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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낙인의 주인
운무시의 외곽, 건설공사가 중단된 공터.
공터의 상공에서 헬리콥터가 고도를 낮추며 접근하고 있었다. 프로펠러 바람에 모래가 휘날리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기체가 서서히 착지한다. 프로펠러는 서서히 감속하다가 이내 멈추었다.
헬리콥터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려 낀 미녀, 예브게냐가 나타났다. 그녀가 사뿐사뿐 공터로 내려왔다. 대기하고 있던 클랜원들이 예브게냐를 향해 고개 숙였다. 예브게냐가 공터를 둘러보았다.
"정하가 여기로 온다고 합니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비서, 사예바가 속삭였다.
사예바의 말에 예브게냐가 씨익 웃었다. 그녀에게서 멘탈마스터의 힘이 퍼졌다. 소용돌이치는 정신지배의 파동에 곁에 서있던 클랜원들이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달렸다. 한 둘은 바닥에 주저앉는다. 하지만 예브게냐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서 뿜어져나온 정신지배의 힘이 더욱 강해진다.
"마스터."
사예바의 말에, 예브게냐가 기세를 거두었다.
현재 공터에 모여 있는 것은 삼십 명 가량의, 퀸즈 네스트 클랜의 정예들이다. 모두 정하와의 일전을 준비한 실력자들이었다. 곧 시작될 싸움에 대비해서 각자가 몸을 풀며 긴장을 끌어올렸다.
예브게냐가 정하는 오지 않냐고 사예바에게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콰콰쾅!
클랜원의 무리 사이로, 검은 물체가 날아와 쳐박혔다. 그 여파로 클랜원들이 휩쓸려 넘어지고, 부딪쳤다. 직격으로 맞은 클랜원은 피를 토해내며 콜록거렸다. 순식간에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시야가 흐릿하다.
날아온 것은 사람의 육체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의식조차 없다. 모두가 자세를 가다듬으며 물체가 날아온 곳을 쳐다보았다.
예브게냐는 처음부터 물건이 날아온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사예바 또한 그곳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기운이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는 허공의 한 점.
그곳에,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을 가리고, 흑발을 휘날리는 미모의 여성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송곳니가 달빛을 받아 번뜩인다. 그녀의 온몸에서 핏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악몽, 종속의 낙인을 이어받은 자, 극동 최강의 뱀파이어.
"정하!"
예브게냐가 환희하듯 외쳤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정신지배의 기운이 쏘아져나가 정하의 머리를 휘감았다. 하지만 정하의 핏빛 기운이 머리를 가드하고 있었다. 과연, 쉽게 지배할 수는 없다. 예브게냐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정하 또한 예브게냐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 때의 꼬마가 이렇게 컸네. 너 이름이 뭐더라? 예리겔라?"
"예브게냐다-!"
예브게냐의 기운이 강해졌다. 정하의 머리를 지배하진 못했지만, 그 여파로 지끈거리는 두통이 올라왔다. 정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상상 이상으로 강해져서 돌아왔다. 우물거리다간 머리를 제압당할 것이다.
정하가 힘을 끌어올려 핏빛 칼날을 예브게냐에게 쏘았다.
허공을 찢어발기며 핏빛의 기운이 예브게냐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클랜원 중 하나가 방어막을 펼쳤다. 방어막을 뚫고 쇄도하는 기운을, 사예바가 막아냈다. 정하가 머리를 부여잡는다. 예브게냐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기운은 점점 세를 넓혔다.
"몇 년간 오늘만 기다렸어, 뱀파이어!"
"정말 쪼잔하네."
예브게냐의 분노를 웃어넘겼지만, 정하의 뇌를 짓누르는 격통의 빈도는 잦아지고 있었다. 몸에서 핏기를 끌어올린다. 주인님의 피를 더 먹어둘걸, 후회하면서 정하는 몸을 휘도는 붉은 기운을 터뜨렸다.
일순간 예브게냐의 정신지배가 주춤하며 물러났다.
정하는 남은 기운을 끌어올린다. 저 클랜원들을 정리해야했다.
예브게냐의 기술은 정신지배, 하지만 정신지배가 통하지 않는 적에게는 물리력을 사용한다.
