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27화 (27/180)

0027 / 0180 ----------------------------------------------

6. 낙인의 주인

"그래, 즐거운가?"

목소리에, 사예바와 예브게냐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한 사나이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사람인 줄 알았으나, 아무도 없던 공간에서 하나하나,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빈 공간에서 무수한 인원이 쏟아져나왔다.

보이지 않는 휘장을 들춰낸 것처럼.

사나이의 곁에서 한 여인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주술로 이들이 접근하는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선 사나이의 얼굴에는 비열한 미소가 드리워 있다. 삭풍 클랜의 마스터, 김상호였다.

"나만큼이나 취미가 더럽군. 멘탈마스터."

"넌 뭐야?"

예브게냐가 짜증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눈앞의 인원을 보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세 개의 이름난 클랜과 여러 중소규모의 클랜들이 모여 있었다. 백 명 가량이었다. 그들 모두 잔뜩 긴장하여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웃기는군."

그 순간, 예브게냐에게서 다시금 정신지배의 장막이 펼쳐졌다. 단숨에 그들 전체의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 칼부림과 능력과 마법이 터져나왔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예브게냐가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하군. 겨우 그걸로 나한테 덤빈 거야?"

하지만 여전히 김상호는 웃고 있다.

"예브게냐, 정글의 룰을 알고 있나?"

"승자는 모든 것을 취한다."

예브게냐가 웃음을 거두었다.

"내 즐거움을 방해했으니, 널 어떻게 해도 괜찮다는 뜻이지."

"때때로 다른 상황에 적용되기도 한다."

예브게냐의 정신지배가 풀렸다.

예브게냐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혼란에서 벗어난 클랜원들이 몸을 추스르는 게 보였다. 김상호의 웃는 얼굴이 역겨웠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피묻은 칼날이 보인다.

자신의 배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피가, 옷을 적셨다.

"아……아?"

예브게냐가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보다도,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뒤에서, 칼이 들어왔을까. 예브게냐의 뒤에 있던 것은, 오로지.

"사예바……?"

"유감이군요."

사예바가 어깨를 으쓱했다. 김상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배신자지만 그래도 이겼으니, 그녀가 옳다."

예브게냐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장난감이었다. 멋대로 정신을 읽어들이고, 해부해보고, 조종할 수 없는 꼭두각시였다. 하지만 단 하나, 사예바만은 그녀의 정신지배가 소용 없는, 한 명의 동료이자 친구였다. 오랜 시간 예브게냐의 비서로서 함께 싸웠다. 그녀가 믿는 단 한 사람이었다.

예브게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해할 수가 없다.

"멍청한 년아!"

그 순간 핏빛 폭풍이 허공을 갈랐다.

예브게냐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정하였다. 그녀에게 얻어맞은 사예바가 날아가 땅에 쳐박혔고, 예브게냐를 붙잡은 정하가 날아올랐다. 적들에게서 원거리 공격이 쏟아졌다. 정하가 곡예하듯 날개를 펼쳐 공격들을 피해냈다.

하지만 공터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계가 펼쳐져 있어서, 둥근 감옥에 갇힌 것처럼 그 너머로 날아갈 수 없다.

"멍하게 있지 말고, 능력을 써!"

"사예바가……."

정하가 예브게냐의 뺨을 때렸다.

"나중에 그년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저놈들부터 없애란 말야!"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예브게냐가 지상을 쳐다보았다. 결계로 인해 고도는 그리 높지 않다. 몸을 일으키는 사예바와, 재미있다는 듯 히죽거리는 김상호가 보였다. 그리고 수많은 클랜원들과 클랜 마스터들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순간 치밀어오른 것은 분노다. 예브게냐의 몸에서 다시금 정신지배의 힘이 줄기줄기 뻗어져나왔다. 순식간에 몇몇 약한 인원들의 정신이 끊어지며,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에 정하의 날개 하나가 격중되었다. 정하가 필사적으로 속도를 죽이며 바닥에 착지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예브게냐가 피를 토했다. 정하가 그녀의 앞에 서서, 투기를 일으킨다.

