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71화 (7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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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름 휴가

바다는 에메랄드빛에, 백사장은 새하얗다.

해변에서부터 길게 다리를 놓은 선착장 끝에는 오두막처럼 지붕을 올려놓았다.

그 아래의 의자에서 해를 피해 배를 기다리던 수현이 문득 곁에서 꾸벅꾸벅 조는 이브린을 쳐다보았다. 무방비로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목덜미가 새하얗다. 이브린 옆에서는 올가가 먼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이 손을 뻗어 이브린의 반대쪽 뺨을 손가락으로 쿠욱 찔렀다.

"읏!?"

수현은 재빨리 손을 회수해 자는 척을 했다. 이브린은 홱, 고개를 돌려 올가를 노려보았다. 시선을 느낀 올가가 주춤하며 이브린에게 말했다.

"이브린님, 무슨 일이세요?"

"……아니다."

이브린이 팔짱을 꼈다. 그러다가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수현이 다시 손을 뻗어서 이브린의 반대편 뺨을 찔렀다.

"……!"

이브린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올가가 바들바들 떨며 한 걸음 물러났다.

"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아니에요……!"

"감히 잠자는 용을 건드리다니, 대담하구나."

"이브린님!?"

이브린의 손에서무터 그물처럼 갈라진 마력이 올가를 꽁꽁 매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이 바닥에서부터 미세하게 떠올랐다. 올가가 무게감을 잃고 버둥댄다. 수현이 이브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브린이 수현을 쳐다보자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보통 사람들 보잖아."

이곳은 몰디브.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곳이다. 올가와 이브린의 미모에 눈 떼지 못하는 남자들도 많았다. 이곳에서 마력으로 올가를 괴롭혔다가는 해외토픽이 나올 것이다. 수현이 웃으며 말했다.

"자, 내가 다리 잡을게."

"알았다."

"마, 말려주시는 거 아닌가요?"

수현과 이브린이 양쪽에서 올가를 둘러쌌다. 그리고는 둘이서 올가를 들어올렸다.

"하나, 둘, 셋!"

올가의 몸이 난간 밖으로 날았다. 선착장 바깥 바다로 떨어졌다.

첨벙---!

"꺄아악!"

올가가 허우적댔다. 이브린과 수현은 올가를 내려다보며 폭소했다.

주변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관광객들도 웃었다.

올가는 쏟아지는 웃음 속에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저 수영 못해요!"

허우적대며 살려달라 애원하던 올가에게 수현이 튜브를 던졌다. 올가가 튜브를 붙잡고 자세를 안정시켰다. 수면 위에 떠올라 수현을 손가락질했다.

"이 나쁜!"

"왜?"

"자던 이브린님 깨운 거 주인님이잖아요!"

"튜브 귀엽다. 빨리 그거 쓰고 나와."

수현이 계속 키득거렸다. 올가는 울상을 지었다.

발이 닿지 않지만, 물이 너무 깨끗해서 무섭지는 않았다. 올가는 유아용 튜브를 허리에 두르고 싶지는 않아서 튜브에 의지해 발장구로 나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좀처럼 전진하지 않는 것이었다. 올가가 이를 뿌득 갈며 다시 위를 쳐다보았다. 수현이 힘을 펼쳐 추진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튜브는 허리에 써야지. 그렇게 하면 제대로 안나가."

"주인님도 정말!"

이브린에게나 어울릴 자그마한 튜브였다.

"아, 올가는 요새 살이 쪄서 허리에 안들어가려나."

"살 안쪘는데요!"

올가가 발끈해서는 튜브를 뒤집어썼다. 잠깐 허우적거렸으나 이내 허리에 튜브를 두를 수 있었다. 마르고 미끈한 체형이라 유아용 튜브도 소화한다. 올가는 득의양양해서는 위쪽을 쳐다보았으나, 수현은 보이지 않았다.

"잘했어. 빨리 와."

"……!"

목소리만 들렸다. 그 광경에 관광객들만 웃고 있었다. 올가가 러시아어로 욕을 중얼거리며 발장구를 쳤다.

선착장이 해안에서 멀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물결을 타고 발장구를 치니 지쳤다. 올가는 발이 닿는 곳에서 튜브를 들고 터벅터벅 걸었다.

