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76화 (76/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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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브락사스

어둠을 틈탄 그림자들이 창으로 새어든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찬란한 은발, 이브린이 손끝에 불을 올렸다. 그러자 폐허로 변한 사무실의 전경이 드러났다. 어슴푸레한 불빛과 늘어진 그림자들 사이에는 잡동사니들이 널부러져 있다. 값나가는 것들은 죄다 사라지고 이제 쓸모라고는 없는 서류들만 남았다. 이브린의 곁에 선 고혹적인 윤곽, 정하가 이를 갈았다.

"이게 뭐야?"

"떠난 것 같군."

"짜증나. 짜증나. 완전……."

정하의 악력에 책상이 부서지기 시작하자, 둘을 따르던 까마득한 칠흑, 그 속에서 나온 수현이 정하를 달랬다.

"누나, 진정해요. 그러니까 옙 누나 같아요."

"……."

책상이 완전히 부서졌다. 이내 정하가 평정을 찾는다.

"이브린. 책임 지고 찾아. 너가 그랬던 거잖아?"

"흥. 지난 과거 들추는 여자, 난 질색이더라."

이브린의 대답에 정하가 벙쪄서 돌아보았고, 수현이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했다.

"오오, 똑같아. 똑같애!"

"위대한 드래곤에게 성대모사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니라."

그간 아침이면 수현이 이브린을 무릎에 앉히고 드라마를 시청하더니 그들만의 무언가가 생긴 것 같다. 정하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쉰다.

이브린을 종속시킨 이후, 그들은 김상호를 추적했다. 수현과 이브린의 전투 중 사라진 김상호는 종적을 감추었고, 그의 삭풍 클랜도 활동을 멈추었다. 그들의 모든 자금이 일시에 증발했고 모든 것이 현금화되어 사라졌다. 예브게냐가 뒷조사에 능한 자들을 풀었으나, 김상호만은 오리무중이었다. 심지어 클랜원들은 그가 떠난 사실조차 몰랐다. 사라진 것은 둘이다. 김상호와, 모든 것을 관리하던 그의 그림자 초산.

김상호의 은신처, 삭풍 클랜 소유의 모든 부지를 뒤졌다. 김상호는 사라졌다.

"아직 한 군데 남았어요."

휴대폰을 확인한 수현이 말했다.

"남해의 섬에 김상호가 투자한 적이 있다네요."

"어디?"

수현이 휴대폰을 이브린에게 내밀었다. 좌표가 표시되어 있다. 이브린의 몸에서 붉은 마력이 피어오른다. 수현과 정하가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허공에 몇 개의 마법진이 떠오른다. 그들의 시야가 일변했다.

튕겨나가듯 공간을 꿰뚫는다. 공간의 틈을 비집고 나는 그들의 눈에 온갖 허무맹랑한 환상들이 펼쳐진다.

얼마나 날았을까, 이윽고 허공을 찢고 나오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밤하늘과 맞닿은 먼 바다의 수평선, 그 위를 떠도는 불 켠 배들이었다. 섬의 상공이다. 수현이 고개를 내리자, 나무들 사이로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창도 없는 회색이라 이곳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폐쇄적인 모양새다. 이브린의 뜻을 따라 그들의 고도가 차츰 낮아진다.

건물에 다가갈수록 무엇인가 낯선 기운이 느껴젔다.

농도 깊은 마력인데, 생생하지가 않다. 부패한 듯한 느낌의 마나가 건물 안에서 새어나왔다. 이브린이 침음성을 흘렸다.

"사용한 모양이구나……."

정하가 쳐다보았다.

"사용하다니?"

"아브락사스."

"그걸 줬어? 아니, 가지고 있었어?"

"아브락사스가 뭔데요?"

이윽고 그들이 지상에 내려앉았다. 닫힌 철문을 향해 이브린이 손을 펼친다. 문이 열렸다.

피냄새가 끼쳤다.

