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65화 (65/180)

0065 / 0180 ----------------------------------------------

15. 자각몽

이브린의 등 뒤에서 마법진이 몇 개가 떠올랐다. 그 몇 개가 앞뒤로 분리되며 두 배가 되었다. 그것들은 다시 증식하며 수배, 수십배로 늘어나 허공을 가득 매운다. 자색으로 번뜩이는 문자열이 마력을 머금고, 순수한 마나의 에너지로 화해 수현을 폭격했다.

수현이 어둠을 그러모아 떨쳤다. 농도 깊은 어둠을 거치며 약해진 힘들이 수현에게 미약한 힘으로 부닥쳤다. 스러진다. 수현이 한 걸음 다가갔다.

이브린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수인을 맺었다. 마법진이 수현을 휘감았다.

수현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순간, 수현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브린이 본체로 화했다. 거대한 드래곤이 수현을 짓밟았다. 수현이 피했으나 그 거대한 동체를 이겨내지 못하고 뒹굴었다. 한쪽 팔이 날아간다. 파괴이 여파로 정하의 몸이 산산히 찢겨나갔다.

꿈이다. 수현이 눈을 떴다. 수현이 한 걸음 다가갔다.

이브린이 호흡을 그러모았다. 대기의 마나가 급격히 빨려들었다. 소름끼치도록 강대한 힘의 흐름이었다. 이 순간, 이곳 반경으로 한반도 크기만큼 마나의 공백이 생겨난다. 그 모든 것이 이브린에게로 흡수되고 있었다. 수현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편다.

브레스.

허공에 떠오른 마법진을 거쳐, 수현에게로 내리 쏘아졌다. 압축되어 주먹만한 둘레의 레이저 형태였다. 수현은 피할 수가 없었다. 저걸 막지 못하면, 한반도에 화구가 생겨날 것이다.

힘을 모았다.

모으기에 시간이 부족하다.

어둠을 두르고 둘러, 겹치고 쌓아 방어했지만 어둠을 찢어발기고 브레스가 수현을 때렸다. 땅 전체가 갈라지며 지면과 함께 아래로 밀려났다. 땅이 패였다. 수현의 몸이 파묻힌다. 수현이 이를 악물었다. 온 힘을 모아 브레스를 이겨냈다. 하지만 타격이 심해서, 피를 한모금 토해냈다. 한쪽 팔이 너덜너덜하다.

그래도 일어나서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제법 버티는구나."

"뒤로 도망 안 가?"

"너따위 짐승을 사냥하는데 뒤는 없느니라."

이브린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불꽃을 일으켰다. 그녀의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원피스 형태라 치맛자락이 들린다. 그녀의 하얀 허벅지가 보였다. 수현의 시선이 여지없이 하얀 살갛에 닿는 것을 느끼고, 이브린이 다시 콧잔등을 찡그렸다.

"하찮은!"

불꽃이 수현을 향해 쏘아졌다. 수현이 한걸음 나아가며 불꽃을 받아냈다. 화염이 사그라지며, 살짝 그을릴 뿐인 수현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브린, 그녀는 과겨하게 싸우지 않는다. 멋진 싸움도 모른다. 육체적 분쟁은 겪어보지도 않았다.

드래곤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짓밟아버리는 싸움만을 겪었다.

균형의 수호자들에 의해 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정말로 드래곤에 맞먹는 강대한 존재들과는 싸울 수가 없었다. 이브린은 초조해졌다. 수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수현은 몸이 약간 상했을 뿐 멀쩡해보였다. 이브린이 마력을 갈무리했다.

"내 차례도 있어야지."

수현에게서 핏빛 칼날이 쏘아져나갔다. 파공성이 공기를 찢었다. 그 속에서 이브린은 그러모은 마력으로 보호막을 쳤다. 충격에 보호막이 흔들렸다. 이브린이 다시 마법을 구현하려는 순간에, 수현이 다시 공격했다.

