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8 / 0180 ----------------------------------------------
16. 여름 휴가
다시 하늘에 달이 걸렸다.
창 아래, 도시에서 불빛들이 줄지어 흐르고 있었다.
인간이 세계를 손아귀에 넣었다. 이제 생존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의 꿈, 욕망, 한숨들이 네온사인에 뒤섞여서, 분간할 수 없이 휘황하다. 이마를 창에 기댔다. 유리의 한기가 정신을 깨웠다.
한 걸음 물러서자 자신이 보였다. 웃음기라고는 없이 굳었다. 이와 같은 눈을 보았다.
─나는 꼭 도시를 발 아래에 두겠다.
그날 맹세하며 흘끗 들여다보았던 차창에, 우는 자신의 얼굴이 비쳤었다. 어렸었다.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다. 다만 눈빛이 까마득히 어두웠다. 미래에 거쳐야 하는 일들은, 닥쳐올 때에야만 배울 수가 있었다.
지금도 변한 것은 없다. 늘 처음처럼 발버둥치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러하다.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쉬십시오."
"쉬라고."
손끝으로 눈가를 짓눌렀다. 뒤에서 쪼르르, 술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상호가 잔을 받았다.
"저희가 함께한지 얼마나 됬죠?"
"십 오년."
김상호는 술잔을 받아 삼켰다. 알코올이 목을 태웠다.
"그럼…… 이게 더 오래 되었네요?"
임페리얼 십칠년산을 흔들며 남자가 웃었다. 광고한 배우처럼 멋있지는 않았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동안 마스터께서 쉬는 모습을 본 적 없습니다."
"쉬기엔 이르지."
"지금부터 제가 휴가를 드리겠습니다. 날이 더우니 여름휴가죠. 쉬십시오."
삭풍 클랜의 이인자 초산이 김상호에게 농담하며 잔을 들었다. 김상호가 잔을 마주쳤다. 클랜에서, 이렇게 김상호를 대할 자격을 가진 것은 초산이 유일하다. 김상호의 투쟁을 이해하는 것 또한 초산뿐이었다. 그들은 같은 것을 속에 품었다.
"저건 뭡니까."
초산이 책상 위의 국화를 가리켰다. 김상호가 몸을 돌려 내려다보다가, 침묵 끝에 쥐었다. 꽃잎 앞에서 잠깐 말을 잊는다.
"내 아버지는 아마 오늘 죽었을 거다."
초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들은 나란히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도시의 중심, 마천루의 최상층에서 그들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시체는 아직도 어딨는지 몰라. 아마 바다 어디에 물고기밥이나 되었겠지."
"……."
"어릴 땐 국화를 사놓고도 둘 곳을 몰랐다."
김상호가 웃었다.
김상호가 창문을 열었다. 고층의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눈을 감고 지난 날들을 떠올렸다.
그도 한때는 크리스마스 산타를 기다리는 소년이었다.
산타 대신 만난 것은 사채업자들에게 구타당해 비틀거리며 들어온 아버지였다.
그들은 집의 쇼파에 앉아 마루에 침을 뱉으며 채무를 독촉했다.
"복수."
김상호가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어머니는 떠나고, 집을 빼앗기고, 홀로 남은 날 그는 아버지를 찾아 거리를 헤맸다. 사채업자의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죽기 전까지 얻어맞았다.
거리에서 웅크려, 사채업자의 빌딩을 올려봤다.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저 정상에서, 유리벽 앞에 선 남자들이 도시를 향해 건배하고 있었다. 김상호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복수를 생각했다.
─그들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고, 그들처럼 저 자리에 서겠다.
김상호는 돈을 모으고, 권력을 모았다. 그는 암흑가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정글을 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결국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짐승들이다. 도시는 인간 아닌 것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김상호는 그 벽을 넘기 위해 스스로 라이칸스로프에게 목을 내밀었다. 다시, 바닥을 때렸다. 암흑가의 왕도 정글에서는 최하의 쓰레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밑바닥은, 그리고 그곳에 얼굴을 파묻는 것은 그에게 익숙했다. 정글의 구정물을 벌벌 기며 엉금엉금 올라 여기에 도달했다.
"아무 것도 없었던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
"모릅니다."
"하나만 인정하면 돼."
김상호가 국화를 들었다. 바람에 짓눌린 국화는 꺾여버릴 듯 흔들렸다.
"인간이, 우리가 짐승이라는 거."
"……."
"정글을 지배하는 놈들은 타고났지. 정글의 서열은 대개 혈통에 의거한다."
정글은 타고난 능력이 힘을 결정한다.
