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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자각몽
처음 느낀 감정은 호기심.
백 년을 그것으로 살았다.
세계를 이해하고나자 전신으로 절감한 감정은 권태.
그 무력한 감정은 지금도 온몸에 뿌리뻗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세계가 손아귀에 있었다. 북해를 차지하고 시간을 하루하루 죽여넘겼다. 인간들은 짧은 생을 사랑하고 싸우고 피흘리며 격렬하게 보내는데, 그것을 지켜보고 있자면 그들이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다. 먼지가 이고 스러지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인간의 일생인데, 그들은 그들이 영원할 것처럼 웃고 울었다.
그녀에게 대항한 인간들도 그랬다.
오래 전에, 사악한 용을 죽이겠다고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강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강했다.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는 그들을 가지고 노는 것은 재미있었다. 그들을 적당히 상대해주며 희망을 주었다가, 좌절시키고, 괴롭히고, 사냥하는 것은 그녀가 살면서 느끼지 못한 희열을 주었다.
인간은, 일생의 불꽃을 순간에 살라내며 그녀에게 저항했다. 그 불꽃을 짓밟으며 그녀는 즐거웠다. 그녀는 수백의 영웅을, 수천의 군세를 죽였다.
이젠 저항하는 인간이 없었다.
그녀는 이따금 강하다는 존재를 찾아갔다. 그들은 힘의 차이를 느끼고서 저항조차 않고 목을 내밀었다. 시시했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해서, 몇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부나방처럼 달려든다.
소중한 것을 붙잡는다. 소중한 것을 괴롭힌다. 그러면 인간은, 타인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그녀는 죽어가는 인간들의 저주를 달콤하게 씹어넘기며 짧은 살육에 취했다.
하지만 균형의 수호자들에 의해 룰이 제정되고, 그녀는 예전처럼 사냥을 즐길 수가 없게 되었다.
만족할 만한 사냥을 한지도 몇십 년이 지났다. 욕구불만의 상태였다.
그러다가 한국이라는 조그마한 나라의 인간이, 그녀에게 만족할만한 사냥감을 준다고 했다. 어떤 균형의 축에도 속하지 않은, 갓 태어난 강자라고 했다.
과연.
이브린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인간의 기운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희열로 가슴이 두근두근 고동치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마력을 뿌렸다.
*
수현이 저택에 도달하는 순간 농도 깊은 마력이 저택 전체의 공기를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숨쉬기도 힘들만치 압도적이다.
현기증이 일었다. 잠깐 뒷걸음질치며 이마를 붙잡는다. 정신을 다시 일깨우며 수현이 한걸음 내딛었다.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세계의 색상이 반전한다. 윤곽이 일그러졌다. 주변 사방이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익숙한 느낌이다. 유서희의 결계와 닮았다.
저택의 대문은 형체가 일그러지며 짐승의 입처럼 희벌쭉 입구를 열었다.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듯 살랑거린다. 꿈결에서나 볼 것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자꾸만 뇌를 짓누르는 마력의 압력에 숨이 가빠졌다.
이건 너무 세잖아.
수현이 주먹을 움켜쥐고 온몸에 힘을 끌어올렸다. 몸이 조금 가벼워진다. 수현은 심해의 풍경처럼 온통 푸르게 바래어버린 저택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온 대기가 수현의 움직임에 저항했다. 한걸음 한걸음이 무겁다.
어느 순간, 수현은 방 안에 있었다.
여전히 모서리가 흐물흐물해지고, 면과 면이 멋대로 일그러지는 기이한 풍광이었다. 그 사이에서 명확히 자신의 형체를 유지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은빛으로 하얗게 빛나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였다.
열서너엇쯤 되었을까. 그림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의 낭창낭창하고 가느다란 팔다리는 비틀면 부서질 듯 여리다. 하지만 수현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네가 그 짐승이로구나."
수현은 말할 수가 없다. 대기가, 그의 턱을 붙잡았다.
"아직 부족하다. 더 힘을 내지 않을 것이냐?"
그녀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붉은 눈동자는 수현에게선 눈떼지 않는다. 저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수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바닥을 펴고, 다시 쥔다. 그것조차 힘겹다. 다시 손바닥을 펴며 포식자의 힘을 그러모았다.
"호. 무슨 원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제법 흥미롭다."
이브린이 다가와 수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수현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현의 손바닥에 뭉글거리는 포식자의 기운을 이브린은 손금이라도 확인하듯 눈을 대고 관찰했다. 고개를 갸웃한다. 수현은 그녀를 향해 기운을 뻗어 목을 비틀고 싶었지만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무기력했다.
수현이 이를 악물었다.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현은 순간적으로 포식자의 기운을 최대한 응축시키고 그러모아, 격돌시켰다.
손바닥에서부터 기운이 터져나왔다. 이브린의 얼굴이 그 힘을 뒤집어썼다.
기운이 이브린을 덮치고 스러졌다. 잠깐 연기가 피어오른 후에, 가려졌던 이브린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현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브린은 처음처럼 가만히 미소지으며 수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상하구나."
순간, 수현은 오금을 짓누르는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브린 앞에 무릎꿇었다.
그제서야 눈높이가 비슷해져서는, 이브린이 조금 더 위에서 내려다보는 형태가 되었다.
"꿇어라."
"크윽!"
이브린이 수현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이것이 너와 나의 키높이다."
