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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테레제를 위하여
"예 선생님 미안해요. 좀 부탁해요- 나 수업이 있어서."
지윤은 문제집 박스를 내려다보며 허리를 짚었다. 나이 많은 여교사는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며 교실로 종종 뛰어갔다.
몸을 숙여 모퉁이를 붙잡아보니 육중하다. 허리에 힘을 줘 잠깐 들려다가 포기하고 놓았다. 막 수업을 시작한 때라 복도를 지나는 남학생도 없다. 다른 사람을 부를까, 하고 한숨을 쉬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샘 뭐해요. 들어드려요?"
뒤돌아보자, 수현이 서 있었다. 체육복 차림이었다. 회색 면에 남색으로 선이 들어간 평범한 디자인인데, 져지 타입의 상의를 열어 검은 티셔츠를 내놓으니 사복 같아서 지윤은 기분이 묘해졌다.
"넌 뭐하니?"
"저희 반 자율체육이라 축구해요. 전 화장실 왔다가 샘 보여서요. 옮기세요 이거?"
"무거워서 너 혼자 못들어."
"저 힘 센데."
지윤이 한 번 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수현이 번쩍 들었다. 지윤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 이수현. 보기완 다르네?"
"왜요. 저 그냥 봐도 센데."
"별-로. 교무실로 가자."
둘은 학생이 없어 고요한 복도를 함께 걸었다. 지윤은 새삼 곁에 선 수현을 쳐다보았다. 호리호리하고 곱상해서 그저 약골 이미지였는데, 녀석도 남자이긴 했다. 그녀로서는 잠깐 들기도 벅찼는데. 수현의 팔에서 무게를 지탱하느라 긴장한 근육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예전에 다른 아이와 싸운 적도 있었지. 좀 다른 모습을 본 것 같다.
수현의 옆 얼굴선이 섬세하다. 참 잘생기긴 했어. 하고 생각하는데, 문득 눈 돌리는 수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요. 잘생겼어요?"
"너 억지로 힘 쓰느라 얼굴 일그러지나 관찰중이다."
"에이. 이게 뭐가 힘들어요. 샘이 여자라서 그렇죠."
여자는 힘이 약하다. 남자는 힘이 세다. 당연하긴 한데,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그 경계가 약간 허물어지는 기분이다. 기어오른다고 좀 혼내야 할까. 예지윤은 고민하면서 걸었다.
계단을 오르자 교무실 팻말이 보였다. 교무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자가 책과 회초리를 허리에 끼고 나오다가 둘을 발견했다.
"어쿠, 이수현이. 왠일로 이 모범적인 행실이냐."
국사 과목을 담당하는 해두산. 수현을 복도에 벌을 세워 정글에 휘말리게 한 장본인이기도 한 일명 헤드샷이다. 그의 회초리는 실수 없이 머리를 저격한다.
"이야- 예샘, 이수현이. 미남미녀 사제지간 보기 좋네. 껄껄!"
수현이 웃었고 예지윤이 대꾸했다.
"선생님은 빨리 수업이나 가세요. 맨날 수업 지각하시고."
"아이고. 갑니다갑니다. 껄껄! 이수현 너 또 자면 죽는다. 예샘 그놈 좀 혼내주세요. 맨날 잠만 잔다니깐."
예지윤이 수현을 찌릿 쳐다봤다. 수현은 짐이 무겁다며 딴청을 부렸다.
교무실로 들어가, 구석에 박스를 놓았다.
"수고했어. 음료수 하나 줄게."
"고맙습니다."
지윤이 냉장고에서 매실음료를 하나 꺼냈다. 수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딴 거……."
"닥치고 먹어."
"잘 마시겠습니다."
수현이 매실음료를 열었다.
"저거 뭐에요?"
"문제집 같은 거. 출판사에서 가끔 보내줘. 쓰면서 광고하라고. 하나 줘?"
"전 교과서로 충분해요."
"성적 더 떨어지면 죽는다."
"에이. 인생은 원래 굴곡진 법이잖아요."
"입만 살아서는."
