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 / 0180 ----------------------------------------------
11. 한 알의 씨앗이 죽지 않으면
황야의 땅은 상처로 할퀴어져 상처투성이로 볼품 없는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인적 없는 황야가, 그녀의 마음 속이었다. 그저 먼지 일으키는 싸한 바람소리 귓가에 스칠 뿐이다. 수현이 수현이 걸음을 옮겼다. 하늘을 휘도는 바람떼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하늘은 빛 바랜 보라색이다. 하늘에 박힌 별들이 날카롭다. 시린 빛을 떨어뜨리며 하늘에서 희번뜩인다. 수현은 막연히 앞을 향해 향해 걸었다. 걸음 끝에 젖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멀리에, 웅크린 정연이 보였다.
정연은 웅크린 채 표정 없는 얼굴로, 하늘만 바라보며 스스로를 바닥으로 땅으로, 감추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떨어지는 가혹한 별빛이 온몸을 찌른다. 수현이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떨고 있는 어린 소녀.
마음 속 정연은, 지금보다도 더 어린 시절의 그녀였다.
상처입은 어린 아이에게 수현이 손 뻗었다.
움찔하며, 정연은 더 움츠러들었다. 수현이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천천히, 그녀가 두렵지 않도록 상냥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작은 새처럼 떠는 그녀의 진동이 수현에게도 전해졌다.
잊을래?
대답은 없다.
잊게 해줄게.
아픈 것들을, 떠나보내줄게.
다시 웃을 수 있게.
수현이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통, 아픔, 공포, 같은 것들의 사념이 어그러진 채 꽉 막혀 있었다. 그것들을, 과거를, 하룻밤의 기억을 사그라뜨리도록 수현은 힘을 모은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 없다.
잊도록…….
문득 부는 바람이, 수현의 손목을 잡았다.
수현이 눈을 들었다.
허공에 이는 바람이 수현에게, 고개를 저었다. 수현은 알 수 없어서, 손을 물렸다. 바람은 아니라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수현은 또한 알 수 없어서, 허공을 들여다보았다. 정연의 기억을 지우려던 수현의 힘을 바람이 되물려주며, 바람은 다시 틀렸다고, 손을 내저었다. 바람이 울어대며 수현의 머리카락을 넘겨올린다. 수현의 가지런한 이마가 드러났다.
눈썹 위, 이마에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다.
보라고, 바람은 말했다. 네가 그랬듯이 남는 것은 남은 것이라고, 바람이 말했다.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항변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미 일어난 일들을 지울 수는 없는 거라고, 바람은 말했다.
수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잊는 게 낫다고, 항변했다. 온통 아플 뿐인 가시를 굳이 짊어질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바람이 사그라졌다.
황야에, 보라색 하늘을 매운 날카로운 별들 틈으로, 달빛이 은은하게 번져들었다. 달무리가 제 힘을 내어 빛 발할수록, 주위의 별들은 희미해져간다. 허공을 맴도는 바람소리가 다시금 수현의 귀를 그었다.
문득, 정연은.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현이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았다. 정연이 멍하니 올려다보는 모양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기억을 지워준 소녀를 기억한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아니라고, 그가 말하고 있었다.
너는 누구니.
바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현은 알았다. 이곳은 정연의 세계였다. 그 무엇도, 바람에서 먼지 하나까지 모두 정연의 것이다.
너는 이렇게 약한데.
정연은 대답하지 않는다.
수현이 일어났다. 그녀가 옳다. 그녀의 몫이다. 일어난 일, 없던 것은 될 수 없을 터였다. 수현은 정연을 내려다보았다. 정연은 좁은 어깨를 떨고 있다. 가녀린 소녀가, 지독한 그 날의 기억을, 몇 번이고 악몽으로 되살아나 짓누를 미래를,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
모른다.
알 수 없겠지.
수현이 손을 뻗었다. 수현의 기운이 피어오른다.
지울 수 없다면, 너를 위해서.
