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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낙인의 주인
<정하와 예브게냐가 싸울 때, 수현>
수현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하에게서 컴퓨터를 빼앗아 숙제를 했는데, 프린터가 고장나 문서를 인쇄할 수 없었다. 피씨방에라도 가야할 것 같다. 거실을 보니 정하도 없다. 게임 하고 싶어서 먼저 피씨방에 간 모양이다. 이 폐인 같으니라고. 예브게냐한테 걸리면 어떡할 생각인지.
수현이 오피스텔을 나와 터벅터벅 피씨방을 향했다.
거리는 네온사인간판들이 반짝이며 색색으로 빛난다. 연인들이 달라붙어 밀어를 속삭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쳐다보며 수현은 문득, 세연을 생각했다.
언뜻, 그런 얼굴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아니다. 세연이었다.
세연은 한 소년과 함께 웃으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둘의 거리가 가깝다. 세연은 머뭇거리다가 슬며시 소년에게 팔짱을 꼈다. 소년도 어색해하면서도 기분 좋은 듯 입꼬리가 씰룩이고 있다. 수현의 걸음이 느려졌다.
세연이 삼주만에 학교에 돌아온 이후, 세연을 사모하던 남학생이 고백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삼주동안 걱정되어 잠도 못잤다는 그의 고백에, 세연이 머뭇거리다가 오케이했다고 한다. 제법 유명한 이야기였다. 세연은 예쁘니까,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왠지 속이 쓰리다.
행복하게 불빛 속으로 사라지는 둘을 보면서 수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가슴이 답답하다. 아,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세연의 얼굴은 언제나 급박하게 쫒기는 얼굴, 고통 받는 얼굴, 눈물 흘리는 얼굴이었다. 남자들에게 겁탈당하는 충격으로 기억을 잃고 잠자던 그때가, 수현이 아는 가장 평온한 얼굴이다.
세연 선배가 웃고 있네.
질투하는 걸까?
아니, 전혀.
수현이 이마를 감쌌다. 지끈거린다. 아니, 그저 미안할 뿐이다. 선배는 나를 위해 위험을 무릅썼지. 빚은 갚았다. 때문에, 더 이상 그녀를 신경쓰지 않아도 될 터인데. 왜 나는 몸을 가눌 수가 없을까. 수현이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처럼 그믐이다.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잘된 일이다. 그녀는 저렇게 사는 게 행복할 것이다.
잘 살아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현이 속으로 한 마디, 던졌다. 세연과 남자친구가, 잠깐 멈추어서 가볍게 입맞추는 게 보였다. 세연도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입술을 맞대고 있다. 수현이 고개를 돌렸다.
터벅터벅, 걸어간다.
취객이 흘리는 담배연기가, 그의 코를 타고 폐로 스민다. 쓰다.
발끝이 자꾸만 갈 길을 잃고 헤맨다. 프린트, 학교숙제,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네온사인 번뜩이는 도시의 밤, 그 한복판에서 수현은 멈추었다.
정하에게 뺨을 맞던 그 날, 그 날의 환상.
언제나와 같은 날들을 흥이라고는 없이 챗바퀴를 밟으며, 나날이 죽음을 향해 수렴해가는 삶을, 그저 감내하고만 있었다. 우주의 먼지의 먼지에 불과한 지구에서조차 먼지에 가까운 작은 존재로서 하루하루 연명하며, 삶은 본래가 평범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고등학생이었다.
하지만 학교 뒤켠에서 정하에게 얻어맞는 세연을 발견했을 때, 그의 일상은 반전했다.
정하에게 인간을 벗어난 힘으로 얻어맞고, 세연이 구해주었을 때, 수현의 지루한 일상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세연의 얼굴을 처음 마주했을 때, 수현의 내면은 이를 통찰했을까.
세연을 처음 본 그 때에, 늘상 지루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수현은, 살아가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던 소년은, 그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한 순간, 삶이 급변하는 한 점에서, 수현과 세연은 만났으니까.
하지만 세연은 그를 남기고 떠났다.
도시의 정글에 혼자 남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수현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눈을 감는다.
어쩐지, 가슴이 젖어들었다.
그때였다.
……주인님.
문득,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수현, 그를 부르고 있었다.
정하다.
정하의 낙인이 수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아.
그랬지.
수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예브게냐와 싸우다가 당하는 중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당했을까. 몸이 찢겼을까. 사지가 부러졌을까. 강간당하고 널부러졌을까.
죽지만 않았다면, 누구에게 어떻게 당해도 괜찮다.
정하가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정하, 수현의 아름다운 노예. 그에게만 복종하는 고혹적인 뱀파이어. 이젠 그녀가 수현의 곁에 있었다. 잊고 있었다. 수현이 미소짓는다. 모든 것들이 그의 뒤로 지나쳐 갔고, 이제 곁에 선 것은 정하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세연과의 만남이 수현을 정글로 이끌었고, 정글에서 수현은 자신의 혈통을 되찾았다.