예지윤이 자리에 앉아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섹시하다. 수현은 소설에나 나올 법한 미모의 여교사가 담임이라는 것에 감사하며 그녀의 책상을 쳐다보았다.
깨끗했다. 메모도 정해진 구간에 두어개 붙었을 뿐, 잡다한 짐 자체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 바로 옆에 책 하나가 보였다. 발레의 기초이론과 실기, 책은 덮혔지만 책갈피가 비져나와 있었다.
"선생님 발레하세요?"
"응?"
갑작스런 질문에 수현을 쳐다보았다가, 수현의 시선 끝에서 책을 발견하고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했어."
"샘이요? 보고 싶다."
"……너 이제 갈 때 안됐니?"
"자율체육이라 괜찮아요."
"내가 안괜찮거든? 이제 가."
"우와. 제자 쫓아내신다. 심해."
도망치는 듯 뒷걸음치더니 수현이 안녕히계세요, 하고 꾸벅 고개숙였다.
"그래. 짐 들어줘서 고마워."
수현이 뒤돌아 나가자, 지윤은 책상 위에 늘어져 턱을 괴었다. 교무실을 나가는 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보고 싶다고? 지윤은 책을 펼쳐 좌라락 흘렸다. 발레복과 발레슈즈, 한때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산다. 후회하고 있나. 지윤은 책상 유리판 아래에 놓은 반 아이들의 단체사진을 흘끗 보았다. 그 안에서 수현을 찾았다. 나쁘지 않다. 이따금 후회할지언정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서은이 현관문을 열었다.
늘 맡는, 집의 싸한 냄새가 났다. 아래로 그녀의 신발 곁에는 흐트러진 슬리퍼만 널부러져 있다. 낡은 시계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발을 벗고 차가운 마루 바닥을 밟았다.
불을 켜도 집은 적막하다. 서은은 자신의 방에 가방을 내던지고, 쇼파에 눌러 앉았다. 리모콘으로 티비를 키자, 화면이 지직거리더니 흐릿하게 영상을 비추었다. 오락프로, 때 이른 뉴스, 재방송들을 하나하나 넘겼다. 화면의 일부가 일그러져 잘 보이지가 않는다. 서은은 아무 채널이나 틀어놓고는 교복을 벗었다.
집의 싸늘한 공기도, 갓 쐰 바깥 바람에 비하니 견딜만하다. 그녀는 스타킹을 벗다가 말고, 문득 팬티 위를 슬쩍 문질러보았다. 묘한 기분. 그녀는 에휴, 한숨 쉬고는 일어나 속옷을 남기고 벗었다. 츄리닝을 입으려는 참이었다.
폰이 진동했다. 들여다보니 카톡 하나, 수현에게서 왔다. 시답잖은 말이다. 뭐하냐니. 서은은 수현의 가만히 액정을 들여다보다가, 수현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금발벽안의 화려한 미모를 가진 여성과, 연예인처럼 고혹적인 흑발의 여인 둘이 함께 걷는 사진이었다. 몸매가 모델처럼 늘씬하다. 배경은 해외의 해안가로, 바다가 에메랄드 빛이었다. 녀석도 남자라고 어디 화보 사진이라도 가져왔나보다. 서은은 픽 웃다가, 다른 사진 중에 소희의 모습이 있는 걸 보았다.
짧다란 교복 치마를 허벅지에 두르고, 상체엔 빨간 봄버를 입은 채 맥도날도 콜라를 빨대로 빨면서 멍하니 서 있는 사진이었다. 치마 아래로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가느다랗다. 수현을 기다리는 모습을 몰래 찍은 모양이다. 예쁘장한 옆모습을 보면서, 문득 서은은 벽에 걸린 거울로 스스로를 쳐다보았다.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자신이 보였다. 늘씬하고, 이정도면 예쁘다. 소희만큼? 글세. 서은은 휴대폰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소희의 카톡프로필을 확인했다. 온통 수현이다. 둘이 어딜 그렇게 놀러 다녔는지, 배경도 가지각색이었다.
