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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테레제를 위하여
여름방학을 즐긴 게 어제 같은데, 어느새 겨울방학이 코앞이었다.
시간은 기다리는 법이 없다. 수현은 문득 이는 감상에 웃으며 다 탄 담뱃대를 떨어뜨렸다. 니코틴도 타르도 짐승의 핏줄에서 스러져버린다. 발코니에서 혼자 담배 태우는 정하와 함께 하려고 처음 입에 물었는데, 폐에 치닫는 불순물의 저항감이 제법 알싸해서 이따금 즐긴다. 어느새 포식하는 짐승이 되어버린 소년의 감수성은 이런 것들에 위로받는다.
"주인은 사춘기인가?"
목소리는 여리고, 말투는 고고하다. 직접 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인형 같은 외모의 소녀였다. 이브린은 투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로 수현을 올려다보며 허공에 손짓했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가 사라진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녀는 어깨가 드러나는 얇은 원피스 차림이다. 수현은 손을 뻗어 이브린의 뺨을 주욱 꼬집었다. 이브린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수현은 한 번 웃고는 걸친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난 추위를 느끼지 않느니라."
"알아. 그냥 보기 추워서."
"오호. 감상적인 친절도 베풀고. 주인은 정녕 사춘기인가."
"왜 자꾸 사춘기 타령이야?"
"고등학생이 담배를 배운다면 곧 사춘기라고 했느니라."
예브게냐다. 그녀는 수현이 정하를 따라 담배 피우는 걸 몹시 싫어했다. 정하는 또 신나서는 예브게냐 면전에 연기를 뿜어내며 도발하다가 결국 둘 특유의 개싸움을 벌였고 이브린이 둘을 제압해서 방에 묶어버린 전과가 있다. 예브게냐는 자의식 과잉의 사춘기 꼬마들이나 하는 저질스러운 행동이라며 투덜거렸다.
"나 사춘기면 어떡하지?"
"내가 어찌 알겠느냐."
"그래도 한참 연장자로서……."
"잊었느냐. 나는 위대한 드래곤. 한숨보다 짧은 인간의 유년을 위한 지혜따위 없느니라."
이브린이 팔짱을 끼며 선언하자, 수현이 흥, 하고는 그녀를 안아올렸다. 수현에게 안겨 허공에 들린 이브린이 다리를 살짝 버둥거리다가, 수현의 허리에 다리를 감는다.
"경배의 키스라도 할 셈이냐?"
"아니. 얄미운 꼬마한텐 벌이지."
"내가 꼬마라니, 흣."
수현이 이브린의 뺨에 키스하는 척하다가, 그녀의 귀를 깨물어버렸다. 송곳니는 감춘다. 이브린은 살짝 자지러지며 허리를 흔들었다. 그녀가 다리로 수현의 허리를 꼬옥 감았다.
좀 아프게 깨물었다가, 마음이 약해져서 이를 떼고 뺨에 키스해줬다. 이브린은 양팔도 수현의 목을 감아 자세를 안정시키고는, 살짝 풀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여튼, 나 외에도 이 집에는 아직 청소년인 주인을 위한 적절한 조언자는 없느니라."
"그렇지."
청소년을 위한 상담과는 거리가 먼 성격 더러운 누님 둘, 오히려 상담이 필요한 소녀 하나, 그리고 하나는 아예 드래곤이다. 이브린은 수현의 입속으로 손가락을 밀어넣어서 수현의 타액을 손 끝에 묻히고, 다시 자신의 입으로 물었다.
"뭐해?"
"담배를 피우는 것과 비슷한 기호행위니라."
"……그게 대체 어떤 점에서."
이브린이 손가락으로 수현의 입술을 비집고 그 틈을 열며 말했다.
"중독이라는 것."
이럴 때 수현은 이브린이 외모만 소녀이지, 최연장자라는 걸 실감한다. 성경험이라곤 없던 그녀는 이렇게 태연하게 수현을 유혹할 줄 알았다. 수현은 이브린과 키스했다. 둘의 혀가 얽혔다.
한참을 키스하고는 둘의 입술이 떨어졌다. 이브린은 입술에 남은 수현의 잔향을 혀로 쓸며 말했다.
"흐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집 말고 바깥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란 것이니라. 학교를 다니지 않느냐. 선생이란 이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이다."
"나 그렇게 이상해?"
"평소보다 잡념이 많은 것 모두 느끼니라."
"그런가."
수현은 이브린을 안고 침실로 걸어가며 말했다.