해안에서 수현이 웃고 있었다. 올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수현을 외면했다. 수현이 뒤따라가 뒤에서 올가의 하체에 긴 타올을 걸쳐주었다. 수현의 팔이 허리를 껴안자 순간 포옹하는 줄 알고 기대했던 올가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건 뭔데요?"

"가려야지?"

"뭘…… 앗."

수현의 조건대로 그녀들은 짧은 치마에 노팬티다. 물에 젖은 그녀의 둔부가 비칠 수가 있었다. 올가는 순간 부끄러워져서 수현의 옷자락을 쥐었다.

"예뻐."

수현이 올가의 늘씬한 다리를 종아리부터 슬쩍 훑으며 윙크했다. 올가의 뺨이 붉어졌다.

"빨리 가요. 언니가 배 가져온다니까."

수현이 올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올가는 눈을 흘기며 수현에게 팔짱을 꼈다.

사진으로 보던 대로, 물빛은 에메랄드에 하늘은 말 그대로 하늘빛이다. 속이 비치는 수면은 유리처럼 바닷속 풍경을 내보였다. 사람들이 웃으며 각국의 언어로 기쁜 말들을 속삭이고 있다. 곁에 선 수현의 체취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올가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옙 누나가 가져온다는 게 배였지?"

"네. 크루즈 요트라던가……."

"배가 최고지."

수현이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올가를 데리고 선착장을 달렸다.

어느새 아름다운 백색의 크루즈 요트가 파도를 가르며 선착장에 도달하고 있었다. 갑판에선 정하가 서서 도도한 눈으로 다가오는 수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영화 같은 모양새에 관광객들이 웅성거렸다. 수현은 정하를 마주 바라보며 걸어갔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나 계속 기다렸어?"

"아니."

수현이 윙크했다.

"다만 계속 생각했어."

"훗."

수현의 느끼한 멘트에 만족하며 정하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짓는다.

올가는 어이가 없어서 둘을 무시하고 먼저 배에 올라탔다.

이브린은 어느새 배에 이미 타고 있었다.

어떻게? 하고 올가가 이브린을 쳐다보았다. 이브린은 배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바다가 참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조종실에 서 있는 건 예브게냐였다. 성격만 나쁜 줄 알았는데 돈 많고 학력 높고 배도 조종할 줄 안다. 무서운 여자……! 올가는 생각했다.

정하와 가볍게 키스한 수현이 배에 올라타며 말했다.

"난 배 위에 있어."

"응?"

수현이 뒤돌았다. 화려한 요트에 올라 탄 미소년과 미녀들에게 관광객들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한껏 의식하며 수현이 소리쳤다.

"내 쩔어주는 배를 보라고!"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이라 국격을 실추하진 않았다.

"주, 주인님 왜 저래요?"

"몰라. 아까 요상한 유튜브 영상 보더니 좀 이상해졌어."

수현이 양팔을 벌렸다. 한없는 자유를 뜻하는 상징적인 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육지좆까!"

"꺅, 창피해."

배는 출발했다.

*

소희는 몰디브로 휴가를 온 참이었다.

부모님의 일이 잘 풀려서, 이런 곳에 여행오는 일도 다 생겼다. 소희는 신나서 뛰어다니는 남동생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왜!?"

"쪽팔리게 가만히 있어. 좀."

"너가 무슨 상관이야?"

"죽을래?"

소희는 남동생 등을 주먹으로 치며 폰을 만지작거렸다. 와이파이가 잡혀서 카톡을 날리는데 수현은 응답이 없다. 손톱을 물어뜯었다. 요새 연락이 뜸해져서, 바람을 피우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그거 어디서 났어?"

남동생이 소희의 끈민소매 티 가슴께에 걸린 선글라스를 가리켰다. 값비싼 명품 선글라스였다. 소희가 픽 웃으면서 선글라스를 눈에 걸친다.

"부럽냐?"

"남자친구가 사줬어? 돈도 많네."

"거기다가 얼굴도 잘 생겼거든. 넌 어쩔래?"

"완전 어이 없네. 그렇게 괜찮은 형이 왜 너랑 사겨?"