수현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발전기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일어나더니, 깜빡이며 불이 켜졌다.

온통 시뻘건 핏물이 중앙으로부터 번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거구의 사나이가 죽은 듯이 누워 있다. 다가가자, 그것은 얼굴부터 배까지 갈라져 속을 온통 내보인 채 죽은 처참한 시체다. 내용물들은 터지기기라도 한 것처럼 조각난 채 갈라진 단면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더럽히고 있다. 텅 빈 시신의 내부를 내려다보며 수현이 말했다.

"김상호……."

이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아브락사스다."

"대체 아브락사스가 뭐야?"

"힘의 결정체지."

정하가 이어 대답했다.

"마도사 크로울리가 개발한 거야. 온갖 재료를 연단해서 만드는 끔찍한 물건이지. 엄청난 힘을 압축한 것이라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온갖 방법의 활용법이 있지만, 역시 가장 알려진 건……."

"삼키는 것. 그리고 진화하는 것."

"크로울리의 목적도 그거였어. 더 강한 존재로의 변이. 하지만 아브락사스를 삼키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최소한 알려진 사람은 없어."

"설마 아직도 이걸 시도하는 인간이 있을 줄 몰랐느니."

"아직도 만드는 드래곤이 있는 줄도 몰랐네."

"아주 예전에 만든 것이다."

"네 내단을 넣었어?"

"그렇느니라. 한동안 힘쓸 데가 없다보니……."

아브락사스의 재료로 드래곤의 내단이 들어간다고 한다. 내단이라고 귀한 것은 아니고, 마력의 덩어리 같은 것이다. 오랜 시간 드래곤이 하트에 가득한 마력을 소모하지 않으면 그 잔재들이 뭉쳐서 결정화가 되는데, 그걸 빼낸다. 찌꺼기라고는 해도 드래곤의 힘이 깃든 것이라 높은 값에 거래된다. 인간으로 치면 담석인데, 아브락사스의 주 재료이기도 하다.

"허탈하네. 이렇게 자살해버리다니."

"본인은 정말로 가능하다 믿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주 찢어버리려고 했는데."

정하가 살기를 피웠다.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고개를 홰홰 젓고는 수현에게 다가가 멱살을 붙잡고 키스한다.

"혼자 죽어버리니 속이 풀리지가 않네."

수현이 정하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진정해요. 아기도 있잖아요."

그러자 생각났다는 듯 정하가 낮게 웃는다. 다시 둘의 입술이 맞부딪친다.

"김상호 말고, 다른 정리할 것들은 없어요?"

수현이 물었다. 지금이야 가라앉았지만, 한동안 김상호를 찾겠다고 밤을 헤매며 삭풍 클랜의 클랜원들을 도살하고 다닌 수현이다. 예브게냐를 배신했던 사예바도 그의 손에 죽었다. 이제 정하는 수현에게서 피비린내를 느낀다. 살육에 익숙해진 자의 냄새였다. 순진하던 그 소년이 이렇게 잔혹한 빛을 눈에 드리우는 모습에, 정하는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뛴다.

"귀찮은 것들 다 없애버려요. 싸그리 없애고 더이상 엮이기 싫어요. 그냥 다섯이서 같이, 계속 지내면 좋겠어요."

정하가 웃는다.

수현과의 평온, 그것이야말로 정하가 바라는 것이다.

아브락사스의 힘을 다 받아들이지 못해 터져나간 김상호의 시체를 향해, 정하의 핏빛 칼날이 날아가 난도질한다. 시체는 다져지고, 다시 분해되고, 그저 고기 파편이 되어 허공에 흩뿌려진다. 엄청난 거한이었던 터라 남긴 시체도 무거웠다.

마지막 분풀이를 끝으로, 정하가 마력을 거두었다. 먹기 좋게 다져진 그의 시체 주위로, 진득한 마력의 잔재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던 정글의 청소부, 스캐빈져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헐떡이며 다가가 피를 맛본다.