클랜원들, 저 모두가 바로 예브게냐다. 예브게냐는 정신지배로 적의 움직임을 약화시키고, 괴롭히면서, 또한 정신지배로 클랜원들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 예브게냐가 정신지배만을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모두가 두려워하는 이유였다. 멘탈마스터, 퀸즈 네스트 클랜의 군림자, 그녀의 힘은 또한 무지막지한 물량에서 기인한다.
수십의 클랜원들이 쏘아대는 마법과 초능력들을 피하고, 막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정하는 더 시간을 끌 수가 없다. 예브게냐의 힘을 물리친 이 순간, 가진 힘들을 단숨에 그러모은다. 그녀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정면돌파다.
정하의 주위로 염력과 핏빛 칼날이 넘실거렸다. 종속의 낙인 이외에, 뱀파이어로서 그녀가 가장 자신있는 기술이다. 농도 깊은 피의 지배, 염동력, 이 둘을 줄기줄기 뿜으며, 그녀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긴장과 희열이 동시에 뇌를 박차고 온몸으로 번진다. 적들을 짓밟을 수 있을 만큼의 투쟁심을 새겼다.
"모두 대비해라!"
클랜원들이 각자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저 모든 클랜원들 너머, 예브게냐를 바라보았다. 이들을 지나쳐야만 예브게냐에게 닿을 것이다. 기꺼이 앞으로 가 드리지. 정하의 입에 미소가 떠올랐다.
정하가 몸을 튕겼다.
무리지은 클랜원들을 향해 단숨에 돌진한다. 그녀에게서 터져나오는 파공음이 운무시의 하늘을 갈랐다.
유성이 지상에 내리꽂히는 것처럼, 정하는 하나의 핏빛 궤적이 되어 그들에게 쳐박혔다. 그녀의 주위에 자리한 모든 물체가 찢어지고, 부서지고, 산산히 분해되었다. 클랜원들 전체가 뒤로 서서히 밀려났다. 일부는 정하의 기운에 휘말려 몸이 갈기갈기 찢긴다. 피분수가 허공을 수놓았다.
하지만 예브게냐에게 닿으려면 턱없이 모자라다.
역시 피가 부족해. 정하가 입술을 혀로 핥으면서, 눈앞의 클랜원 하나의 목을 붙잡고 다시 날아올랐다.
허공에서 다시 예브게냐와 클랜원들을 내려다본다. 붙잡힌 클랜원이 버둥거리지만, 정하의 악력에 살갛이 찢어져나가며 피가 흐른다.
예브게냐의 정신지배가 다시 정하의 뇌를 짓눌렀다. 아프다. 예브게냐가 어떤 술수를 부리는 것인지, 눈이 흐릿해지며 시야가 좀처럼 고정되지 않는다. 몸의 낯선 부위에서 고통이 타오르기도 했다.
정하가 붙잡은 클랜원을, 예브게냐를 향해 집어던졌다.
곁에 선 사예바가 튕겨냈지만, 그 여파로 예브게냐도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찍었다. 동시에 정신지배의 힘이 물러났다. 정하가 웃었다.
"계속하면 엉덩방아론 안끝날 텐데."
"네가 내 구두를 핥게 되겠지."
예브게냐의 눈이 서늘해졌다.
정하가 다시 아래로 뛰어들었다. 전처럼 정면돌파가 아니라, 클랜원의 무리 외곽을 스치며 하나하나 전투불능으로 만들어갔다. 그녀의 빠른 속도에 클랜원들은 필사적으로 방어진형을 굳혔다.
클랜원 하나의 팔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 잔해를 예브게냐에게 집어던진다. 하지만 사예바가 막아냈다.
예브게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하가 생각보다 강했다. 힘을 더 개방해야한다.
예브게냐가 심호흡을 한다. 그녀 안의 모든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겨우 이정도로 멘탈마스터라 불린 것이 아니다. 예브게냐의 힘이 서서히 날을 세우더니, 본연의 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해일이 덮치듯이, 예브게냐의 힘이 공터를 뒤덮기 시작했다.
엄청난 규모의 정신지배력.
피아를 가릴 수 없는 정신지배의 폭풍이 공터 전체를 찍어눌렀다.
