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46화 (46/180)

0046 / 0180 ----------------------------------------------

10. 박정태 랩소디

<정태의 이야기>

남들도 다 그런 줄 알았다.

어릴 때는 또래보다 키가 빨리 자랐던 편이라 함부로 시비 붙지 않아서, 처음으로 제대로 주먹다짐을 한 건 초등학교 입학한 이후였다.

싸운 이유도 헷갈리는데, 어쨌거나 같은 반 녀석 중에 대장역할을 하는 녀석과 대치하게 되었다. 말다툼을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때린다는 걸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점잖은 분들이셨고, 그분들 품 안에서 고이 자랐던 터라 그렇게 악의에 찬 행동은 겪은 적이 없었다.

내가 지지 않고 대들자 놈이 주먹을 날리려고 했다.

그 전에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녀석이 인상을 찡그리며 발로 차려고 했다. 나는 그 전에.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녀석이, 차려고 근육을 긴장시키고 몸을 젖히고 내미는 그 모든 움직임을 나는 볼 수가, 느낄 수가 있었다. 숨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녀석이 저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나를 때리려고 하는 것인지, 피하면 되는데 왜 굳이 그러려고 하는지.

"뭐하는 거야?"

나는 정말 알 수 없어서 물어봤다. 사람을 때리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일 텐데. 다들 피해버리니까. 파리를 맨손으로 잡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녀석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더니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나는 당황스러워 계속 몸을 물리며 피했는데, 그러다가 녀석의 패거리 몇이 나를 뒤에서 발로 찼다. 느낄 수는 있었지만 여럿을 동시에 피하기엔 육체적 능력이 부족했다. 나는 다 보면서도 넘어져 깔리고 말았다.

깔리고나니 녀석이 훨씬 무거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주먹을 맞았다.

아프고, 코피가 났다.

깜짝 놀랐다. 정말로 사람을, 온 힘을 다해 이렇게 치다니.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나. 사람을 일부러 상하게 하다니. 머리가 지잉 울리면서, 날 깔아뭉갠 녀석에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내가 녀석을 때리는 건 싫을 텐데, 왜 나를 이렇게 때리는 거지? 녀석도 맞는 건 실을 텐데.

몇 대 더 맞았다. 나는 더 있다간 큰일 날 것 같아 몸을 뒤틀어 겨우 벗어났다. 녀석이 의기양양하게 다가왔다.

"병신. 나한테 더 맞을래?"

순간 녀석을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생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악의가 싹을 틔웠다. 생각할 것도 없이 주먹을 날렸다.

녀석이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정말 맞아버리자 놀란 건 나였다. 왜 피하지 않았을까, 일부러 맞은 건가. 녀석이 일그러진 얼굴로 나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녀석이 첫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주먹이 어디로 날아올지 느낄 수가 있었다. 녀석의 근육이 긴장하고 이완하는 그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녀석의 주먹을 피하고, 녀석이 허공을 때리며 자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 순간을 노려, 주먹을 꽂았다. 녀석이 철퍽 쓰러졌다. 원하는 곳을 정확히 때렸다. 내가 더 의아해졌다. 몸을 뒤틀었으면 이렇게 정타로 맞진 않았을 텐데 왜 가만히 있었을까.

나는 몸을 사리면서 틈틈이 녀석을 때렸고 녀석은 다 맞았다. 나중에는 녀석의 패거리까지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조금 힘들었지만, 녀석들의 움직임을 알 수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다 눕혔다. 나도 지쳐서 기진맥진했다.

둔하구나.

나는 깨달았다. 다들 둔하구나.

나중에는 소문을 듣고 먼저 덤벼오는 녀석들이 있었다. 원치 않았지만 맞지 않으려면 때려야 했다. 녀석들의 주먹은 덤빈 기세가 우스울 정도로 피하기 쉬웠고, 내가 때리면 족족 다 맞았다. 걸어오는 싸움만 받아주었는데 어느새 초등학교 한 학년의 짱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나처럼 상대의 근육과 힘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때문에 축구처럼 서로 승부를 겨루는 게임에서 나를 이길 수 있는 녀석은 없었다. 나는 다 알 수 있었으니까.

1학년 때 짱이 되어, 걸어오는 싸움만 받았을 뿐인데 5학년 때는 이미 학교 전체, 주변 몇 개 학교에서 가장 강한 짱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자연스레 다시 짱이 되었다. 대개 그 지역 초등학교에서 진학하다보니 다들 나한테 진 녀석들만 있었으니까.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난 이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이길 거 같냐?"

"전학생이 질 걸."

"그래? 정태는 틀리질 않더라."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생이 있었다. 허여멀건해서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이었다. 남자 중학교라 전학생에게 당연히 시비가 붙었다. 내 다음으로 행세하던 이짱이 손봐주기로 했다.

나는 내 타고난 재능 덕에 상대를 읽을 수 있었고, 때문에 싸움의 승자를 가리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딱 보아도 전학생이 시원찮았다. 역시 전학생이 실컷 얻어맞았고 내 예측은 어김없이 들어맞는 듯 했다.

그런데 결국 전학생이 이겼다.

엄청 맞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덤벼서, 결국 이짱을 꺾었다. 자연히 다음 차례는 나였다. 다들 날 쳐다보았고, 나와 전학생의 눈이 마주쳤다. 모두 내가 당장 녀석을 팰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을 패는 대신, 물어보았다.

"야. 어떻게 이겼냐?"

녀석은 엉망인 얼굴로 씩 웃었다.

"이길 때까지 포기 안했으니까."