수현의 공세다.

수현이 이브린의 보호막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브린이 웃었다.

수현의 시야가 흔들렸다. 지잉, 하고 머리를 울렸다. 애써 떨치며 오른팔에 두른 기운을 꽂아넣었다. 보호막이 금갔다. 다시금 지잉, 머리가 흔들렸다. 가물어가는 정신을 붙잡는다. 눈꺼풀 위에서 떨어지는 암흑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 순간 강력한 힘이 수현을 강타했다. 수현은 온몸의 뼈가 바스라지는 걸 느끼며 내동댕이쳐졌다.

"꿈, 현실, 모두 다를 것 없이 무용하노라."

이브린이 속삭였다.

자꾸만 시야에 차오르는 어둠을 몰아내려 했지만, 초점의 가장자리, 틈새에서 암흑은 스며들었다. 눈꺼풀이 감긴다. 눈동자를 지나 머리를 잠식했다. 더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어둠이다. 꿈이다.

수현은 작고, 이브린은 거대한 용이었다.

이브린이 수현을 짓밟았다. 다 피하지 못해 한쪽 다리가 으스러졌다. 수현이 정신을 모았다. 꿈이다. 눈 뜨면 스러질 환영이다.

수현의 의식이 꿈을 깨어내기 시작했다. 세상이 흐릿해진다. 이브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수현의 의식을 걷어차고, 더 깊숙이 들어간다. 뿌연 시야가 선명해지며, 이제는 또렷한 어둠이 세상에 가득하다.

한층, 깊은 수현의 심상에 들어섰다.

더 내밀한 꿈이다. 이브린은 여전히 용이었다. 수현은 자신의 의식에 갇혀 깨어나지 못하고, 꿈속에서 다시금 이브린에게 공격당했다. 브레스가 어둠속에서 길길이 타올랐다. 세계가 부서졌다.

이브린은 더 깊은 무엇을 보았다.

한층 깊은 어둠으로 들어간다.

수현은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 틈을 보이는 깊숙한 세계로, 이브린이 뛰어들었다. 가장 내밀한 곳에 이른다. 이곳을 파괴하면 수현의 정신이 멀쩡하지 못할 테다. 이브린은 웃으며, 자신의 힘으로 수현을 안에서부터 붕괴시키려 마음 먹었다.

그런데 수현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자아가 사라졌다.

문득, 오감이 멎었다. 허공을 찢고 줄줄 배어나오는 암흑이었다. 진득한 어둠이 가득 매웠다. 시각은 아까부터 무용했다. 냄새가 없다. 무엇도 닿지 않는다. 온도는…… 알 수 없다. 귀울림조차 없는 까마득한 침묵이다. 일체의 무자극 속에서 이브린은 의식만이 어둠을 부유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수현을 찾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이브린은 문득, 주저앉는다.

아주 오래된 어둠이다. 어둠은 눈에, 귀에 있다. 뱃속은, 심장과 내장은 빛 들지 않는 어둠 안에서 약동할 것이다. 그곳에 어둠이 있다. 콧속에, 목구멍에, 그녀의 질속에 어둠은 자리한다. 그녀가 잠자려 몸을 웅크리면 동체가 접힌 가장자리에 어둠은 떠오를 것이다. 어둠은 늘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있는 곳에는 늘 그것이 있을 터였다.

설마…….

라고, 속삭이려 했으나 뇌에서의 전기신호가 미처 신경계를 지나지 못하고 뇌에서의 번뜩임으로 끝난다. 두개골 내부는, 어둡다. 뇌를, 신경을 감싸안은 건 피보다도 어둠이다.

이브린은 느낀다. 이 어둠, 수현의 내면에 들어찬 그것은 그녀가 모르는 그것이다. 수현은 어쩌다 나온 강력한 돌연변이 능력자 같은 게 아니라고, 깨달았다. 이브린이 이곳을 벗어나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이 바깥을 향해 질주한다.

