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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짐승의 유년
"그래서 이제 사귀는 거야?"
송진하가 눈을 휘면서 소희의 팔에 매달렸다.
이소희, 송진하. 둘은 운무고에서도 예쁘장한 얼굴로 유명하다. 소희가 살짝 치켜올라간 눈매의 남자들 꼴리게 외모라면, 진하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눈꼬리가 살짝 쳐진, 귀여운 얼굴이었다. 둘의 외모가 조금 색다르지만 몸매는 둘 다 늘씬하다.
때문에 소희와 진하가 서로 붙어서 장난칠 때면 짧게 줄인 교복치마가 살짝 말려올라가며 둘의 늘씬한 각선미가 주위 학생들에게 다 드러났다. 남학생들의 눈이 둘에게 자꾸만 붙박였다가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으응."
"그 신발도 걔가 사줬고?"
"어어……."
"와, 쩐다. 이소희 존나 좋겠네?"
소희의 스니커즈를 보며 진하가 키득거리며 소희의 옆구리를 쿡쿡 쑤신다.
"얼굴 괜찮고. 머리 빈 것도 아니고. 집에 돈 많고. 이거 뭐 완벽하네?"
소희는 대답 대신 샐쭉하게 웃었다.
그렇게 좋기만 한 것도 아니야. 진하에게는 말 못하는 고민을 소희는 곱씹었다.
몇 번 사귀어 본 남자애들과 수현은 달랐다. 대책 없이 시시껄렁하지도 않고, 무언가 깊은 곳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 아이들과 했던 게 그냥 연애의 흉내였다면 수현과는 정말 연인이라는 기분이었다. 그 때문인지, 수현과 같이 있으면 자꾸만.
가랑이가 젖고. 몸을 비비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얼굴이 빨개져서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고.
수현과 헤어지고 나면 집에서 수현을 생각하며 자위하게 된다. 절대 말할 수 없다. 해본 적도 없는 성행위를 자꾸만 갈망하게 된다. 이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팔짱을 끼고 싶어서 꼈는데 수현에게서 달콤한 체취가 나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안녕."
"으앗? 아우, 놀랐잖아 바보야."
갑자기 뒤에서 수현의 목소리가 들려 소희가 화들짝 놀랐다. 수현이 픽 웃으며 소희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그 단정한 옆얼굴을 소희가 빤히 쳐다보았다. 날라리처럼 수선하지도 않은 교복이 마치 정장처럼 잘 어울렸다. 갑자기 마구 수선한 자신의 발랑 까진 교복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진하 또한 수현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소희야."
"응?"
"나 니 남친 뺏어도 돼?"
이것 봐.
또다른 고민. 수현과 사귀는 건 좋은데 막상 사귀고 나니 주변에 경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장난처럼 말했지만 친구인 소희가 보기에 진하의 눈에 일말의 진심이 담겨 있다. 저뿐이 아니다. 수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지만 수현의 짝인 서은이라던지, 심지어는 수현의 친구인 박정태마저 경계대상으로만 보였다.
"이수현. 왜 이렇게 늦었어!"
"야. 아파. 임마."
정태가 수현에게 헤드락을 걸고 머리를 헝클었다. 남자애들끼리 연애관계로 엮는 걸 좋아하는 별스러운 취미의 여자애들 무리가 꺅꺅거리는 게 보였다. 소희가 한숨을 내쉰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수현은 너무 예쁘게 생겼다. 남자다운 정태와 투닥대는 걸 보면 그런 취미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수현. 박정태. 죽고 싶어?"
막 조례를 위해 들어서는 담임, 예지윤이 회초리로 문턱을 때리며 말했다.
"앗. 이따 봐!"
"응. 안녕."
진하가 후다닥 뒷문으로 나갔다.
소희는 팔을 엮어 책상에 올리고 턱을 괴었다. 소희는 느낄 수 있었다. 예지윤은 분명 수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의 육감이 위험신호를 울렸다. 다른 남자애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여성스러운 몸짓들을 수현에게만 내보인다. 성숙한 성인 여성에, 외모마저 연예인급이니 소희에게는 경계대상 일호였다.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수현이 싱긋 웃는다. 소희는 저도 모르게 수현을 따라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쟨 지금 내 꺼니까.
