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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게임-74화 (7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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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름 휴가

수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풉. 유령? 하하, 웃긴다. 유령섬이요? 유령이 누나 보고 도망갈 거 같아요. 하하, 힛하하핫!"

수현이 배를 잡고 폭소하며 곁에 있던 이브린의 어깨를 안았다.

"여긴 용도 있는데? 귀신같은 거 용 만나면 막 울지 않나?"

수현이 깐죽대며 웃어대는데, 이브린의 여린 어깨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고개 돌리니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

"……?"

수현이 얘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정하들을 쳐다보았다.

"……?"

어둠 속에, 모닥불의 비친 그녀들의 안색도 썩어 있었다.

타닥타닥, 하고 타오르는 모닥불이 밤의 해변에 다섯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중의 하나, 수현은 불안에 떠는 네 여인 사이에서 우두망찰 섰다. 바닷바람이 불길을 뒤흔들어,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수현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Why so serious?"

올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신…… 무섭잖아요."

"……넌 마녀인데 귀신이 무서워?"

"마녀랑 무슨 상관이에요……."

올가가 상상만 해도 무섭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수현도 그 분위기가 전염되어, 왠지 뒷덜미가 서늘한 느낌이다. 모닥불이 닿지 않는 섬의 저편은 어둠에 잠겨 까마득하다. 수현은 문득 그 어둠이 의식되어 자꾸만 흘끗 흘끗, 시선을 주다가 말았다. 더 보다간 무엇인가와 눈이 마주칠까, 그런 생각을 사그라뜨리며 네 여인들에게 다시 말했다.

"저, 정글에선 귀신 무서워하고 그래?"

"……."

정하가 올가의 어깨를 잡아주며 말했다.

"귀신은 저편의 존재잖아……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있다면 우리가 어떡하겠어?"

"그, 그래요?"

다같이 모여 모닥불에 둘러앉았다.

"주인. 주인은 신을 믿느냐?"

이브린이 말했다.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잘 생각해보질 않아서……."

"죽음 이후엔 무엇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처…… 천국? 환생? 어떤데?"

"우리도 모른다."

이브린이 손을 뻗었다. 모닥불의 불길이 그녀의 손끝에 옮겨와, 그녀의 손아귀에서 일렁였다. 그 불빛은 붉게 타오르다가, 이내 새어버려 하얗게 백열하다가, 이내 파랗게 변하기도 했다. 이윽고 색깔이 뒤섞이며 물결치다가, 이윽고 각양각색의 불씨로 화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 광경에 올가가 탄성을 내지른다.

"천국과 지옥이 있거나, 환생하거나, 다른 무엇이 있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없거나. 그 어떤 존재도 죽음 이후는 증명하지 못했다. 우리가 정글의 룰을 따르는 존재라 해도 세상에 내던져진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지 않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이브린처럼 불길로 손을 뻗었다. 어색하게나마 이브린처럼 불길을 손에 가두었다. 그리고 색깔을 바꾸며 그녀의 묘기를 흉내냈다. 올가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이브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서 귀신처럼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인간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라. 미지에 대한 공포는 영혼에 각인되어 있느니."

"그렇구나."

예브게냐가 이브린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에는 이 부분에 대해 특별한 존재가 있지."

"어떤……?"

"주인님도 아는 사람. 선지자 요한."

요한이라고 하면 철십자 클랜의 멋있는 중년 아저씨를 이른다. 수현은 그 멋부리는 아저씨를 떠올렸지만 뭐가 특별한지 짐작할 수 없다.

"그가 가진 죽음의 시선은, 정글에 알려진 능력 중 유일하게 죽음에 관한 거야."

"대단한 거야?"

"우리도 누굴 죽일 순 있지. 찌르거나 태우거나 때려서. 하지만 그 남자는 죽음 그 자체를 투사시켜."

"……."

"게다가 그건……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스스로 얻은 거야. 핏줄에 없는 힘이라고."

"핏줄에 없는 힘……?"

"정글의 힘들은 대개가 혈통에 의거해. 애초에 힘의 씨앗, 가능성이 피를 타고 내려와서 발현하는 거지. 이브린은 애초에 드래곤이고. 정하는 뱀파이어의 피. 올가는 마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능력을 사용하는 거고. 나 또한 정신지배의 능력을 타고난 거야. 주인님도 그럴테고. 우리들은 그저 힘의 상속자들일 뿐."

예브게냐가 말했다.

"하지만…… 요한은…… 애초에 그 힘은 처음부터 없었어. 유래가 없어. 그 스스로 받아들인…… 계승 불가의 힘이야. 애초에 데이터가 없기도 하지만…… 그런 알 수 없는 점 때문에 또한 요한은 정글의 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지."

