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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쁜 피
옆자리에 앉은 수현에게, 예브게냐가 손을 뻗었다. 수현이 목을 움츠리며 긴장했다. 저 미모와 이 비싼 자동차, 옷차림 등을 보아, 어쩌면 이 여인은 헐리우드 스타일지도 모른다. 예브게냐의 손끝이 수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목이 깨끗하네."
예브게냐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수현의 목덜미를 관찰했다. 그녀의 숨결이 닿아서 수현은 긴장했다. 서양인 특유의 얼굴형을 가진 예브게냐는, 수현 주위의 미인들과는 또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서, 자꾸만 눈길을 주게 된다.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예브게냐의 푸른 눈동자는 심장까지 얼려버릴 듯 시리다.
예브게냐가 수현의 교복깃을 잡아당겼다. 수현이 당황하는 사이 예브게냐가 수현에게 바싹 달라붙어, 교복 단추 위쪽을 하나하나 풀었다. 수현이 예브게냐의 어깨를 잡았다.
"저, 저기요?"
"확인할 게 있어서."
마치 예브게냐가 수현을 덮치는 듯한 모양새다. 앞, 조수석에 앉아 있던 비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흠. 마스터. 그냥 읽어보시지요."
"눈으로 보고 싶은데."
예브게냐가 수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방어적으로 움츠리는 수현을 예브게냐가 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처음엔 그저 기분 좋은 터치였는데, 문득 수현은 머리가 지릿하며 무엇인가 그의 머리를 향해 새어드는 것을 느꼈다.
수현 안의 포식자가 그르렁거린다.
그 힘은 다시 빨려나가고, 돌아오지 못했다. 그 기운은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수현의 주위를 떠돌 뿐 더 들어서지 못한다. 예브게냐가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 더 수현의 머리를 만지작거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입술을 깨물었다.
"너, 뭐야?"
"네?"
예브게냐가 수현의 멱살을 붙잡았다. 상냥하던 그녀가 돌변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고 노려다보는 모양새가 또 은근히 섹시하다. 서시가 이랬을까, 찡그린 얼굴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건 정하뿐인 줄 알았는데.
"너 왜 안읽혀? 정체가 뭐야?"
예브게냐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죽여버리겠어."
그녀의 목이 확, 뱀처럼 수현의 목을 쥐어왔다.
수현은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인간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인 목덜미를 그녀에게 내어줬으니, 그녀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그의 목은 부러지거나 찢기고, 수현은 죽거나 그에 준할 것이다. 공포가 척추를 달려 오싹하다. 수현의 온몸이 죽음의 위협으로 비명을 지른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본능이 외치고 있다.
예브게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수현은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큭…… 크으윽…… 으으…… 응?"
한참을 기다렸는데 목으로 꿀꺽, 침을 삼킬 수도 있다.
예브게냐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갈 때엔 그 강도가 강해지며 죽음을 예감했지만, 아주 조금 더 강해진 이후엔 제자리걸음이다. 수현이 예브게냐를 보았다. 예브게냐는 입술을 깨물고 필사적으로 힘을 주고 있었다. 목을 조르려고 용쓰는 모양새가 귀여울 정도였다.
"이익! 이잇! 죽어!"
하지만 그대로다. 예브게냐의 팔힘은…… 터무니 없이 약했다.
"이이익!"
귀, 귀엽다. 예브게냐가 필사적으로 수현을 목졸라 죽이려고 했지만 수현은 멀쩡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수현은 오히여 안타까워져서 그녀의 땀을 닦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수현은 목졸리며 예브게냐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조심스럽게, 수현이 예브게냐의 손목을 잡아, 슬며시 손에 힘을 주었다.
"아흣!"
가냘프다.
이 미모의 여인에겐 사람의 목을 졸라 죽일 힘이 없다. 손목도 가늘어서 잡고 힘을 조금 주니 금새 제압할 수 있었다. 예브게냐가 수현에게서 벗어나려 반항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아, 아파요? 힘 별로 안 준 건데……."
"놔! 이 힘만 센 쓰레기! 돼지새끼! 죽여버리겠어! 바보로 만들어줄 거야! 놔!"
그 추태를 바라보던 조수석의 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터는 정신지배를 빼면 육체적 능력은 어린애잖습니까. 죄다 아랫사람 시키기만 하니까 몸이 약해질 수밖에요."
"사예바! 이 꼬마를 죽여버려! 배를 갈라서 늑대들이 창자를 파먹게 해! 백 명의 남자들에게 겁탈시켜서 내장을 파열시켜버려!"
"……."
"마, 마지막 건 좀……."
조수와 수현의 눈이 마주쳤다. 수현은 움찔했다. 예브게냐를 향하던 부드러운 눈이, 수현을 향해서는 차갑게 빛났다. 이런 상황이라도 주제를 잊지 말라는 경고가 느껴졌다. 예브게냐가 보여준 의외의 모습으로 마음이 풀렸는데, 수현은 다시 긴장했다.
예브게냐가 수현을 쏘아보았다.
"이, 나쁜……."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그렁하다.
오만하고, 고압적이고, 도발적이던 예브게냐가 힘에 밀려 눈가에 물기를 맺은 모습은 참을 수 없이 남자를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손목을 잡힌 예브게냐가 몇 번 힘으로 반항하다가 발을 들어선 힐로 수현의 복부를 차버렸다.
"우억!"
아무리 연약한 예브게냐라도, 힐로 차버리면 배가 뚫리는 것 같다. 수현이 웅크리자 예브게냐가 수현을 몇 대 더 찼다.