수현의 힘이 정연의 마음 한 켠, 그녀의 곁에 내려앉았다. 황야의 메마른 바닥 틈에서, 약한 고동이 들려왔다.
너를 위해서 희망을 주겠다.
바닥을 뚫고, 새파란 새싹이 몸을 일으켰다. 작고 미약한 존재다. 문득, 정연이 고개를 내리깔아 새싹을 들여다보았다. 온통 붉고 식은 황야에서 유일하게 푸른 싹이었다. 싹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듯 연약해보였다.
잊지 않겠다면, 이겨낼 수 있게 너에게 한 줌의 용기를 줄게.
정연이 손을 뻗어 이파리를 만졌다. 싹이 기지개켜듯 조금, 더 자라났다.
이 작은 싹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그녀의 용기를 먹고 자라 언젠가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서일 뿐이다. 모든 것은 정연의 의지였다. 다만 그녀가 힘들 때 지켜주는 작은 그늘은 되어줄 것이다.
이는 씨앗에 불과하지만.
수현이 정신지배를 풀었다. 정연의 세상이 무너져내린다.
이 한 알의 씨앗이 죽지 않으면…….
*
병실은 적막하다.
정연이 문득, 수현을 쳐다보았다. 수현도 마주 쳐다보았다.
정연은 수현이 처음일 것이다. 둘은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병실문이 열리고, 정태가 걸어왔다.
정연이 정태를 쳐다본다.
"……오빠."
"정연아?"
정태가 정연에게 다가갔다.
"말 할 수 있어? 괜찮아?"
"……응……."
아직은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눌린 음색이었다.
"괜찮……아."
괜찮지 않은 표정으로, 정연이 말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수현은 병실 밖으로 걸어나오며 생각했다. 그녀의 작은 용기가 살아 있다면, 그녀는 다 털어낼 수는 없어도, 웃으며 견뎌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씨앗이 죽지 않으면.
문득 세연이 생각났다.
멈추어 선다.
그녀를 위해 기억을 지웠다. 하지만 정연은, 아니라고 말했다. 작고 여린 정연조차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만약 자신이, 그때에 세연에게 물었다면 그녀는 무어라고 했을까.
나는 옳은 일을 했을까.
벽에 기댄다. 입안에 쓴맛이 번졌다. 손을 들어 눈가를 짚었다.
미안해요.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게, 수현은 그저 속삭인다.
미안해요.
*
검사 허종철이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몸을 뉘었다.
몸을 시트에 기댔다. 지친 온몸이 아래로 가라앉을 것처럼 나른하다.
허종철이 정장 품으로 손을 넣었다. 안주머니에 묵직하게 걸려드는 것은 두툼한 종이봉투였다. 허종철은 미간을 찡그리며 그것을 꺼내어 들었다.
안에 든 것은 그가 평생 만질 수 있을까한, 엄청난 액수의 수표다발이다. 허종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 앞에서 그것을 앞뒤로 펄렁거리며, 내용물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하게 인쇄된 우편번호 공란을 들여다보고, 초점을 미루어 봉투 너머, 주차장의 어두운 구석에 눈을 두었다. 이윽고 시상세포가 죽어들며 동공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니까.
어차피, 그가 아니어도 결국은 그렇게 될 운명이니까.
허종철은 자신이 맡은 사건을 생각했다. 불량아들이 소녀를 겁간하고, 소녀의 오빠가 불량아들과 격투를 벌였다. 상식. 그 불량아들은 법의 처벌을 받아 소년원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 불량아들의 부모가 고위 공무원, 기업가, 부와 권력의 소유자들이다. 어떻게든 그들은 법의 울타리를 벗어날 것이고, 소녀와 오빠는 쓰린 가슴을 품고 평생을 살아가겠지.
그리고 그 과정에는 자신, 허종철도 관계할 터였다. 그들의 담당검사로서.
지친다.
그는 검사가 되고자 밤잠을 죽이며 노력했다.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평생을 바치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커서, 지난 꿈들은 압사했다. 뒷구멍은 늘 열려 있어서, 그 틈으로 돈봉투가 오갔다. 서로의 손이 악수하면 많은 것들이 없던 일이 되었다.