"주인."

이브린이 말했다.

"주인은 남의 능력을 카피할 수 있지. 방금 내 힘을 흉내낸 것처럼, 요한의 힘도 흉내낼 수 있느냐?"

"힘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고……."

수현이 곰곰이 생각했다. 굳이 능력자가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능력자를 보면 그들 안에 있는 힘의 근원을 수현은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요한에게선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말하자면 수현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안될 것 같은데……."

"흐음…… 역시 그런가……."

"왜?"

"잠깐만요."

올가가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올가를 향했다.

"지금 무슨 소리……."

사박.

"안들려요……?"

사박. 사박.

발걸음 소리였다. 순간, 수현의 등골에 한기가 치민다.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곁의 이브린과 올가가 수현의 손을 잡아왔다.

"……."

사박.

뒤에서 들렸다. 수현이 천천히. 천천히 뒤로 눈을 돌렸다.

"……."

아무 것도 없다.

수현이 눈을 찡그리며 어둠을 들여다보았다. 어둠 너머에도 어떤 존재의 기척은 없었다. 수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잘못 들었나봐."

"저, 저기. 저거."

올가가 손가락질했다. 모두의 눈이 쏠렸다.

모닥불이 비치는 한계에 가까운 지점에서, 희미한 불빛 아래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

그 흔적을 발견하고서 수현이 움찔했다.

"저, 저건……."

"아냐. 발자국 아냐. 그냥 우연히 저렇게 모양이 난 거야."

수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하하, 웃었다. 예브게냐는 그렇다치고, 정하가 겁을 먹은 듯 긴장하는 얼굴을 보니 의외의 면모라 귀여웠다.

"그렇겠……지?"

"맞다니깐, 누나."

수현이 웃었다.

"자세히 봐. 저건 발자국이 아니라 그냥……."

수현이 다시 몸을 돌리다가 화들짝, 몸을 젖혔다.

방금 전 하나이던 발자국이.

두 개로 늘어나 있었다.

*

"그건 뭐였을까요?"

"잘못 본 거야."

"분명히 발자국이었다구요……."

일행은 배로 돌아왔다. 올가가 기겁해서 섬에 못있겠다고 훌쩍이는 통에 더 머물 수 없었다. 나머지도 은근히 반기는 것 같아 배로 돌아오고,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 다시 예브게냐의 섬을 찾기로 했다.

"정말 유령이라면 여기라고 안전할까?"

수현이 짖궂게 올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귀신은 바닷물을 무서워하니까 못올 거에요."

"정하 누난 십자가도 안무서워하잖아. 낮에도 돌아다니고. 귀신도 그러면?"

"우……."

"농담이야."

수현이 웃음을 터뜨리며 올가를 달랬다. 올가는 칭얼대며 침대칸으로 들어간다.

달은 그믐이다. 균열처럼 엷은 달이 열어놓은 희미한 틈으로도, 월광은 해면에 빛나는 파편을 떨어뜨린다. 달빛이 내려앉은 바다는 빛을 되비치며 매순간 일렁였다. 수현은 그 풍경을 들여다보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파도가 부닥치는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 이따금 귀를 때리는 바람소리, 그뿐이다.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침묵이었다.

수현이 기분 좋게 아아 하고 소리냈다.

내일은,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그녀들과 뒹굴며 즐겨야겠다.

"휴가 오길 잘했어."

수현이 조종실 냉장고에 있던 캔맥주를 땄다. 혼자 건배하며 한모금 들이키는데.

"……?"

저기, 섬의 중앙, 백사장 너머에 자리한 숲에서 누군가가 서 있었다.

"……."

안력을 키웠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무 사이에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히히히, 웃고 있었다.

뒷덜미에 땀이 흘렀다. 수현이 한걸음 물러났다. 그는 수현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한걸음 걸어나온다. 숲그늘을 나와, 월광이 비치는 자리로 한걸음, 내딛는다. 수현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눈코입을 멋대로 배치한 듯한 기괴한 얼굴이었다.

수현과 눈이 마주치자 뺨에 자리한 입이 더 벌어지며 히히, 웃었다.

수현이 놀라서 갑판에 주저앉았다. 방금 무얼 본 것일까. 수현은 손목이 떨려오는 것을 부여잡고 견디면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잘못 본 거야. 일어나면 없을 거야.

천천히 일어났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들어 다시금 섬을 보았다.

"휴. 역시. 귀신은 무슨……."

"히히히."

수현이 뒤로 튕겨나왔다.

그 소리는 배의 바로 아래에서 나고 있었다. 수현은 배를 맴도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다리가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히히히히히.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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