"예."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오로지 우리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김상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초산도 마주 웃었다. 초산 또한 김상호와 같이, 제 스스로 정글에 들어선 자였다. 그 또한 라이칸스로프에게 물려 정글의 하층부에 편입되었다. 뒷골목에서 피투성이로 죽음을 기도할 때, 그 앞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가 있었다. 김상호가 내민 손은 하나뿐인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김상호의 그림자가 되었다.
"이 도시는 우리가 지배한다."
"예. 마스터."
초산이 씨익 웃었다.
김상호가 책상에서 서류를 집어 건냈다.
"휴가 끝이다. 결재했다. 실행해라."
"짧은 휴가였습니다."
초산이 술병과 서류를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초산이 떠나간 방에서 김상호는 상념에 잠겼다. 이마를 짚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일어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불빛들이 비쳤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도시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창을 열었다.
김상호가 국화를 창밖에 던졌다.
국화는 바람에 날려 빙글거리다가, 서서히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김상호는 국화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국화는 이윽고 시야 밖으로 스러졌다.
흘끗 올려다본 하늘에는 둥근 만월이 걸려 있었다. 달빛이 전하는 마력에 늑대인간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온몸으로 억눌렀다. 눈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휘황한 도시 때문은 아니다.
불야성이다. 도시의 불빛이 한층 가열차게 타올랐다. 김상호가 웃었다.
여전히 밤이다. 쉬기엔 이르다.
*
"여름이에요. 더위는 이길 수가 없죠."
"안더운데?"
수현이 말했다.
이 저택에는 에너지 절약에 대한 열의나 더위를 견딜만한 참을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 에어컨은 종일 풀가동이다.
수현은 내심 으슬으슬 추웠다. 그래서 올가를 무릎 위에 앉히고 온기를 나누는 중이다.
올가는 수현에게 안긴 채 계속해서 말했다.
"아니에요. 더워요. 아 덥다 더워. 그쵸, 주인님? 그래서 제가 특별한 계획을 세웠어요."
"뭔데?"
"여름 휴가. 바캉스!"
올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수현은 바캉스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비키니를 상상했다. 몇 개월 전까지 홀로 자취하던 고독한 일개 고등학생 수현에게 바캉스는 가상의 단어였다. 어느 나라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불쑥, 새하얀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바캉스 좋구나. 바다다. 여름엔 바다 아니겠느냐."
이브린이 상기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북해의 지배자였다. 따지자면 해룡이다. 수현에게 붙잡히고 한동안 바다는 커녕 넓은 물가조차 구경한 적이 없었다. 갈증 난다며 욕탕에 물 받아놓고 그 안에서 뒹굴거리던 이브린이었다.
"앗. 이브린님 물 떨어지잖아요!"
방금까지도 욕탕에 있었는지, 이브린은 온몸이 젖어 물을 뚝뚝 흘렸다. 수건으로 몸만 가린 차림이다. 그녀의 동선을 따라 물기가 흥건했다.
"가만 두면 마른다. 그게 이치이니라."
"이브린님도 참."
수현은 이브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하렘에 합류한지 얼마 안된 이 작은 소녀는 다른 세 여인 못지 않게 아름다웠다. 게다가 은발에 홍안이라 비현실적이어서, 인형 같았다. 수현은 요새 이브린만 보면 한동안 관찰하게 되었다. 가만히 보면 어찌 이렇게 생겼나 신기할 따름이었다.
"뭘 그리 보느냐."
"……."
"내 주인은 예의라고는 없구나. 여기 오기 전만 해도 나한테 눈을 깔지 않는 건 할아버님 외에는……."
수현이 불쑥 고개를 내밀어 이브린의 오물거리며 말을 쏟아내는 입술에 입맞췄다.
"……!"
수현이 입을 떼자, 이브린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갑자기 무슨……."
수현이 씩 웃었다.
"더 진하게 할래?"
"우웃……."
수현이 이브린의 뺨을 쓰다듬으며 자신에게 이끌려는 참이었다. 이브린이 도리질하면서도 조금은 기대에 차서 수현을 따랐다.
그때 뒤에서 수현의 양뺨을 감싸쥐는 손길이 있었다. 그 손이 수현의 고개를 이브린의 반대편으로 홱 돌렸다.
"저런 어린애가 좋아?"
"왓, 누나. 으음……."
수현을 빼앗은 정하가 곧바로 키스했다.
둘의 키스는 짧게 끝나는 법이 없다. 이브린이 "인간들이란……."하고 중얼거리며 팩, 몸을 돌렸고 올가 또한 투덜거리며 수현의 무릎에서 내려와 허벅지를 꼬집었다. 둘은 개의치 않고 키스를 계속한다. 한창 열올리는 와중에, 예브게냐가 곁에 다가왔다.