"잘 들어, 약해빠진 계집애야. 니가 가진 건 그 정신지배밖에 없으니까, 최대한 조무래기들을 없애. 난 접근하는 놈들을 막을 테니까."

예브게냐가 복부를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가 피의 지배력을 이용해 출혈은 멎게 했지만, 배를 관통당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예브게냐가 눈을 부릅뜨며 선두에 선 김상호를 향해 정신지배를 사용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김상호 또한 정하와 같이, 그녀의 정신지배를 가드하고 있었다. 정하에 비하면 견고한 방어는 아니다. 그녀의 힘으로 찢어발길 수 있다. 하지만 주위에서 밀려드는 공격들이 문제였다. 적들이 너무 많다.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정하가 핏빛 칼날을 쏘았다. 몇몇이 맞고 뒹굴었지만, 그걸 피해내고 달려드는 재빠른 몸놀림의 무도가들도 있었다. 정하와 그들의 신형이 뒤엉킨다. 예브게냐가 정신지배를 사용해 그들을 무력화시켰다.

일순간, 정하 주위의 적들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틈을 타 정하가 그들을 공격했다. 생과 사가 일순간에 겹쳐지며, 목이 날아갔다. 정하가 나머지를 모두 짓밟아버리려는 순간이었다.

사예바가 예브게냐를 공격해들어왔다.

정신지배가 풀린다. 적들이 정신을 차리고 정하에게 반격했다. 그녀의 몸에 상흔이 쌓여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정하는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예전처럼 단숨에 쓸어버릴 수가 없다. 예브게냐를 도우러 몸을 날린다.

사예바의 공격에, 예브게냐가 온몸의 힘을 그러모아 그녀의 뇌를 공격해보았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사예바는 날 때부터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강력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난 힘들 중에 정신지배에 상극하는 힘이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전혀 통하지 않았다. 사예바의 주먹에 얻어맞기 직전 정하가 사예바를 걷어찼다.

사예바가 넘어졌다. 정하는 그틈에 예브게냐를 안아올려 거리를 벌린다. 사예바와 적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둘러싸고 있었다.

김상호가 걸어나왔다.

"과연, 정하와 예브게냐로군. 그 상태로 이렇게까지 저항하다니."

"넌 뒤에서 숨지만 말고 덤벼. 쓰레기야."

정하의 도발에, 김상호가 씨익 웃는다.

그 순간, 김상호의 몸이 변해갔다.

덩치가 부풀어오르고, 터럭이 줄줄 새어나왔다. 이빨이 커지고, 주둥이가 튀어나온다. 옷이 찢겨나가고 두배에 가까운 크기로 변했다. 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기운이 달라졌다. 지독한 패기였다.

정하가 입을 다물었다.

"마음에 드나?"

"라이칸스로프……."

뱀파이어와 함께 모두가 두려워하는 전설 속의 존재, 김상호는 라이칸스로프였다. 그의 온몸의 근육이 약동하며 드러난 그는, 라이칸스로프 종에서도 전투력이 최상위에 속하는 웨어 타이거였다.

그의 이마에 새겨진 줄무늬가 일그러지며, 호랑이 얼굴의 괴물이 비릿하게 웃었다.

"자, 계속해볼까?"

그가 순식간에 돌진했다. 정하가 피를 뿌려 힘의 역장을 펼쳤다. 김상호가 거기에 부딪쳐 주춤했지만, 몸을 뒤로 젖히더니 단숨에 방어막을 후려쳐 부수어버렸다. 무지막지한 힘이다. 정하가 예브게냐를 이끌고 몸을 피했다.

"둘 다 지쳤다. 족쳐버려!"

김상호가 소리치자, 클랜원들이 달려들었다. 정하가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그들과 뒤섞였다. 피와 비명이 터져나왓다. 이런 난전 속에서도 정하는 착실히 적들을 죽여나가고 있었다.

일부는 예브게냐에게 접근했다. 예브게냐가 눈을 감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가진 모든 힘을 발산한다. 멘탈마스터의 권능이 일순간 공터를 휩쓸었다.

"이이이이이잇!"