*

<몇 시간 전>

창고에는 둘 뿐이었다.

김상호는 자신을 따라 온 초산을 향해 말했다.

"죽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까?"

그의 대답에 김상호가 웃는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 구슬을 내려다본다. 아브락사스는, 아무런 빛도 되비치지 않고 새까만 칠흑을 두르고 있다.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누구도 이것을 먹고 살아남지 못했다.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서 아브락사스의 효용이란 그저 마법의 매개체로 힘을 증폭시키거나 거대한 마법기관의 동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능력자의 진화를 목적했던 크로울리의 실험은 실패로 판명났다.

하지만 김상호는 안다.

아브락사스를 먹고 살아남은 자는 존재한다.

두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 시련은 가혹하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처참한 시체가 될뿐이다.

"복수도 다 핑계였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초산의 말에 김상호가 미소짓는다.

김상호는 정하의 주인이 된 소년을 만난 이후, 비밀스럽게 삭풍 클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브린을 이용해 복수한다는 건 위장에 불과했다. 그가 정말로 바란 것, 모든 것은 오직 이 아브락사스를 위한 거였다.

다시 밑바닥을 쳐도 좋다.

죽음이 그 밑바닥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인다.

태생이 힘을 결정하는 가혹한 정글에서, 그는 다시금 한계를 마주했다. 그 소년은 절대 이길 수 없다. 김상호는 그 끝 모를 힘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내심으로는 드래곤인 이브린조차 패배할 것을 짐작했던 것 같다. 처음 그 힘을 마주한 후, 김상호는 이제 다시금 바닥으로 내려갈 차례라는 걸 깨달았다.

암흑가의 왕이 정글의 쓰레기가 되어 바닥을 핥고 일어섰듯이, 그는 다시 아래로 기어가 죽음과 키스한다.

그래야만, 그가 다시 올라설 수 있으므로.

"판이 더 커지지 않으면, 판을 깨고 다시 시작해야지. 안그래?"

김상호가 아브락사스를 들었다.

초산은 눈을 감는다.

이 남자는 그랬다. 최저의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는 악당이지만, 그는 결코 추락을 두려워 않는다. 불굴의 의지, 그것이 김상호의 영혼이었다. 언제나 투쟁하고,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필요하다면 밑바닥으로 내려간다.

더 높이 오르려, 더 낮은 곳들을 기어다닌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도 최악의 도전이 될 것이다. 아브락사스를 삼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생존률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한다. 김상호가 만난 그 자도 도시전설 같은 거였다. 하지만 초산은 그를 믿었다.

그의 주인, 김상호는 한 번도 굴복한 적이 없으며.

제로에 가까운 불가능들은 이미 그에게 익숙하므로.

꿀꺽,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다.

그 검은 구슬이 김상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야수의 비명이 터져나온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오오

김상호는 온몸을 태우는 고통에 몸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신경계를 태우는 통각신호들이 온몸에서 날뛴다. 동시에, 모든 어두운 것들이 머리를 휩쓸었다. 그가 그로 있게 한 것들, 의지, 투쟁심, 활력, 모든 것들은 지워지고 절망과 몰락, 패배감이 자리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뒤덮는 것은 끔찍한 고통이다.

목에서 피가 터졌으나 비명을 멈출 수 없다.

김상호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킨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김상호가 팔을 휘저었다. 온갖 것들이 그를 가로막고 있다. 필사적으로 두들긴다. 그를 가둔 벽이 그를 찌른다.

아니다, 그에게는 팔이 없다. 그러나 그는 휘저어야 한다.

그에게는 이제 입이 없다. 그러나 비명을 질러야 한다.

그의 세계가 무너진다. 어린 시절이 무너진다. 아버지의 처참한 몰골이 무너지고, 그의 야망이 스러진다. 모든 기억이 소진하고, 남은 것은 오로지 그 자신 출생 이전의 영혼과, 세계이다. 그의 근원을 향해 벽이 밀려든다. 세계는 알이다.

