 가요."

"약속? 남자친구?"

"아, 예. 뭐."

은근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그녀가 퇴근하는 걸 보고서, 지윤이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를 거절하면서, 대답하지도 않은 이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어버렸다. 둘 다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싫어서, 결국 그에게 대답하며 모두 사실로 만들기로 했다.

응. 어디서?

전에 만난 곳. 괜찮았잖아.

그녀가 뜸을 들이다 대답한 데 비해 답장은 순식간이었다. 지윤이 손을 놀렸다.

그렇게 해.

일곱 시에 만나자.

응. 나중에 봐.

예지윤은 그 메시지를 날리고선 곧바로 카톡을 꺼버렸다. 알림창이 뜨며 다시 대답한 것 같지만 확인하진 않았다.

일 년 전 소개를 받아, 사귀기 시작한 사이였다. 같은 교사였다. 딱히 근사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나이가 되면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 적당히 너그럽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다들 지윤이 아깝다고, 그가 행운아라고 했지만, 그간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다. 너무 예쁜 꽃은 사람들이 지레 포기하고는 한다.

지윤이 코트를 걸치고 일어났다. 대충 코트를 걸치고 일어나서 무심하게 휴대폰을 확인하는 그 모습이, 우연히 파파라치에게 일상을 찍힌 외국 모델의 일상을 연상시킨다. 예지윤은 백을 어깨에 매고 그냥 가려다가, 다시 뒤돌아 책상에 쌓인 설문지를 챙겼다.

약속 장소는 학교에서 머지 않은 번화가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차를 주차장에 대면서 그의 차를 확인했다. 먼저 들어간 모양이다.

그녀가 들어서자 저 안에서 그가 손을 흔들었다. 혼자 앉은 그의 주위로 연인들, 가족들이 웃고 속삭이고 있다. 그녀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뭐 먹을래?"

"응…… 자기는?"

그의 이름은 안영진이었다. 조금 떨어진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이거 시키고. 이거랑, 자기는 이거 좋아하잖아. 이렇게 시키자."

지나치게 깍듯한 종업원이 주문을 받아서 돌아갔다.

"잘 지냈어?"

"응. 늘 똑같지 뭐. 자기는 요새 동아리 대회 한다며. 잘 돼?"

"준비는 하는데 애들이 별로 열의가 없어. 지네 성적 관리하기 바쁘다니까. 삭막해 삭막해."

"요새 애들은 빡빡하니까 이해해야지."

"그래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뭔가 남기고 싶은 마음도 없나? 약간 한심하다고."

"……."

지윤이 잠깐 휴대폰을 확인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자긴 고등학교 때 뭐 했나봐?"

"나? 나는…… 뭐 신나게 놀았지."

영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화가 잠시 끊기고는, 둘이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한다. 지윤이 먼저 휴대폰을 백에 넣고는 턱을 괴었다.

"빵 안주니까 심심하다."

"그러게."

지윤이 흘긋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둘의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는 연인이 보였다. 낯익은 윤곽에 지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학교 교복이다.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는 희고 단정한 얼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킥킥거리고 있었다. 지윤은 순간 눈을 내리깔았지만, 그들의 발끝은 둘의 테이블을 향하고 있었다. 지윤은 빨라지는 심장 고동을 느끼면서, 천천히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어, 선생님?"

"어라."

수현과 소희가, 지윤을 발견하고서 멈춰섰다. 지윤은 미소를 만들며 인사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이런 데서 뵙네요."

수현과 소희가 꾸벅 인사했다.

지윤 맞은 편의 영진이 고개를 뒤돌렸다. 그가 둘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가만히 쳐다본다. 영진을 발견한 수현과 소희가 멈칫했다.

"인사해. 이쪽은……."

지윤이 말끝을 흐리자, 소희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샘 남자친구세요?"

"아…… 응…… 그렇지."

"아항∼"

영진을 바라보며 소희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 미소지었다. 소희는 영진을 위아래로 훑으면서 생글거렸는데, 그 의뭉스러운 표정 때문에 지윤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수현이 옆에서 소희의 뒷목을 붙잡고 재빨리 인사시켰다. 둘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예지윤 선생님 제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반갑다."

지윤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영진에게 인사한 수현의 눈동자가 다시금 자신을 향하자 가슴이 뛰었다. 그의 눈동자를 읽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의 까만 눈동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저 예의 바르게 웃을 뿐이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저희는 가볼게요."

"응. 데이트 재밌게 해."

"안녕히계세요∼"

수현이 걸어가자 소희가 수현의 팔짱을 끼며 지윤에게 인사했다. 소희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마음은 명확하게 지윤에게 닿았다.

선생님 남자친구에요?

이 사람이?

지윤이 고개를 든다. 영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지윤의 등 뒤로 사라진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진이 말했다.

"쟤네 공부 못하지."

"……뭐?"

"고등학생이 연애질하는 거 보면 뻔하지. 자기 학교 참 편하다. 우리 학교였으면 쟤넨 일단 나한테부터 죽었어."

소희의, 그 웃는 눈이 자신을 향했을 때 느낀 거북함은 무게를 더해갔다. 지윤은 막연하게 불편하던 그 감정의 이름을 지금 깨닫는다.

부끄러움.

지윤은 대꾸할 말이 없어서 잠깐 입을 다물었다.

"요새 애들 이런 데도 와?"

"……여기가 왜? 다들 오는 데잖아."

"애들 연애한다고 이런 데 다니면 부모 등골 휘겠다."

"돈 있으니까 오겠지. 그리고 쟤들 공부 할만큼 해."

지윤의 뾰족한 대답에 크흠, 하고 영진이 헛기침했다.