놈의 정체는…….

수현의 심상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이브린이 안도의 숨을 토했다. 자신이 본 그것을 생각하며, 눈을 뜬다.

어둡다.

이브린은 소름이 돋았다. 까마득하게 어둡다. 어둠에 눈이 있다. 그 눈이 이브린을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다.

어둠이 이브린에게로 뻗쳐왔다. 이브린은 공포에 질려 자리에 붙박인다. 어둠이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모욕을 견딘다. 왜냐하면, 어둠은 이미 그녀의 두개골에, 콧속에, 목구멍에, 내장에, 질속에 항문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잊어버려라. 그가 말했다. 이브린의 넓적다리 안쪽을 더듬는 희롱에도 이브린은 저항하지 못하고 감내한다.

따귀를 맞는다. 걷어 차이고 개처럼 구른다. 구속당하고 범해진다. 성기를 학대당한다. 그러한 일련의 이미지들이 이브린을 때리고 지나갔다. 이브린은 그저 눈을 감았다. 저곳에, 그녀보다 강력한 짐승이, 암흑이 있기 때문이다.

이브린이 망각에 동의하자 현실로 튕겨나왔다. 그녀의 마력이 흩어졌다.

*

수현이 깨어났다.

이브린에게 얻어맞고 마법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눈 떠보니 이브린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뭐?"

"기억이…… 방금 무슨…… 드래곤은 망각이 없는데……."

이브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떤 패악질을 부릴까 수현은 몸을 긴장했다. 하지만 이브린은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탈력감에 사지가 위태롭다. 이브린은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고 수현을 쏘아볼 뿐이었다. 수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 또한, 무엇인가 깜빡하고 잊은 기분이다. 그 자취를 좇으려다가 관둔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수현이 일어나 이브린에게 다가갔다.

지금 이브린은 무방비로 마력이 풀어헤쳐져 있다.

온통 비어버린 이브린의 몸으로 다시금 마력이 점점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이브린이 입술을 깨물고 온몸에서 마력을 그러모은다. 그 다급함이, 수현의 기회였다. 수현은 망가진 몸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이브린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발로 걷어찼다.

"꺄악!"

육체적 공격에 이브린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얻어맞았다.

통증에 머리가 핑 돌았다. 몸을 웅크리는데, 머리채를 붙잡혀서 안면이 끌려나왔다. 그 위로 따귀가 내리꽂혔다.

"하윽……!"

따귀 두어번에 뺨이 발갛게 부었다. 얼굴에 가해지는 야만적인 공격을 이브린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었다. 눈물이 차올라 줄줄 흘렀다. 이브린이 작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린다. 수현의 발이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숨이 턱 막혀 이브린이 배를 움켜잡고 바닥에 웅크렸다. 그녀의 원피스가 찢겨나가 흰 살갛에서 피가 흘렀다. 수현이 그녀의 머리를 발로 짓밟았다. 그녀의 얼굴이 땅에 부딪치며 비명을 토했다.

수현의 발 아래에서 이브린이 애원했다.

"그, 그만…… 그마……ㄴ……."

여린 소녀를 두들겨패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그녀는 드래곤이다. 수현은 자기방어를 위해 그녀를 구타했다. 하지만 차츰, 그녀를 굴복시키는 일련의 폭력에서 묘한 충족감을 느꼈다. 이브린이 눈물 흘리며 굴복하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즐거웠다.

그 외관상 나이대의 소녀인 것처럼 웅크린 채 겁에 질린 이브린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흰 목이다.

수현이 이를 드러냈다. 흰 송곳니가 가파르게 솟는다.

수현이 정하에게 취한 권능이다.

육식동물이 먹이의 숨통을 끊듯이, 목을 끊어버릴 듯 짓씹었다. 이브린이 가느다랗게 신음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