인식은 무너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만 한다.

그는 알 수가 없다. 저것이 무엇인지, 왜 나아가 벽을 두드려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존재, 그 하나만으로 그는 벽 앞에 서 있다. 하지만 미세한 불똥이 이내 불길로 타오르고, 그는 나아간다. 그것이 그의 본능이다. 벽을 향해 주먹질한다. 본성에 새겨진 투쟁심이다. 불길은 위로, 위로 타올라야 한다.

얼마나 오래,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었을까.

벽이 허물어졌다.

─알을 벗어난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온통 들러붙는 것들을 헤집고 몸을 일으킨다.

정신 없이 헤쳐나오자, 눈앞에 초산이 있다. 김상호는 그의 승리를 직감한다. 온몸에 잔존하는 통증들을 억누르며, 씨익 웃었다.

아, 정글이여. 악의 세계여.

너는 나를 사랑하누나.

고통에 도취하며 김상호는 웃음을 터뜨린다. 귀가 먹먹하여 몸의 울림으로만 자신의 웃음을 느낀다.

초산의 눈은 최고조로 커져 있다.

초산이 그를 부른다. 들리지 않는다.

왜 저렇게 놀란 것인가.

김상호가 몸을 일으켰다. 자꾸만 몸을 붙잡고 늘어지는 끈질긴 가죽들은 무엇인가. 몸을 비틀어서, 일어선다.

초산의 키가 크다.

자신보다 크다.

그는 분명 허리를 펴고 섰다.

김상호는 손을 든다. 새하얀 손, 예전의 투박한 피부가 지금은 시리도록 희다. 이해할 수 없어서 갸웃한다.

시선을 돌린다.

몸이 갈라진 시체가 있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뛰쳐나간 것처럼 내장이 온통 헤집어져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마치, 무엇인가가 몸을 찢어버리고 기어나온 것 같다.

그리고 시체는, 익숙한 얼굴이다.

"아……."

새어나온 목소리가 가늘다.

떠듬떠듬 걸어서, 초산의 앞에 선다. 그가 황망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마스터……?"

"그래, 나다."

예전의 위엄이 없다.

하지만 온몸에 솟구치는 이 힘은 진짜다.

구석진 곳의 낡은 거울 앞에 선다.

낯선 소녀가 알몸으로 서 있다. 피부는 유난히 희지만, 육체는 늘씬하게 잘 단련된 모습이다. 크지 않은 가슴과 골반, 그리고 가랑이의 분홍색 성기까지, 온전한 여자였다. 김상호, 그가 움직이는 대로 소녀는 움직인다. 자신을 향하는 그 노란 눈동자.

김상호는 이해했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웃고 말았다.

"마스터…… 이게 대체……."

"크흐흐, 웃기는 일이다. 그렇지 않나?"

그리고 어깨를 떨며 폭소한다. 어깨를 떨며 웃던 거울 속의 소녀는, 이내 그 노란 동공으로 자기 자신을 빤히 응시한다. 거울은 산산히 부서져내린다.

"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핫!"

"마스터……."

"큰 변수는 아니다. 계획은 그대로 진행한다."

"네."

"바로 출발한다."

클랜의 모든 재산을 빼돌린 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브락사스를 취했다고는 하나 드래곤은, 그 소년은 이길 수는 없다.

아직은.

이제는 소녀가 되어버린 김상호가 잔혹한 미소를 짓는다. 그 눈빛, 그 서늘한 입매는 이전 야수일 때와 같다.

잃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앞으로 취할 것을 생각한다.

일본으로 간다.

그곳을 짓밟고 다시 돌아오겠다.

다시금 밑바닥을 박찬 그가 날아오를 곳이다.

거대했던 사나이, 김상호였던 시체를 뒤로 한 채, 흰 천을 대충 두른 소녀와 건장한 사나이가 창고를 떠난다. 빗겨 열린 철문 틈으로, 달은 어느새 만월이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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