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28화 (28/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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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낙인의 주인

<며칠 전, 수현이 예브게냐의 힘을 흡수한 다음 날.>

세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이다. 자신의 집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잔 기분이었다. 기지개를 켜자 온몸이 우두둑, 팔다리도 왠지 가늘어진 것 같다. 세연은 자신의 손바닥을 계속해서 내려다보다가,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햇살이 내리쬐이고 있다. 세연은 왠지 기분이 좋아서 생글 웃었다. 얼떨떨해서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잠을 자는 동안 아주 행복한 꿈을 꾼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발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왠지 모를 행복감이 몸에 가득하다.

우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렸다. 하지만 힘들여서 균형을 지키고 있어보니 움직일만 하다. 세연이 비틀비틀 부엌으로 걸어갔다. 벽을 짚고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도달했다.

배고파.

하지만 마땅히 먹을 건 라면밖에 없었다. 라면을 두 개 끓였다. 두 개로도 부족할 것 같은 기분이지만 숙녀로서 세 개나 먹는 것은 스스로에게 미안해진다. 물을 올리고 쇼파에 앉아 멍하게 생각했다.

"세연 양. 잠은 잘 잤나?"

세연이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현관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 잿빛 눈동자의 사나이, 요한이었다.

"아?"

"뭐야, 그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얼굴은."

"무슨 일 있었어요?"

요한이 구두를 벗고 걸어와 세연의 곁에 앉았다. 세연이 몸을 살짝 떨어뜨렸다. 이 남자는 어렵다. 이 남자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마지막 기억은, 학교에서…….

정하를 만났다.

그렇다. 세연은 정하에게서 쫒기고 있었다. 최대한 숨어지냈지만, 결국 학교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 악마같은 여자를 만난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세연이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 이후의 모든 기억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를 만나고, 그리고 바로 지금이었다. 머리를 돌리다가 문득, 자신의 몸을 보았다.

처음 보는 잠옷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죠?"

"세연 양의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삼주쯤 지났겠군."

"삼주……?"

요한이 말했다. 정하가 그녀를 습격했다. 정하의 공격에 세연은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지만, 마침 철십자 클랜이 정하를 뒤쫒던 중이라 세연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철십자 클랜과 전투 중에 도망친 정하는 알 수 없는 능력자에게 격퇴 당해 종적을 감추었고, 정신을 잃은 세연은 철십자 클랜의 보호 아래에 삼주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네요."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 마."

요한이 웃었다.

"널 열심히 돌봐준 꼬마가 있었으니까."

"그게 누구죠?"

"알려줄 순 없어. 앞으로 볼 일도 없고."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그러지."

세연이 물끄러미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새삼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었다. 정하에게 패한다는 것은 그녀의 노예가 되어 그녀의 뜻대로 사는 노리개가 된다는 뜻이다. 악명 높은 흡혈귀에게서 살아남은 것은 천운이다.

"저한테 뭘 원하죠?"

세연이 말했다.

"정하에게서 구해주고, 돌봐주었으니 무언가 원하는 게 있겠죠?"

"없어."

요한의 말에 세연이 새삼 그를 쳐다보았다.

정글에 공짜는 없다. 철십자 클랜에 합류하여 그들 밑에서 몇 년간의 가혹한 계약을 맺는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걸까.

"조용히 살고 싶지?"

요한의 말에 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싸우고 죽이는 정글은 지쳤다. 정글에서 이름을 떨치며 얻은 것도 있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어린 여학생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이상의 돈을 얻었고, 스스로도 강해졌다. 하지만 너무 가혹한 곳이다. 세연은 평범한 여자애로 살고 싶었다.

"자. 이걸 쓰면 네 능력을 감춰줄 거야. 누구도 널 분간할 수 없다."

요한이 목걸이를 건냈다. 평범한 목걸이였다. 다만 붉은 돌이 휘감겨 있어, 그 안에서 불길이 일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아티팩트는 흔하지 않다. 세연이 그것을 손바닥으로 감싸쥐었다.

"그럼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 그게 조건이다."

세연이 요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요한이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그냥 선물이야. 세연 양."

요한이 일어섰다.

요한이 현관으로 걸어가자, 세연도 따라 걸어갔다. 요한에게 꾸벅, 인사한다.

긴 잠이었다. 행복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잠에서 일어나니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 있었다.

마법 같다.

"……?"

요한이 문 밖의 누군가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클랜원이 기다리고 있었나 싶었는데, 요한이 되돌아와 세연에게 무언가를 건냈다.

"뭐죠?"

"죽이야. 오래 굶었으니 라면 먹으면 토할 걸."

밖의 누군가가 준 것일까.

요한은 그럼, 하고 문을 나갔다. 문이 닫힌다.

홀로 집 안에 남아, 세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슬리퍼를 신고 현관을 열어 집밖을 빼꼼, 쳐다보았다.

요한과 누군가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소년이다. 요한과 이야기하며 흘끗, 보이는 옆얼굴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다. 되게 예쁘게 생겼다. 저런 애와 한 번이라도 봤다면 잊지 않았겠지. 세연은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

죽이 따뜻하다. 기분이 좋아서 헤헤, 웃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

요한이 수현을 내려다보았다.

"넌 꼬마가 왜 그리 음침해? 사실대로 말하면 되잖아."

"선배는 이제 행복할테니까 그걸로 만족해요."

수현이 말했다. 멘탈마스터의 능력을 흡수해, 세연의 기억을 지웠다. 세연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녀를 족쇄에서 풀어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요한 씨."

"집어쳐. 다음에 일 생기면 네가 한 번 처리하는 거다."

"네."

요한이 입에 담배를 물었다. 문득 수현에게 말했다.

"너도 필래?"

"……하나만요."

수현이 담배를 받았다. 피지도 않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쓰다. 포식자의 몸이 되어 너무나 강건해진 몸은, 쉽사리 콜록거리지도 않고 늘 받아들이던 것처럼 연기를 받아냈다.

"아쉬운 척 하지 마."

"네?"

"너 정하랑 맨날 하지?"

수현이 콜록거렸다.

"걔 하나면 됐지, 뭘 아까워 해?"

"그, 그만."

"알았어. 알았어. 비밀로 해준다."

수현이 얼굴을 붉혔다.

요한은 멈춰서서 잠시 수현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등장한 이 소년이 정하를 굴복시키고,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지만 스스로 나서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자신들을 제하면 소년의 존재조차 모를 것이다. 요한은 이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여자애처럼 생겨서는.

부드럽게 쌍커풀진 커다란 눈동자와, 곧은 콧날, 그리고 도톰한 입술에, 턱선은 갸름하다. 몸도 가녀려서, 사복을 입으니 중성적인 이미지가 도드라졌다. 흰 얼굴은 표정이 풍부해서 금새 붉어지기도 하고, 파랗게 질리기도 했다. 수현이 이렇게 난감한 듯 올려다보며 입술을 삐죽이면, 촉촉하게 젖은 분홍색 입술이 가까이 다가와서, 난감하다.

요한이 수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수현이 갸웃하며, 요한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키스하고 싶다.

요한은 생각했다. 이 매끄러운 피부에 손끝을 얹고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고 싶다. 이토록 아름다운 생물을 나는 본 적 있던가.

요한이 불쑥, 고개를 내밀어 수현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맞대었다.

수현의 눈이 커졌다.

부드럽고 촉촉한 게, 입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아."

수현이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다음에 보자고. 꼬마."

그가 웃는다.

요한이 몸을 돌렸다. 수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를 내야하는 건지 고민했다. 화는 나지 않았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다. 바보 같아. 입술에 남은 감촉을 되새기며,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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