식사가 나왔다. 둘은 조용히 식사하다가, 영진이 몇 마디를 걸었다. 둘은 다시 학교 생활, 근황 같은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간만에 차려서 먹는 외식이라 맛은 나쁘지 않았다. 이따금 영진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 너머를 향하는 것을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잘 먹었다. 일어날까?"

"응."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친다. 영진이 계산했다.

"지윤아. 오랜만이 한 잔 할래?"

"술?"

레스토랑을 나오자마자 들이치는 싸늘한 바람에 지윤이 옷깃을 올렸다.

"음…… 적당히면 괜찮아. 술은 내가 살게."

"저녁은 근사한 데서 먹었으니까 이번엔 좀 거친 곳으로 가볼까?"

"왜. 전에 자기 말한 껍데기집?"

"응. 연탄불 지피고 되게 오래된 집."

영진이 소주를 꺾으며 크으, 하는 흉내를 내자 지윤이 픽 웃었다.

"차는 어떡해? 둘 다 가져왔잖아."

"어. 우리 집 가까우니까 내가 두고 오지 뭐."

"그럴래?"

둘이 입구에서 이야기하는 사이, 문이 열리면서 소년과 소녀가 나왔다. 길 가다가 마주치면 뒤돌아 다시 확인해도 이상하지 않을 예쁘장한 소년과 소녀, 수현과 소희였다. 둘도 마침 식사를 끝냈는지 함께 걸어나오고 있었다. 둘이 지윤과 영진을 발견하고서 잠깐 멈칫했다.

"맛있게 먹었니?"

코트 깃을 올린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지윤이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

"예."

"선생님 밖에서 뵈니까 모델 같아요."

소희가 듣기 좋은 말을 했다. 지윤은 그 뜻을 이해하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영진을 확인하고서 승리에 만족한 여자의 자비 섞인 겉치례였다. 고작 어린 제자의 얕고 하찮은, 어리디 어린 생각일진대, 내심으로는 짜증나는 자신이, 더 짜증난다.

영진이 둘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뭐라고 할 것 같아 지윤이 서둘러 작별하려는데, 소희가 수현에게 무얼 속삭였다. 수현의 반대편 뺨을 감싸고 자신에게로 고개를 끌어내려 귓불에 입술 닿을 듯 가까이서 소곤거리는 모습에, 영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 예지윤 선생님 반이야?"

"네."

"너희 이렇게 맘대로 교복 고치고 그래도 되냐?"

그가 소희의 허벅지께에서 멎은 치맛자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복이 스타킹 신은 가는 다리를 타이트하게 감싸고 있었다.

"네?"

일순 굳은 소희의 눈이 순간 지윤을 향했다.

"자기……."

"여기 지윤샘이 너희 편하게 해주려는 거 같은데, 그럼 스스로 자중하고 그래야지, 맘대로 이렇게 연애질하고 밤까지 놀러다니고, 너희 대학 갈 생각은 있냐?"

지윤이 영진의 옷자락을 잡았다. 소희와 수현의 시선이 혹시나 자신을 향할까봐 그들에게서 몸을 돌린다.

"자기 뭐하는 거야, 지금?"

"잠깐만 나한테 맡겨봐. 니네 다 내가 너희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알겠냐? 우리 학교였으면 말로 안끝나. 특히 너. 넌 내가 교복 다 찢었어. 너 이름이……."

소희의 열린 외투 사이, 넥타이 위에 매달려있는 학생증 목걸이를 향해 영진이 손을 뻗었다. 가슴께로 다가온 손길에 소희가 순간 수현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가 억지로 학생증을 빼내려 그녀의 품으로 손을 넣으려하자, 수현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영진이 어이 없다는 듯 웃었다.

"허허. 내가 뭐 나쁜짓 하냐?"

"이름은 직접 물어보세요. 손 쓰지 말고."

"이 자식이……."

"지금 뭐하냐고."

지윤이 영진의 어깨를 홱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그녀의 강한 반응에 영진이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그냥 끝내자. 들어가."

"야……."

"얘기하기 싫어."

영진이 한숨을 쉬고는, 자기 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예지윤이 둘을 향해 말했다.

"얘들아 미안해."

"아니에요."

"……."

소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안했다. 입술을 깨물고 삐친 모양새다.

"나도 가볼게. 소희야. 미안하고, 마음 풀고 재밌게 놀아."

그리고 지윤도 둘을 떠났다. 차 시동을 걸면서, 백미러에 소희가 수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는 게 비쳤다. 지윤이 애써 외면하며 액셀을 밟았다.

도로가 한산해서 차가 제법 시원하게 달렸다. 가로등들이 빠르게 뒤로 지나쳐가는 속도감을 느끼며 치미는 짜증을 풀어내려고 애썼다.

오피스텔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대형마트를 들러 술을 샀다.

쇼파에 앉아 티비를 틀고는 맥주를 계속해서 마셨다. 간만에 마신 술에 취기가 돌아 혼곤하다. 지윤은 희미한 정신으로, 침대를 가려다가 문득 자신의 백을 열었다. 그녀의 반 학생들의 장래희망 조사서가 한 뭉치 있었다. 그녀는 그걸 들고 휘리릭 넘겨본다.

그러다가 문득, 종이 하나가 떨어졌다. 지윤은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캔에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키고는 그걸 주워 읽었다.

박서은.

장래희망. 대기업 취직.

지윤이 픽 웃었다. 무엇인가 쓰고 지운 흔적은 취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지윤은 그 종이를 휙 던지고는, 쇼파에 기댄다.

"꿈이 없어. 꿈이……."

중얼거리다가는, 조용히 잠들어, 소곤거리는 숨소리만 난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예전 연재분을 따라잡았습니다...

기념으로 설문란에서 캐릭터 인기투표를 실시합니당 참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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