정하의 옷깃을 살짝 들추고는, 그 안에 각얼음을 몇 개 집어넣었다.
"꺅! 차가, 뭐하는 짓이야!"
"읍, 누나 내 혀. 물었…… 읍, 아야……!"
예브게냐가 생긋 웃었다.
"어머, 차가웠어? 난 더울까봐 시원하라고."
"널 아예 영원히 차게 식혀줄까?"
정하와 예브게냐가 으르렁댔다. 정하가 송곳니를 세우려는 찰나, 수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양팔에 한명씩 끌어안으며 달랜다.
"그만. 누나들 그만 싸워요."
둘이 동시에 수현을 밀어냈다.
"주인님은 빠져."
그리고 예브게냐가 가슴 밑으로 팔짱을 끼고 어깨를 으쓱했다.
"여름이라 모기가 극성인데 어떻게 좀 하지 그래?"
"내가 왜?"
"같은 모기잖아. 흡혈귀."
"하. 죽여주지."
둘의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둘의 몸에서 기운이 피어올랐다. 예브게냐의 정신지배가 정하를 겨냥하고, 정하의 기운이 지배를 풀어헤치느라 둘의 능력이 상쇄되어 순간 둘은 무방비의 몸뚱이가 되었다. 간만에 두 여인의 치열한 개싸움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꺅!"
둘의 능력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리더니, 둘은 거대한 무게에 짓눌린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대한 중력이 둘을 짓누르고 있었다.
정하와 예브게냐가 마법의 진원지를 돌아보았다. 수건만을 아슬아슬하게 두른 은발홍안의 미소녀가 둘을 쳐다보며, 손바닥을 휘휘 흔들었다. 그에 맞춰 중력이 둘을 이리저리 뒤흔들었다.
이브린이 성큼성큼 다가가, 자신보다 큰 두 여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명심하거라."
이브린이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었다.
"피스."
"……."
"……."
이브린이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평화는 지구를 차지한 인간 최후의 과제. 따라하거라."
"……."
"……."
"멋져요. 피, 피스."
괜한 올가만 옆에서 이브린의의 피스에 리스펙트를 표했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저택의 식구들이 모여 올가의 제안에 따라 여름 바캉스를 계획하게 되었다.
"바다면…… 동해? 서해? 제주도?" -수현
"바보 주인님. 무슨 소리를…… 한국 떠야지." -정하
"육대양 바닷물을 다 맛본 나다. 휴식엔 태평양이 제격 아니겠느냐." -이브린
"몰디브 어때요? 매일 사진으로만 봤는데 꼭 가보고 싶어요!" -올가
"난 사람 많은 거 싫은데." -정하
"사람 없는 데가 어딨어? 그럼 사막 가." -예브게냐
"너 죽……." -정하
"피, 피스." -올가
"……." -정하/예브게냐
"섬 하나 빌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수현
"그러게요. 무인도에서 저희들만 주인님과 함께…… 히힛." -올가
"그럼 내 섬에 가자." -예브게냐
순간 모두 예브게냐를 쳐다보았다.
"왜? 나 섬 있어. 전에 샀어."
"한줌짜리 돌섬 아냐?"
"죽고 싶어? 제대로 된 섬이거든. 물론 흡혈귀 올 자린 없지만. 거기 십자가 세워놔야지."
"이게."
"자. 봐. 사진."
예브게냐가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섬 사진을 띄우고는 수현에게 넘겼다. 흔히 남쪽의 섬을 묘사할 때 그리는 아름다운 풍경이 들어 있었다. 곁에서 구경하던 올가가 탄성을 질렀다.
"우와. 좋다. 여기 가요."
"좋네요."
"호, 간만에 따뜻한 남쪽 바다를 즐기겠구나."
이브린도 들떴는지 표정이 환해졌다.
수현은 사진을 보는 척하다가, 주소록에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눌러봤다.
정하는 아직 확인 못했고, 올가는 자기 소망을 담아 수현의 번호를 '사랑하는 여보♥'라 저장한 것을 확인했다. 물론 그날 밤새 귀여워해줬다.
뚜뚜뚜뚜. 예브게냐의 휴대폰에 단어가 표기되었다.
'짐승'.
"……."
예브게냐가 정하와 티격태격하는 사이, 수현은 주소록을 수정했다.
'짐승♥'.
……그나마 좀 낫네.
하지만 기분이 나빴다. 수현이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수현은 별 것 아닌 걸로 다시 말싸움이 붙은 정하와 예브게냐를 향해 거칠게 손을 내밀었다.
"……?"
수현의 손바닥에 둘의 시선이 쏠렸다. 수현은 거침없이 단숨에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피스."
"……."
둘에게 꼬집혔다.
"아 왜 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