"사춘기엔 성욕도 충만하지."
수현은 아까 키스할 때부터, 허리를 감아 아랫배에 밀착된 이브린의 음부에서부터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
*
행복하니?
거울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예스. 하고 웃어보았다. 비치는 얼굴은 샐쭉하게 웃고 있는데, 안은 가라앉아 있어서, 사람 거죽이란 얼마나 작위적인지. 예지윤이 힘을 풀자, 얼굴은 다시 시무룩 가라앉는다.
양뺨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다. 찬 손의 한기가 뺨을 식혔다. 얼굴을 찡그리며 근육을 풀고, 한층 느슨해진 얼굴로 다시 웃었다. 좋아. 수도를 틀어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으면서 표정을 굳혔다. 아이들 얼굴 보기도 전에 처지지 말자. 예지윤.
하아, 한숨을 쉬면서 자기 눈을 들여다보고는, 몸을 돌려 여교사용 화장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지나던 아이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지윤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화답하고 복도를 걸었다. 훤칠한 키에, 모델처럼 비율 좋은 몸매, 세련된 패션 감각을 가진 화려한 미모의 여교사 예지윤이 그녀다. 모두가 동경하는 선생님, 그게 자신이라고 되뇌며 예지윤은 손에 든 교과서와 회초리를 다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인사하는 학생들들에게 웃어주었다.
문득 그녀는 무용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용실, 이라고 적힌 팻말을 쳐다보면서 멈추었다가, 간유리로 된 복도창을 열어보았다.
눈에 들어온 것은, 떨어지는 아침 햇살을 받은 가느다란 목선이었다. 머리를 틀어올린 소녀가 발끝을 세워 소리 없이 돌다가, 다시 한쪽 발끝을 뻗으며 멈추었다. 팔을 그러모으며 몸을 뻗어 허공으로 뛰었던 그녀는 사뿐히 착지해서 다시 한 바퀴 돌았다. 일련의 동작은 고요해서 소리가 없다.
예지윤은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그녀의 몸짓을 감상한다. 소녀는 문득 창가의 관객을 발견하고서 동작을 멈추었다.
"쌤?"
"시간 다 됐다. 정리하자."
그녀는 몸을 돌려 시계를 보더니, 앗, 하고 놀라며 예지윤을 쳐다보았다.
"와, 전혀 몰랐네. 샘 저 집중력 쩔어요. 완전 재능 있나봐."
"그냥 나사가 빠진 거야."
"에이, 내기하실래요? 저 이번 콩쿨에서 상 받으면 매점에서 빵 사줘요."
"아니지. 너 상 받으면 니가 사줘야지.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고."
"어. 그런가?"
"빨리 옷 갈아입고 들어가."
네, 하는 대답소리를 들으며 예지윤은 유리를 닫았다. 방금 본 동작을 생각한다. 멋진 피루엣 앙 드오르(Pirouette end dehors)였다. 자신도 저렇게 했던가. 문득 발끝을 세워보았다. 예전에는 깃털처럼 발 끝에 올라섰는데, 지금은 힘이 들었다. 종소리가 울린다. 예지윤은 채 끝내지 못한 과거의 상념에 잠겨 멍하니 교실을 향했다.
교실문을 열었다. 학생들이 후다닥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예지윤은 교탁을 향해 걸었다. 앞자리 남자애의 시선이 자기 하체를 훑는 것을 느꼈다. 혈기왕성할 때다. 그녀는 교실에 출석부와 프린트, 회초리를 탕, 놓으면서 말했다.
"주말 잘 놀았니?"
"예∼."
"그래. 니네는 아직 놀아도 돼. 대신 내년부터 죽은듯이 공부해야지."
교실에 탄식이 번졌다. 예지윤이 말했다.
"설문지 나눠줄 거거든…… 음…… 잘 써서 오늘 종례…… 아니다, 나중에 내 수업시간까지 다 쓰고 반장이 걷어줄래?"
"예."
"진로에 관한 거니까 진지하게 써라. 장래희망 로또당첨 이런 거 쓰면 죽어. 작년에 나한테 그렇게 낸 애는 로또 당첨확률 손으로 계산해오고 자릿수만큼 맞았다."
"연금복권은요?"
"와. 진짜 재미 없다. 정태야 걔 한 대 때려."
정태가 앞자리 남자애의 뒤통수에 중지를 딱 튀겨 맞추었다. 녀석이 머리를 감싸쥐자 모두 킥킥거렸다. 예지윤이 픽 웃었다.