"하아, 하아……."
수현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말했다.
"부, 분홍색……."
"……!"
그녀가 발로 찰 때, 그녀의 짧은 원피스가 들리며 그녀의 비처를 보고야 만 것이다. 예브게냐가 분노했지만 수현이 예브게냐의 발목을 잡았다. 예브게냐가 다른 발로 차려고 하자, 그쪽 발목도 잡아버렸다.
잡고 보니 음란한 모양새가 되었다.
반항을 막으려고 그녀의 발목을 잡고 치들었더니, 원피스가 들리며 그녀의 늘씬한 허벅지와 팬티가 드러나고, 그녀의 엉덩이가 수현에게 닿았다. 수현이 조금만 자세를 돌리면 마치, 성행위를 하는 듯한 모양새다.
순간 조수석에서 파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브게냐의 비서, 사예바가 손에서 전기를 튀기며 수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에서 불똥이, 아니 이미 불길이 타오른다.
"아, 아니요."
수현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놓았다.
예브게냐한테 더 차였다.
이후, 다들 진정되었을 때, 람보르기니는 강변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내려놓은 차창으로 바람이 불어닥쳤다. 예브게냐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수현의 얼굴에 닿았다. 좋은 냄새가 난다. 예브게냐가 기분 좋다는 듯 눈을 반쯤 감고는 수현에게 말했다.
"그럼 너도 능력자인가?"
"네. 일단은……."
그녀가 예브게냐라는 건 처음부터 짐작했다.
"내 정신지배가 먹히지 않는 상대는 오랜만이야."
"그런 사람이 많나요?"
"내 주위엔 사예바 뿐이야. 이외에는 예전에 만난 몇몇 클랜의 마스터들이나…… 흔하진 않지."
"참 좋은 능력이네요. 정신지배라니. 부자되겠다."
별로."
예브게냐가 짧게 대답했다.
강변을 거니는 한 쌍의 연인들이 보였다. 무어라 속삭이며 웃고, 때로는 서로 기대며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마음 따뜻해지는 광경에 수현도 저절로 웃고 말았다. 정하랑 놀러 와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갑자기 두 연인이 무언가 맞지 않는지 표정이 안좋아지더니, 둘이 싸우기 시작했다. 언성이 높아지더니, 방금전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도록 다투었다. 여인이 남자의 뺨을 때린다. 남자도 마주 뺨을 때렸다. 사람들이 뜯어 말린다.
수현이 반사적으로 예브게냐를 쳐다보았다.
예브게냐가 큭큭 웃고 있었다.
"아, 악마……."
"꼬마. 입 닥쳐,"
예브게냐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도 펴요?"
"내 인생에 로맨틱한 일은 담배 뿐이지."
"어디서 많이 들은 말이네요."
예브게냐가 다시 큭큭 웃었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담배가 물리자, 더없이 섹시한 느낌이 든다. 담배에 립스틱이 묻어났다. 그녀의 입술이, 립스틱이 붉다. 예브게냐가 수현에게 말했다.
"한 번 펴볼래?"
"넵!"
하지만 예브게냐는 자신이 피던 거 말고, 새 걸로 하나 주었다. 수현은 낙심해서 피지 않기로 했다.
"내 정신지배가 먹히지 않았던 건 하나가 더 있었어."
"누구죠?"
"정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수현이 예브게냐를 쳐다보았다.
"네 동거인. 보아하니 그녀의 종속인은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만큼 정하가 널 아끼는 거겠지."
사실 그 반대인데요.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예브게냐는 수현을 정하의 연하 애인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수현의 능력과 정하에 대한 이야기는 수현의 예상 이상으로 소문이 나지 않은 것 같다.
"난 그녀를 죽이러 왔어. 직접."
"정신지배가 안먹혔다면서요. 몸으로 싸우면…… 무조건 질 텐데."
그 연약한 몸짓으로는 정하가 손가락 하나로 이길 것 같다.
"그건 예전이었지. 아아주 옛날. 능력은 단련할수록 강해지거든."
예브게냐가 씨익 웃었다.
"지금이라면, 정하도 내 밑에서 기게 될 거야."
순간 거대한 힘의 파도가 수현의 뇌를 덮쳤다. 수현 안의 포식자가 포효했다. 예브게냐의 힘이 포식자를 헤집고 진입하려고 요동쳤지만 수현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엄청난 힘이다. 포식자가 아니라면 그녀의 막강한 지배력에 굴복해 뇌를 그녀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뇌를, 상대를 지배하게 되겠지. 예브게냐가 어깨를 으쓱하며 힘을 거두었다.
"정하는 기운의 컨트롤에 능해서 내 기운을 흘려냈었는데, 넌 능력 자체가 특이한 것 같아."
"그런가요."
예브게냐가 턱을 붙잡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수현을 쳐다보았다.
"뭐, 상관없겠지. 정하는 내 부하를 빼앗아 자기 부하로 만들었었어. 나도 똑같이 되갚아줄 거야."
람보르기니가 속력을 늦추었다.
도착한 곳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한국이 아니라 유럽의 오래된 저택인 것처럼, 고풍스러웠다. 정원도 드넓어서, 안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집사복장의 사나이가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저택 입구에는 정장을 입은 러시아인들이 경비를 섰다. 그들 모두 람보르기니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멀리 주차장으로 람보르기니 한 대와 검은색 고급 세단들이 몇 대 더 주차되어 있다.
"내 저택에 초대하는 거야. 정하의 애인."
예브게냐가 수현의 귓가에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