그러다가 소희가 얼굴을 찡그렸다.
조례 중에 수현의 짝 서은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서은은 소희나 진하처럼 노는 부류는 아닌고, 따지자면 공부하는 쪽인데 예쁘장한 값을 하는 것인지 꾸미는 것도 꺼리지 않아서 교복을 수선한다거나 귀걸이를 몰래 하기도 했다. 소희만큼은 아니지만 치마가 제법 짧다.
꾸벅꾸벅 조는 서은을 수현이 깨워주는데, 하필이면 서은의 허벅지를 손으로 잡고 흔드는 것이다. 치마 위도 아니고 맨살이었다. 둘 다 아무렇지 않은가. 저 둘은 워낙 허물 없이 친하게 굴어서 보고 있자면 짜증이 났다.
이수현! 왜 자꾸 허벅지 안쪽을 잡고 흔드는 건데! 어깨 있잖아! 소희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샤프 뚜껑을 깨물었다. 그래도 수현은 내 남자친구니까. 내 거다.
*
"주인님은 내 거야."
정하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올가가 뺨을 기울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카페에 마주 앉아 있었다. 긴 흑발에 믿기지 않도록 고혹적인 미녀, 정하와 아직 풋풋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슬라브 혼혈의 엘프 올가가 함께 앉아 있으니 시선의 태반이 그들에게 모여 있었다.
유리문으로 들어오던 이들이 그 둘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코를 박기도 했다.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동급생한테 마음이 끌리진 않을까요?"
"소희인가 걔를 신경쓰는 거니?"
"사귄다잖아요."
"주인님한테 물어보렴."
"물어보기가 좀…… 예브게냐 언니가 자기 카드로 막 선물했다고 칭얼대다가 어젯밤엔 주인님께 실신당했는데……."
올가가 빨대로 커피를 쪼옥거렸다. 정하는, 올가가 볼을 홀죽하게 열심히 빨아 마시는 모습을 보자 올가가 수현의 물건을 열심히 입에 머금고 빨던 때의 얼굴과 겹쳐져서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올가가 갸웃했다.
"좀 더 주인님한테 집중해봐."
"매일 주인님만 생각하는걸요."
"더 노력하면 너도 느낄 수 있을 거야."
정하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가늘게 웃었다.
"난 지금도 느껴지는데. 주인님은 나를 사랑해. 그것 때문에 행복해서 지금도 두근거려."
정하가 몽롱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못견디겠다는 듯 자기 몸을 슬며시 스스로 안았다. 올가는 정하의 낙인에서 마력이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올가가 배시시 웃었다.
"부럽다. 언니. 주인님 처음 만났을 때 어땠어요?"
"비밀."
"히잉."
올가가 귀엽게 입술을 삐죽였다. 정하가 턱을 기울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애절하게 쳐다보는 올가에게 손을 뻗었다. 올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하의 손이 올가의 턱을 감싸쥐고, 조금 잡아당기며, 그녀 또한 앞으로 나아가 올가의 입술을 훔쳤다.
한 미녀와 미소녀의 입맞춤에, 주위의 이목이 동요했다. 숨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본다. 정하의 키스를 올가는 입술 전체로, 그리고 입술을 열고 들어오는 보드라운 혀를 그녀 자신의 혀로 느꼈다. 주인님의 키스만큼이나 황홀하다. 올가가 몽롱한 얼굴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오늘 주인님한테 같이 갈까?"
정하가 올가를 몇 번 귀여워해주었고, 그걸 본 수현이 정하와 함께 올가를 희롱한 적이 있었다. 올가는 마치 어린애가 된 것처럼 펑펑 울며 완전히 늘어져 정신을 잃었다. 뇌의 퓨즈가 나갈 정도로 엄청난 경험이었다. 그때를 다시 생각하자 벌써부터 가랑이가 저려오며 오싹오싹했다. 올가의 뺨이 붉어진다.
올가의 숨이 가빠진다. 정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가도 뒤따라 엉거주춤 일어난다.
"일단 집으로 가자."
정하가 올가에게 속삭였다. 섹시한 목소리였다. 올가가 정하의 옷자락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