그 수많은 해프닝 중 하나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스러질 것이다. 그저 남들 하는대로 눈 살짝 감는 것뿐이다. 이것은 기회일 수도 있다. 이런 엄청난 거액은 검사들이라도 평생 만지기 힘들다.
한 번, 눈 감으면 된다. 쉽다.
진실과 정의? 그 누가 알아줄까.
허종철이 눈을 깜빡였다. 차키를 박고 시동을 걸었다. 피곤하다. 일단은, 자야겠다.
"돈봉투 받으셨네요."
목소리에 기겁했다. 어느새 뒷좌석에는 낯선 소년이 앉아 있었다. 움직이려 했으나 포박당한 듯 전신이 옴짝달싹하다. 소년이 고개를 내밀었다. 소년의 스산한 숨이 귓가에 닿았다. 소름이 돋는다. 소년이 속삭였다.
"놈들 당장 죽일 수도 있습니다."
목소리는 나른하게 이어진다.
"당신의 머리를 조작할 수도 있습니다."
백미러로 보이는 소년의 얼굴은 무섭도록 퇴폐적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냥 당신을 믿겠습니다."
"……."
소년, 수현이 힘을 뻗었다.
허종철의 머리를 뜯어보았다. 아직 채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정의심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작고, 희미하지만, 그 빛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고 타오른다. 수현은 불씨를 주었다. 다시금 타오를 수 있도록, 희미한 연료를 전했다.
부디 어려운 길을 택할 수 있게, 용기를 나누었다.
지난 기억들, 불의를 참을 수 없던 소년 허종철, 경찰 아버지를 둔 허종철, 핍박받는 자들의 편에 서리라 다짐하던 청년, 허종철. 그리고 검사선서하며 눈물 흘렸던 검사 허종철.
그 기억을 위하여, 수현은 용기를 전한다. 지지 말라고, 그에게 힘을 전했다.
그가 잊은 것들을, 다시는 잊지 말라고.
*
문득, 허종철이 정신차렸을 때, 그의 품에는 돈봉투가 안겨 있었다.
"어, 깜빡 졸았나……."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피곤해서 잠깐 졸았던 것 같다.
허종철이 시동을 걸었다. 차가 진동했다. 문득, 가슴에 품은 두툼한 돈봉투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거액이다. 그 무게가, 무겁게 그를 짓누른다.
시동을 건 차 안에서 허종철은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을 쳐다보던 피해자의 오빠, 정태라는 소년의 눈이 잊혀지질 않는다.
하지만 허종철 그 자신이 나서보아야 힘든 일이었다. 상대가 너무 거물이다. 운이 나빴던 것 뿐이다. 어쩔 수는 없다.
운이 나빴던 것 뿐이다…….
언제부터였던가. 운이 나쁘다고만 변명했던 게.
허종철이 차 시동을 다시 꺼뜨리고,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지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어쩌다 이렇게 됐냐 허종철……."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큰 등으로만 기억에 남았다.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바쁜 아버지였지만, 누군가 존경하는 사람을 물으면 그는 늘 아버지를 꼽았다.
사법고시에 합격하려 밤낮을 공부했다.
그저 돈을 벌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돈을 원했다면 다른 길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검사가 되었다.
허종철이 조수석에 돈봉투를 던졌다. 이마를 감싸쥐고 고개 숙였다.
왜 자꾸, 순진하던 지난 시절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지금 그를 부끄럽게 하는가. 왜 심장이 이토록 뜨겁게 달아오르며, 시든 가슴을 박동치게 하는가.
지난 시절의 기억들은, 검사가 되며 선서하던 그 날의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허종철은 핸들에 엎드려 이마를 댔다. 운전대의 차가운 한기 속에, 그는 지난 날 속삭였던 그날의 선서를, 되뇌어본다.
……검사 선서.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런 대한민국의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11. 한알의 씨앗이 죽지 않으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