"이름이 뭐야?"

"나?"

전학생이 가슴을 펴며 말했다.

"내 이름은 김요한.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오오……."

근사한 말이었다. 내가 남보다 타고나지 않았다면, 즉 요한이와 같은 조건이었다면 몇 분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했을 거였다. 내 재능은 내가 스스로 얻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녀석은 스스로의 강인함으로 불리한 조건을 이겨냈다.

강하고 곧은 내면.

나는 녀석과 친구가 되었다.

왠지 모르게 요한에게 끌렸다.

점점 우리는 가까워졌고, 학교를 마친 후 석양이 붉게 드리운 놀이터에서 녀석과 담배를 피우는 게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나란히 그네에서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했다.

"난 싸움이 싫어."

"웃긴 새끼네. 존나 잘치면서."

"이상해?"

"어. 엄청."

녀석은 담배를 입에 물고 씨익 웃었다.

"근데 난 니가 그렇게 이상한 새끼라서 마음에 든다."

나는 요한을 쳐다보았다. 낮게 가라앉은 석양은 마침, 녀석의 뺨과 같은 높이에서 잇닿아 녀석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보며 웃을 때에, 물들었던 발그레한, 아, 그 노을, 그 노을빛이 나에게로. 붉게 물든 세상 풍경을 비추던, 그 맑은 눈동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참을 수 없이.

고개를 떨군다. 심장이 조여들어서 붙잡았다.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뿜었다. 요한이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언제나 석양빛 가득한 도시의 풍경으로 나를 이끌었다.

요한은 예쁘장하게 생겼다. 하지만 여자애는 아니다. 내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애들은 많다.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는다.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왜 요한이와 있으면 이토록 가슴이 저린지.

녀석은 무엇이든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아주 곤란하던 일도 어떻게든 시도하고 시도해서, 결국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 해내고는, 별일 아니라고 씩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고는 했다. 요한의 강인하고 곧은 내면에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매혹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게이인 것은 아니었다. 자위할 때는 여자 연예인을 상상하며 했다. 다른 남자들은 질색이다.

다만, 요한이라는 인간,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이었다.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나도 있는데. 먼저 말할래?"

"아, 아니. 먼저 말해."

고백해야지.

요한이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그게 녀석이었다. 결코 자신을 속이지 않는,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고 맞부딪치는 녀석.

"나 여자친구 생겼다."

"……어."

그러나 그런 마음은 덧없이 사그라진다.

"너도 말해."

"아니. 까먹었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여튼 좋겠다. 누구야?"

"한 살 누나인데, 소영이라고……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주는 거다."

요한이 씩 웃었다.

"니가 내 제일 친한 친구니까."

"그래. 존나 고맙다. 부럽다 씹쌔끼야."

"꼬우면 너도 사겨."

"그래. 그럴까."

마음에도 없는 말이 술술 나왔다.

내 제일 중요한 친구니까.

이게 기뻐해도 좋을 말인지, 아니면 빌어먹게 씁쓸한 말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집에서 울었다. 왜 남자새끼 따위를 좋아하게 되어서 이토록 마음이 괴로운가. 마음을 접으려고 했는데 되지를 않았다.

녀석과 친하다는 거, 씁쓸함만 더해가는 일이었다.

우연치 않게 녀석이 섹스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같은 거.

"하아…… 흐, 흐응……."

"누나. 하. 소영아……."

요한이네 집에 갔다가, 현관문에 귀를 대었더니 성행위 소리가 새어나왔다.

처음으로 싸움을 했을 때처럼, 심장이 뛰고, 지잉하고, 뇌가 고조되었다. 숨이 가빠진다. 벽에 등을 기대고 심호흡했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요한의 들뜬 목소리였다.

"지가 오라고 해놓고는……."

내 마음따위 모를, 개자식.

나는 녀석의 집 마당을 나와 동네를 잠깐 돌아다녔다. 삼십분쯤 지나 녀석의 현관벨을 눌렀고, 후다닥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뜸을 들인 후에 녀석이 문을 열었다. 녀석의 등뒤로 예쁘장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날 우리 셋은 녀석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나는 많이 취했다. 그럼에도 내 연심은 가장 깊은 곳에 가두어놓은 비밀이었다. 나는 취해서는 서로 핥고 키스하는 요한과 여자친구를 뒤로 하고, 창밖의 달을 올려다보며 담배연기를 입에 머금었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가장 힘이 되어준 것도 요한이었다.

일로 바빠 항상 집을 비웠던, 친근하지 않았던 부모님. 아버지의 음주운전 버릇.

충분한 유산.

한동안 실어증까지 앓았던 여동생에 비해서, 난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의 빈 칸은 그 제 스스로 자리를 넓힌다. 먹먹하게 어두워오는 마음의 풍경, 무력함에 잠기는 마음. 그때에 요한은 어깨를 빌려주었다.

마음을 추스른 나는 한동안 학교에도 나가지 않고 집에서 지냈다. 병원에 입원한 여동생과 시간을 오래 보냈다.

"정연아."

환자복 차림의 동생은 아직 말을 되찾지 못해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정연이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잔뜩 빌려 안겨주었다. 동생이 환하게 웃으며 첫 번째 권을 찾아 뒤적거렸다. 나는 침상에 걸터앉아 병문안으로 쌓인 바나나 하나를 꺼내어 먹었다.

문득 휴대폰이 진동했다.

나는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휴대폰을 껐다.

누구인지,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래서는 안되었는데.

내 자신에게 취해 주변을 살피지 못했던 거.

그게 내 뼈아픈 후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