수현이 온몸의 기운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잠깐이나마 대기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었다. 수현이 주먹을 휘둘러 이브린의 뺨을 후려쳤다. 이브린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그와 동시에 거센 압력이 수현의 주먹을 찌부러뜨렸다.
"크아악!"
"겨우 이게 다인가?"
이브린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은색 머리카락을 귓가로 쓸어넘기며 권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인간은 가축 다루듯 채찍을 휘둘러야 힘을 내는구나."
이브린이 손을 휘저었다.
온통 일그러지고 지직거리는 방 풍경에서, 벽 한쪽이 스러졌다. 애초에 없던 것처럼 벽 너머가 드러났다. 그곳에는 반라의 초췌한 모습의 정하가 쇠사슬에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위쪽으로 팔을 고정한 사슬에 매달린 거나 다름 없었다. 수현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네게 가하는 압력은 이백년 전 동방의 무사들을 제압한 수준과 같단다. 그들의 처자식을 눈앞에서 고문하자 힘을 내서 내게 칼질을 했지."
이브린이 손을 뻗어, 수현을 흉내내 주먹질했다. 수현의 고개가 힘없이 돌아갔다.
"자. 네 연인을 괴롭히면 넌 내게 다시 주먹질할 수 있겠느냐?"
"하면…… 죽인다……."
"기대하겠다."
정하의 곁 문이 열리더니, 거대한 체구의 사나이 셋이 들어왔다. 김상호와 그의 부하들이었다. 저쪽에선 이곳이 보이지 않는지 그들의 초점이 이곳을 향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하를 쳐다보며 히죽이죽 웃고 있었다.
"채찍질해라."
이브린이 말했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와 놀랐는지 그들이 두리번거렸다.
이브린의 명령을 납득했는지 그들이 채찍을 집어들었다. 김상호는 뒤에 의자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그의 부하 둘이 가죽채찍 두 개를 팽팽하게 당기며 그 탄력을 가늠하다가, 정하의 바로 옆 벽에다가 채찍을 휘둘러보았다.
짜아악!
그 소리에 정하가 깼는지 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채찍을 들고 히죽이죽 웃자, 정하의 눈에서 기운이 빠졌다. 살짝 떨고 있었다.
"하지 마……."
"너한테 달린 일이다. 힘을 내거라."
이브린이 손을 뻗어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현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무력했다.
"자. 때려라."
부하 중 하나가 채찍을 휘둘러 정하를 후려쳤다.
짜아악!
"아흐윽!"
정하의 헐벗은 옷가지가 찢어지고, 그 틈새로 선명한 채찍자국이 새겨졌다. 부하들이 시시덕거렸다.
"타격감 죽이는데?"
"나도 한 번."
짜아아악!
"아흑!"
다른 자가 채찍을 힘껏 휘둘렀다. 정하는 양팔을 위쪽으로 속박당한 상태라 저항할 수도 없이 몸을 내주었다. 그의 채찍이 정하의 유방을 할퀴고 지나갔다. 상의가 찢겨져나가고, 정하의 젖가슴에 벌겋게 상처가 남았다.
수현의 눈에 핏발이 섰다. 온몸에 기운이 터져나오며 수현이 벌떡, 무릎을 일으켰다.
"호오."
하지만 더 이상 힘이 없는지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악문 이에서 피가 주르륵 배어나온다. 이브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마구 때려라. 공포에 질리도록."
"예!"
이브린이 명하자, 그들이 채찍을 휘둘러댔다.
짜악! 짜아악! 짜악!
"꺄악! 흣, 하악! 아흣! 아악!"
무작위로 휘둘러진 채찍은 정하의 목, 가슴, 옆구리, 허벅지, 가리지 않고 피를 터뜨렸다. 살갛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정하는 고개를 숙인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얻어맞은 곳에서 피가 나고, 몸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부하들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채찍질이 날아들까봐 몸을 움찔, 떨었다.
뱀파이어는 피를 잃을 때마다 힘이 줄어든다.
출혈이 늘수록, 점점 더 보통의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 정도로 되겠나. 이브린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인데."
김상호가 일어났다.
그의 우락부락한 근육이 크게 일어났다. 부하에게서 채찍을 넘겨받는다. 그의 두터운 팔근육이 약동하며 채찍 휘두를 준비를 했다.
"포로는 제대로 괴롭혀야지."
김상호가 정하에게 다가가 다 찢어진 정하의 옷가지를 다 벗겨던졌다. 정하는 알몸으로 사슬에 묶인 모양새가 되었다. 김상호가 뒤로 물러나 자세를 잡는다.
김상호가 채찍을 휘둘렀다.
김상호의 채찍은 살아움직이듯 뱀처럼 앞으로 쏘아지더니, 정하의 가랑이 사이를 후려쳤다. 잔인하게도 여성의 급소를 공격한 것이다. 정하가 신음을 내질렀다.
"꺄아학!"
"멀었어."
김상호는 정확하게 한 번 더 후려쳤다. 정하의 몸이 크게 뒤틀렸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진다.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노란 액체가 흘러내렸다. 고통에 소변을 지린 것이다.
"크큭! 천하의 정하가 오줌을 지리다니. 마개라도 필요한 거 아닌가?"
김상호가 킬킬거리며 채찍 손잡이를 정하의 꽃잎에 쑤셔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