"왜긴."

소희가 픽 웃었다.

그녀의 핫팬츠 아래로 쭉 뻗은 늘씬한 다리를 주변에서 흘끗거리고 있다. 흰 피부와 가느다란 몸매, 눈에 띄는 커다란 눈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녀는 단연 미소녀였다.

"난 예쁘니까."

"가슴 작잖아. 브라 에이컵……."

소희가 다시 발로 동생 정강이를 찼다. 남동생이 자리에서 뛰며 소리질렀다.

"아, 아파! 아! 엄마 쟤 좀 어떻게 해봐."

"누나한테 쟤가 뭐니?"

"그치?"

소희 가족은 해변으로 나온 참이었다. 소희가 조리를 손에 들고 맨발로 백사장을 걸었다. 새하얀 모래가 밀가루처럼 부드럽게 발에 감겨든다. 소희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향하며 중얼거렸다.

"아, 수현이 보고 싶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걔가 그렇게 좋아?"

엄마의 말에 소희가 입술을 살짝 내밀며 웃었다.

"이상한 애는 아니지?"

"응. 걱정 마. 공부도 나름 해."

매일 밤 늦게 놀러 다니고 불량아들과 어울리던 소희가 수현과 사귄 이후로 얌전하게 지내고 심지어 공부도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서 수현은 소희 집안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비싼 선물만 주던데. 집이 부자야?"

"응…… 그런가봐. 걔네 부모님 일하신다고 따로 살고 있으니까."

사실 다 살 섞는 여자(정하/예브게냐) 돈이다.

"혼자 사니? 저런, 다음에 반찬이라도 갖다줘라."

"그럴까? 히히."

그러다가 소희는 문득 고개를 홱 돌렸다.

수현과 몹시 닮은 뒷모습이었다. 소년과 소녀가 함께 걸어가고 있다. 곁의 늘씬한 흑발의 여자애가 팔짱을 낀 채 무어라 속삭이며 웃는 중이었다. 소녀의 맨살은 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혼혈인지, 그녀의 곧은 콧날에 서구적인 느낌조차 섞여 있어서, 소희도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게 되는 미소녀였다.

"쩐다. 개쩐다."

남동생이 뒤에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저질아."

"누나보다 예쁜데? 질투하냐?"

"뒤질래?"

소희가 모래를 쥐고 던지려고 하자 남동생이 도망쳤다.

소희는 모래를 바닥에 탁탁 털어내며 수현을 생각했다.

수현이가 여기 있을 리 없지. 소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뒤돌아 걷다가도 계속 그 뒷모습을 좇아 보게 된다. 그는 선착장을 올라가는 중이었다. 배를 타려는 걸까. 소년과 소녀가 함께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보기에도 그림처럼 잘 어울려서, 소희는 조금 질투가 났다. 자신과 수현이 함께 걸어도 저만큼 보기 좋을까.

……쟤 정말 이수현 아냐?

미간을 찌푸린 소희가, 얼굴만 한 번 보려고 그쪽으로 종종 걸어갔다. 선착장 끝에 정박한 크루즈 요트로 걸어들어가는 게 보였다. 출발하기 전에 얼굴만…….

문득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소리치고 있었다.

"내 쩔어주는 배를 보라고!"

저건 뭔 개소리야.

"육지 좆까!!"

"……."

소희가 멈추었다. 저런 미친놈이 수현이일 리가 없지. 소희가 몸을 돌렸다. 아, 수현이 보고 싶다. 한국 돌아가면 바로 데이트해야지.

"저기, 한국인?"

곁에서 말을 거는 남자가 있었다. 소희가 픽 웃었다. 이 미모란.

"혹시 혼자……."

"저 남자친구 있어요."

"네, 아, 네에……."

남자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멀리서 동생이 소희를 부르고 있었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가족이랑 놀러오셨나봐요? 휴가?"

"네."

"지금 한국은 덥죠?"

"그렇죠. 완전 여름이에요. 그래서 여름 휴가 왔잖아요."

소희가 웃으며 남자를 지나쳤다. 남자의 한숨소리를 뒤로 하며, 소희는 생각했다. 내가 이정돈데 넌 왜 이렇게 연락 안받아, 이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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