"그리고 우리 수현이. 아니지, 꼬쿨이?"
"푸하하핫!"
여자애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음지의 별명을 거론하자 다들 폭소했다. 오글거린다며 사지를 붙잡고 몸을 비튼다. 수현이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숙였다. 뜻을 모르던 아이들도 전해듣고는 웃어댔다.
"모 여학교 선생님이 나한테 운무고 꼬쿨이가 누구냐고 묻더라. 수현이 완전 유명인이네. 소희야 관리 잘해."
수현이 이마를 짚었다. 소희도 옆자리 여자애 어깨에 이마를 대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지윤이 수현의 자리로 걸어와, 고개 숙인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해. 장해. 학교의 위상을 살렸어."
수현이 부끄러워하며 예지윤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자, 그녀가 수현의 뺨을 툭 치고는 다시 교탁으로 걸어와 회초리와 출석부를 들었다.
"자. 오늘도 기분 좋게 시작하자. 나중에 봐."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 교실밖으로 나갔다. 예지윤이 자리를 뜨자 다시 교실이 시끄러워졌다.
"야, 꼬쿨이!"
"쿨한 꽃미남!"
"닥쳐 미친놈들아."
수현이 인상을 써도 계속해서 놀려댔다. 수현이 문득 옆을 쳐다보니 박서은이 엎드려 있었다. 몸을 부르르 떠는 게 어디 안좋아보인다.
"야, 어디 아프냐?"
"수…… 숨……."
서은이 고개를 들자 수현의 인상이 구겨졌다. 서은은 너무 웃어서 숨을 못쉬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웃음이 멎지 않는지 끅끅대며 몸을 떨었다.
"꼬쿨이…… 크큭, 내 짝 꼬쿨아…… 꺄흐흣……."
"돌았구나."
"꼬쿠……."
"뒤질래?"
수현이 서은의 목을 휘감아 헤드락을 걸었다. 소희의 매운 눈길이 느껴지지만 수현은 눈앞의 여자애와 시시덕거렸다.
"하, 항복……."
"순순히 그럴 것이지."
수현이 팔을 풀자 서은이 몸을 빼면서 말했다.
"꼬쿨아 폭력은 아웃!"
"야."
"푸풉!"
그러는 사이 지윤이 남긴 설문지가 수현의 책상에 올랐다. 수현은 서은과 자신의 것을 빼어 뒤로 넘기면서 훑는다. 장래희망, 지망대학과 지망학과. 후자에는 칸이 셋에다 순위가 매겨진다. 수현은 어떤 무난한 걸로 공백을 매우나 생각하면서 서은에게 한 장 건냈다. 그녀가 문항을 확인하고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 표정이 꽤 귀여워서 수현이 손가락을 튕겨 그녀의 입술을 살짝 때렸다.
"모야."
서은이 입술을 내민 그대로 수현을 째려보며 말했다.
수현은 약간의 타액이 느껴지는 손끝을 자기 입술에 갖다댔다.
"간접키스."
"죽을래?"
"왜. 첫키스였냐? 유감이다 야. 내가 뺏어가서."
서은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수현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첫키스 아-닌-데."
수현이 홱 고개를 돌렸다.
"뭐? 그럼 누군데."
"니가 알아서 뭐하게, 바보야."
"우린 베프잖아. 비밀을 만들다니 배신자야."
"배신자는 너지."
"내가 뭘?"
서은이 못마땅한 듯 얼굴을 기울이며 수현을 쳐다보았다. 수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내밀어 결백의 제스쳐를 취하자, 서은이 볼펜을 들어 자신에게 내보인 손바닥을 찍었다.
"아야."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소희랑 사겼잖아."
"어……?"
서은이 찌릿, 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수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설문지를 내려다보았다. 현상유지라고 쓰려다가 말았다.
서은은 볼펜으로 턱끝을 찌르며 항목을 들여다보았다. 장래희망과 지망학과는 쉬이 연결되지가 않았다. 볼펜을 올리기에는 준비가 부족하다. 서은은 자신의 남은 생애를 생각하고, 그 여백을 그리다가 현재를 보았다. 모나미 볼펜을 빙글빙글 돌려갈 뿐 무엇도 써내리지 못한다. 그녀는 설문지를 책상 아래에 밀어넣었다.
"나 커서 뭐 될까?"
수현이 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음…… 하고 싶은 게 뭐지……."
"하고 싶은 거?"
서은이 픽 웃었다. 그녀가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해야하는 걸 쓰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