클랜원들 또한 허물어져서는 바닥에서 버둥거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들의 뇌가 파괴되기 시작한다. 예브게냐는 개의치 않았다. 그들을 위해 컨트롤하다가는 정하를 붙잡지 못한다.
예브게냐에게서 정신지배의 힘이 줄기줄기 솟구쳐올랐다.
정하 또한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무방비로 떨어지면 뱀파이어라 할지라도 몸의 뼈들이 무사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뇌가 폭발할 것 같다. 그녀의 머리가 경련했다. 몸의 기운을 끌어올리려 해도, 체급이 다르다. 멘탈마스터의 힘은 무지막지하게 정하를 짓밟았다.
"으으, 으흣, 아아아악!"
정하가 비명을 질렀다. 눈에 핏줄이 섰다. 정하는 고통 속에 이성이 끊어지려는 걸 참으며, 억지로 비틀비틀 일어났지만, 결국 다시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사로잡히자, 온몸이 굴복한다.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통각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앗! 크아아아!"
눈의 핏줄이 터져 눈이 붉어진다. 정하는 남은 힘을 다해 예브게냐를 향해 기어갔다.
예브게냐의 힘은 아직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
예브게냐는 자신을 제압하기 위해 클랜원들마저 해쳤다.
남은 것은 예브게냐와 자신.
조금만 버티면, 예브게냐를 죽일 수…….
그런 정하의 등을, 누군가가 짓밟았다.
정하가 바닥에 쳐박혔다. 그녀의 등을 짓밟고 짓누르는 그림자를,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사예바. 정신지배가 듣지 않는 멘탈마스터의 심복.
"체크메이트로군."
사예바가 바닥에 널부러진 클랜원의 칼 한 자루를 집어들었다. 거리낌 없이 정하의 등에 내리꽂았다.
"아아악!"
정하의 주위로, 핏물이 번졌다.
정하의 힘이 급격히 하락했다. 결국, 그녀의 정신은 예브게냐에게 온전히 사로잡혔다. 마지막까지 버둥거리며 반항하는 정하의 정신은 결국 예브게냐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예브게냐의 정신지배력의 폭풍이 사그라졌다.
하지만 이미 정신을 파괴당한 클랜원들은 식물인간처럼 바닥에 누운 채 침을 흘렸고, 동공에는 아무 것도 비치지 않는다. 예브게냐는 그들이 더럽다는 듯 사뿐사뿐 피하며, 정하에게 걸어갔다.
사예바가 예브게냐의 곁을 지킨다.
고개 들어, 라는 예브게냐의 명령에 정하는 비칠비칠 고개를 들었다.
예브게냐의 공격이 멎었기에 고통은 없다. 하지만 이미 정하는 예브게냐에게 지배당했다. 온몸이 그녀의 통제를 벗어났다. 무엇을 하든, 예브게냐의 몫이었다. 정하의 눈에 굴욕의 빛이 떠오른다.
"한 번 이래보고 싶었어."
예브게냐가 하이힐로 정하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녀의 얼굴에 피가 터졌다. 정하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브게냐의 뜻대로, 다시금 얼굴을 들어야만 한다.
예브게냐가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깔! 맘에 들어. 한국에 온 보람이 있어!"
그리고는 여직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정하에게 명령했다.
"내 신발 밑창을 핥아."
예브게냐가 까딱, 힐을 바닥에 댄 채 앞코를 들었다. 한없이 바닥에 가까운 자리에 그녀의 힐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그녀의 의사에 관계 없이 정하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정하의 몸이 멈칫했다. 필사적으로 정신지배에 저항하는 것이다.
"혀로 깨끗이 만들어."
예브게냐가 웃었다. 예브게냐의 힘이 다시금 정하의 정신을 꿰뚫었다. 정하가 바닥을 기어, 예브게냐의 신발 앞에 얼굴을 댔다.
송곳니 사이로 혀가 내밀어진다.
"잘했어.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정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예브게냐의 신발 밑창을 핥는다. 혀 밑바닥으로 싸악싸악, 개처럼 핥는 굴욕적인 모습이었다. 예브게냐는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정하는 비굴하리만치 굴종하는 자세로 예브게냐의 신발을 핥는다.
예브게냐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그때, 서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래, 즐거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