예브게냐가 이를 악물어, 그 틈새로 비명이 새어나온다. 그녀가 현재 사용가능한 최대치의 정신지배력이었다. 일반 클랜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김상호나 사예바, 클랜의 마스터들 같은 강한 이들은 필사적으로 버티는 모습이었다.

정하 또한 핏빛 칼날을 무작위로 쏘아대며 적들을 찢어발겼다.

둘과 수십의 싸움. 하지만 둘은 수십을 상대로 오히려 적들을 도륙하고 있다.

그들을 상대하던 클랜원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괴, 괴물들……."

"저런 상태로도……."

"미쳤어."

극동 최강의 뱀파이어, 악몽 정하.

퀸즈 네스트 클랜의 여왕, 멘탈마스터 예브게냐.

과연 공포의 이름들이다. 클랜원들은 전율했다.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오히려 엄청난 수의 격차를 이겨내는 힘! 과연 이름을 떨친 괴물들이다. 클랜원들에게 공포의 감정이 싹텄다.

하지만, 예브게냐와 정하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둘이 지치기를 기다리던, 진짜 강자들이 움직였다.

사예바와 김상호, 그리고 다른 클랜의 마스터와 간부들이 뛰쳐나갔다. 정하와 예브게냐가 저항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역부족이었다.

사예바가 달려들어 예브게냐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정하 또한, 갑작스러운 김상호의 일격에 얻어맞고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정하가 피를 토했다. 결국 둘은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제압당했다.

"제법 재미있었어."

김상호가 기다란 짐승의 혀를 내밀어 정하의 뺨을 핥았다.

승리는 언제나 기분 좋다.

승리한 후에 그를 기다리는 만찬 또한, 그를 흥분케 한다.

"우리의 승리인가."

클랜의 마스터들이 김상호에게 다가왔다. 사예바 또한 예브게냐를 질질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둘은 패배했다. 이곳은 정글, 패자의 모든 것은 승자에게 복속된다.

"벗겨라!"

승자의 쾌락!

패자의 굴욕!

예브게냐의 정하는 형편없이 패배한 몰골로 그들 앞에 무방비로 축 늘어져 있었다. 김상호 곁으로 살아남은 이들이 걸어왔다. 그들 또한 축배를 원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

승리감에 도취한 김상호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찰나였다.

ㅡ웃지 마라.

라고, 목소리가 있었다.

김상호가 멈추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던 웃음이었는데,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온몸이 경직된다. 움직이질 않았다. 그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있었다. 마치, 예브게냐의 정신지배에 당한 것처럼. 눈을 굴려 예브게냐를 보았다. 예브게냐는 정신을 잃었다. 사예바에게 붙잡혀 능력을 쓸 기운이라곤 없었다.

김상호의 입이 벌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ㅡ이리 와.

그의 손아귀에 있던 정하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뒤쫒는다.

정하가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올라, 공터의 끝에 내려앉았다. 그곳에 서 있는, 한 사람의 그림자 아래에 무릎 꿇었다. 모든 경의를 담은 몸짓이었다.

정하가 그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너덜너덜해진 상의가 아래로 쳐지며, 그녀의 가슴과 쇄골 사이에 새겨진, 선명한 종속의 낙인이 드러난다.

낙인은 붉게 타오르고 있다.

"정하가…… 종속되었다고? 그 반대가 아니라?"

악몽, 종속의 낙인을 가진 자, 극동 최강의 뱀파이어에게 주인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자리한 명백한 종속의 낙인.

그 광경이 뜻하는 바에, 모두가 전율했다.

이건 무엇인가. 김상호는 문득, 한기가 불어닥치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는 추위가 아니다. 온몸이 떨고 있었다. 본능이 비명을 지른다. 도망치라고, 공포로 덜덜 떨고 있었다. 이 순간 그 공포를, 이 자리의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광폭한 기운이 뿜어져나왔다. 김상호는 다리에서 힘이 풀려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천적을 만난 짐승이 할 수 있는 것.

포식자를 만난 초식동물이 할 수 있는 것.

공포가 그들을 잠식하고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유려한 얼굴, 수현이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