나는…….
수현의 걸음이 빨라졌다. 차츰, 달려갔다.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수현은 어둠에 스며들었다. 포식자의 기운이 흘러나오며,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정하의 낙인이 수현을, 주인을 애타게 부른다.
이제 정글이 그의 영토였다. 낙인의 주인이 날개를 펼쳤다.
*
<그리고 현재, 공터.>
김상호는 공포로 굳어버린 머리를 억지로 굴리며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다.
정하가 미확인 능력자에게 패하고, 부하들을 모두 잃고 도주했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헛소문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미확인 능력자에게 정하는 종속당했다. 그리고 그 미확인 능력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어린 소년이다. 몸도 호리호리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에서 미증유의 힘이 흐르고 있다. 달빛조차 먹어버리는 까마득한 어둠이다.
본능이 외쳤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공격해!"
싸울아비 클랜의 마스터가 소리쳤다. 잔존한 클랜원 중 일부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두른 어둠이 확장하며 그들을 휘감아 삼켜버리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갈기갈기, 형체조차 보이지 않게 분해되어 흡수되는 것을, 김상호는 라이칸스로프의 시력으로 목격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저건 말도 안되는 힘이다.
저 정체불명의 꼬마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정체불명의 힘이 공터를 잠식하고 있었다. 김상호가 한 걸음, 뒤로 내딛었다. 살아야 한다. 정글에선 생존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 김상호는 힘을 사그라뜨리고, 어떻게든 살 방도를 모색한다.
수현은 곁에 선 정하를 쳐다보았다. 엄청 당한 얼굴이었다. 가엾어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누나. 지금 피 빨아요."
"주인님 최고."
정하가 엉망인 얼굴로 씩 웃으며, 수현의 목을 끌어안고 송곳니를 박아넣었다.
수현의 기운이 그녀에게 이어질수록, 그녀의 상처가 점점 회복되며 기운이 차올랐다. 그녀의 몸에 활력이 돌아왔다. 기운이 제법 고갈되었었는지, 꼴깍꼴깍, 평소보다 더 열심히 빨았다.
그 반동으로 수현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예전처럼 형편 없이 주저앉아 버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흡혈의 쾌락은 장난이 아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정하는 듯한 기분에 부끄러움도 느껴진다. 수현이 정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정하는 어린 아이처럼 수현의 피를 탐하고 있다.
마침내 흡혈이 끝나고, 정하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수현에게 키스했다. 둘의 점막이 얽히며 설육이 끈적하게 엉겨들었다. 보는 이들이 몽롱해질만큼 농밀하게 입을 맞추던 수현과 정하의 입이 떨어지며, 타액으로 선이 이어졌다. 그 선을 다시 삼키며 정하가 수현의 입술에 쪽, 하고 가볍게 입술을 맞댄다.
정하의 상처들은 모두 아물어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썼지만, 그녀의 몸에 가득한 요기가 파지직거리며 공기를 일그러뜨린다. 순식간에 부활한 정하의 힘에, 적들이 침을 삼켰다.
"후후, 이젠 다 패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누나, 늦었잖아요. 빨리 집에 가요."
둘이 노닥거리는 행태에, 용잡이 클랜의 마스터와 그의 심복이 나섰다.
"싸우는 도중에…… 쳐돌았냐!"
용잡의 클랜의 마스터 용호가, 태도를 횡으로 베었다. 검기가 뿜어져 나와 수현에게 쳐박힌다. 수현이 어둠을 흩뿌려 그의 힘을 빨아들였다. 허공에 던져진 먹이를 짐승이 삼킨 것처럼, 암흑이 그 공격을 먹어치웠다.
"씨발……."
용호가 한 발 물러났다.
이제 남은 것은 각 클랜의 마스터들과, 사예바, 그리고 몇몇의 정예들 뿐이다. 수현이 한 걸음 내딛었다. 동시에 수현이 두른 암흑의 군세도 그들에게 한걸음 다가간다. 아래로 아래로, 낮게 깔린 어둠이 확장하며, 그들의 발목께를 덮어갔다.
"한꺼번에 덤벼!"
용호가 소리쳤고, 모두 수현을 향해 공격했다. 김상호 또한 어설프게나마 수현에게 달려들어 육중한 손톱을 휘둘렀다.
동시에, 수현의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갈고리 모양으로 변한 포식자의 마기가, 가까이 닿은 이들의 목을 일제히 토막냈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공격자들의 목이 동시에 허공을 가른다.
곳곳에서 피분수가 치솟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반사적으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몇몇 클랜의 마스터들과, 사예바, 김상호는 간신히 공격을 피해 치달리고 있었다. 생존에 대한 일념으로 수현의 공격을 피했다. 터무니 없는 힘이다. 용호가 결국 발목을 붙잡혀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클랜의 마스터답게, 끌려가면서도 몸을 일으켜 수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정하가 날아올라 그를 낚아채더니, 허공에서 열 여섯 토막으로 잘라버렸다. 그의 시신이 허공에서 떨어져 바닥에 펑, 펑, 떨어졌다.