놀러 다녔다니, 재미있었겠네. 서은은 츄리닝을 입고 책상에 앉았다. 참고서 하나를 빼어내어 펼쳤다가, 다시 덮었다. 어둑한 방에서 스탠드 불빛이 흐릿하다. 그녀가 서랍에서 노트 하나를 꺼내었다. 엉망으로 휘갈긴 글씨들 사이에는 이따금 따옴표들, 말줄임표들이 찍혔다. 그녀는 자신이 쓴 글을 훑다가, 글자가 멎은 지점에 다시 연필을 댄다.
흔해빠진 환상에 관한 소설이었다.
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일이 많아서 늦겠다고 한다. 저녁 잘 챙겨 먹어. 응 알았어. 그런 대화였다. 서은은 폰을 껐다. 다시, 눈을 여백에 둔다.
잘 썼다거나, 재미있다거나 하는 것은 모르겠다. 그냥 글을 썼다. 그녀가 본 글 속에서, 사람들은 꿈을 꾸고 전율하고 때로는 세상의 구원을 도모하고, 혹은 끔찍한 살인범을 추적하고 세상의 끝에 서는데 그녀가 아는 현실은, 좁은 거실에서 밤까지 돌아가는 티비와, 퇴근 후에 그걸 잠들기까지 지켜보는 어머니, 창밖에서 취객이 소리치고 고성방가하는 세계였다. 글로써 그녀는 작은 방을 잊는다.
무얼 덧붙이지 못하고 노트를 덮었다.
다시 참고서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 목표처럼 써놓은 대학들의 목록이 있었다. 저 어딘가에 도달하고 나면, 그 후에는 토익 참고서에 목표처럼 대기업의 이름들을 늘어놓겠지. 서은은 자신의 성적을 생각하면서, 그 중간보다 조금 위쪽의 대학에 점을 콕콕 찍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올려서, 최상위보다 몇 칸 낮은 곳에 줄을 그었다.
그래, 이 대학에 간 사람이 과외비를 제법 받는 것을 보았다.
참고서를 풀어야하는데 기분이 안났다. 서은은 참고서에 엎드려서, 이해 안가는 문제 하나를 붙잡고 펜을 돌리며 공상하다가 잠이 들었다.
얕은 잠은 몇 가지 이미지와 맥락 없는 영상들이다. 그 속에서 표류하다가 문득 눈을 뜨니, 어머니가 곁에 서 있었다.
"딸. 피곤하면 누워서 자. 씻었지?"
"아. 응. 엄마 오셨어요."
서은이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열시를 넘었다. 제법 잤다. 밤에 잠도 안올텐데 새벽까지 공부해야겠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부엌에서 물을 마셨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실의 어머니를 보았다. 편한 복장으로 쇼파에 쪼그리고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오락프로의 거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손가락에 댄 대일밴드가 눈에 띈다.
서은도 어머니 곁에 잠시 서서 무얼 하나 보았다.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여전히, 티비의 한 귀퉁이는 일그러져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자막의 끄트머리 글자는 짐작으로만 알 수가 있다.
서은은 저 들어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낮의 기억을 떠올렸다.
담임이 장래희망에 관한 설문지를 내놓았다.
장래희망. 희망대학 희망학과.
수현이 잠든 시간에, 고민하다가 그녀는 펜을 들었다. 볼펜 아닌 샤프였다. 그녀는 남들이 엎드리거나 나간 한산한 점심시간의 교실에서,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 천천히 쓴다.
소설가.
A대 문예창작학과.
써놓고서 그 단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녀는 픽 웃으며 다시 지우개로 지운다.
그리고서 썼다.
대기업 취직.
K대 경영학과.
K대 경제학과.
M대 경영학과.
그리고서는 반장의 자리로 가서, 반장의 책상 위에 쌓인 설문지 사이에 슬쩍 끼워넣는다.
그랬었다.
서은은 낮게 웃으면서 눈을 떴다. 으샤, 하고 어깨를 풀고는 참고서를 열었다. 갑자기 스탠드 전등 하나가 빛이 바래 깜빡였다. 어둑하다. 그녀는 한숨 쉬면서 스탠드를 끄고 형광등을 켰다. 좀 어수선하지만 괜찮다. 서은이 미소지었다.
참고서를 열어 공백에 새로 써넣는다.
가자, K대 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