수현이 바닥에 널부러진 예브게냐를 안아올렸다.
"주인님. 도망가는데, 죽일까?"
예브게냐를 안아올리는 게 못마땅한지 정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사예바와 김상호, 그리고 싸울아비 클랜의 마스터만이 살아남아 허겁지겁 도망가고 있었다.
"누나. 저 여자는 퀸즈 네스트 클랜 아니었어요?"
"배신한 것 같던데."
"으음…… 그래요."
수현의 힘이 날아가 김상호와 싸울아비 클랜의 마스터의 목을 날렸다.
홀로 남은 사예바만이 주저앉아, 덜덜 떨며 수현을 쳐다보았다.
"저건 예브게냐 씨가 직접 처리해야겠죠."
수현이 공터에 가득한 시신들을 돌아보았다. 온통 시체로 가득해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바닥이 온통 피에 젖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시체 조각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스캐빈져들이 달그락거리며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글의 모든 싸움 끝에는 스캐빈져의 포식이 있다. 그들이 승자의 눈치를 살피며, 그 어둔 형태로 시체들 틈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게 싸울 거면 나한테 말하라니까."
"혼자서도 예브게냐는 이겼거든? 갑자기 저놈들만 안나왔어도……."
"거짓말. 난 다 봤는데."
"뭘?"
"누나가 예브게냐 씨 앞에서 무릎 꿇고 할짝할짝……."
"뭐, 뭣. 그걸 보고만 있었다고!?"
정하가 수현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수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하와 수현의 등에서 날개가 뻗어나오며, 둘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둘이 떠나고, 싸움의 흔적이라고는 남지 않은 공터에, 사예바 홀로 남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혼자 살아남았다. 하지만 방금의 전투로, 사예바는 모든 걸 잃었다. 퀸즈 네스트 클랜에서의 지위, 배신하면서까지 획책한 권력 찬탈도. 방금 본 믿을 수 없는 힘을 생각하며, 비칠비칠 걸음을 옮겼다. 저런 괴물을 당해낼 수는 없다.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정하의 애인인 줄 알았는데.
문득, 진동이 느껴졌다.
사예바가 고개를 돌렸다.
스캐빈져들이 시체들을 씹어 삼키며 포식하는 그 음침한 광경 사이에서, 김상호, 라이칸스로프의 시체만이 목과 몸뚱이가 분리된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섬뜩하다. 사예바가 주춤하는 순간, 목 없는 몸뚱이가 움직이더니, 자신의 머리를 잡았다.
사예바가 입을 벌렸다. 라이칸스로프는 스스로 떨어져나간 머리를 붙잡아 자신의 목에 갖다대더니, 가공할만한 재생력으로 스스로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핏줄과 신경이, 뼈가 스스로 살아있는 생물처럼 요동치며 서로를 이어갔다. 결국 하나로 연결된 몸뚱이와 머리는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사예바가 입을 벌렸다.
"저건 말도 안되는 개새끼야."
김상호가 말했다. 회복된 몸이 천천히 수축하며, 다시 덩치 큰 사나이의 모습이 되었다. 변신의 여파로 벌거벗은 알몸이었다. 그가 흘끗, 사예바를 바라본다.
"네년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이렇게 됐잖아!"
그의 손이 사예바의 뺨을 때렸다.
"아흣!"
사예바가 넘어졌다.
"저놈 누구야?"
"죄,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김상호의 발이 사에바의 목에 올라가 서서히 숨통을 조인다. 사예바가 발버둥쳤다.
"정하의 애인……인 줄 알았는데……."
"애인? 웃기는군."
김상호가 사예바의 옆구리를 찼다. 사예바가 피 섞인 기침을 했다.
사예바가 예브게냐를 배신했던 이유.
"일을 제대로 못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죄송합니다……."
사예바는 김상호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김상호가 품에서 흰 가루를 꺼내어, 벌거벗은 자신의 물건에 흩뿌렸다. 사예바의 눈이 몽롱해지며 김상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이미 이 약물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녀가 김상호의 물건을 빨기 시작했다. 김상호가 그녀의 젖꼭지를 쥐고 비틀었다. 사예바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정신 없이 그의 물건을 핥는다.
김상호가 발로 사예바를 걷어차 넘어뜨리고는, 개처럼 엎드린 자세를 만들어 뒤에서 사예바의 꽃잎을 헤집고 쑤셔박았다. 분노와 굴욕의 감정을 사예바에게 풀어내고 있었다.
"기어코…… 이 굴욕, 복수하겠다."
김상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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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러분 진정하십시요 요한은 여러분을 해치지 않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