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 / 0180 ----------------------------------------------
5. 나쁜 피
운무시의 어느 명품 편집 매장,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은 가게를 흘낏 들여다보고 지나갔다.
"외국 연예인인가?"
"다리 봐. 쩐다."
매장 안에는 늘씬한 여인이 옷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금발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백인이었다. 헐리우드 스타처럼 선글라스를 껴서 눈은 볼 수 없지만, 갸름한 얼굴 안에 곧은 코와 도톰한 입술이 조금의 어그러짐도 없이 자리하고 있다.
짧은 원피스를 입었는데, 그녀의 매끈한 다리가 다 드러나, 길다란 각선미를 바라보고 있자면, 마네킹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보석으로 치장된 팔찌를 세 개를 겹친 채 끼고 있어서, 그녀가 선글라스를 밀어올릴 때마다 짤랑거렸다.
그녀는 내키는 대로 옷을 골라 휙휙 집어던졌다. 그녀 뒤에 서 있는 백인 여인 또한 충분히 미녀였는데, 비서직인지 정장차림이었다. 하지만 치마가 짧고 블라우스를 풀어헤쳐, 답답하다는 느낌 대신 오히려 섹시해보였다.
"이거, 이거. 이거."
옆에 서 있던 편집 매장의 오너는 어쩔 줄 몰라 그들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냥 장난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부자를 만나 몇 달치 매출을 한 번에 올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게 어울려, 아님 이게 어울려?"
미녀가 생긋 웃으면서, 오너에게 물었다. 백인이 한국말을 참 잘한다고 생각하며, 오너는 하나를 골라주었다.
"이, 이게 어울리시네요. 손님께서는 몸매가 좋으시니까 조금 과감한 디자인도 충분히……."
"뭐?"
순간 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엇인가 실수했을까. 오너가 허겁지겁 변명하기 전에, 그의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머리를 감싸쥔다.
"으윽……!"
"다 어울리십니다. 다 사시지요."
비서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당연하지. 나니까."
미녀가 다시 생긋 웃었다. 그러자 오너의 두통도 사라졌다. 마치 이 여인이 두통을 일으킨 것처럼 느껴진다. 오너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며, 방금의 일을 교훈 삼아 그녀의 비위를 맞추었다. 미녀는 여전히 멋대로 옷들을 골라 비서에게 안겼다.
편집매장의 물건을 탈탈 털고 난 후에 결제했다. 비서가 내민 것은 오너조차 처음 보는 블랙 플래티넘 카드였다.
둘이 매장을 나가자 매장 입구까지 오너가 굽실거리며 배웅하는 찰나.
문득, 미녀가 뒤돌아섰다. 오너가 움찔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그러고보니 내가 여기서 옷을 산 건 굉장한 영광이잖아?"
"네? 아, 그게, 네. 감사합니다."
"그럼 내 신발을 핥아."
"……예?"
오너가 무슨 미친 소리냐고 생각하는데, 무엇인가 뇌에서 지직, 하고 전류같은 게 흘렀다.
오너의 몸은 멋대로 숙여지고, 무릎을 꿇는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서 몸을 멈추려고 하지만 마치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것처럼 몸이 비굴한 자세를 취한다. 눈알을 굴려 올려다보니 그녀가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자, 너에게 영예로운 기회를 주는 거야."
"무슨…… 안ㄷ……."
입이 저절로 쫙 벌어지더니, 혀가 내밀어져 그녀의 힐 밑창을 핥는다.
혀로 날름날름 핥았다. 오너의 눈에서 굴욕과 공포에 눈물이 흘렀지만, 몸은 멋대로 그녀의 명을 따르고 만다. 비서는 옷을 한아름 든 채 차가운 눈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찰칵찰칵, 그 장면을 폰카로 찍어댔다. 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발로 오너를 걷어찼다. 힐의 굽에 찍혀 오너의 이마에 피가 터졌다.
"아악!"
"앞으로는 말 조심하도록 해. 나한테 안어울리는 건 없어."
미녀는 싸늘한 얼굴로 눈길을 주고는, 홱 몸을 돌렸다. 오너는 한동안 바닥에 엎드려 움직이지 못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구경꾼와 마주한다. 그녀의 눈길에 모두들 움찔 물러섰다. 미녀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무렇지도 않는다는 듯 거리에 주차된 그녀들의 차로 걸어갔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을 찍었던 사람들은 조금의 의문도 없이, 스스로 그 사진과 동영상을 삭제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문득, 기억나지 않는다. 저기 피 흘리는 남자는 넘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람보르기니 에스토크의 뒷좌석이 열렸다. 그녀가 몸을 파묻는다. 비서가 옷들을 트렁크에 넣고 운전석에 앉았다.
"아아∼ 한국은 정말 덥네!"
"마스터. 목표물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미녀, 예브게냐 울야키나가 선글라스를 벗어 정수리에 얹었다. 그러자 그녀의, 위로 치켜올라간 짙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장난기 어린 듯한, 또한 오만함이 절절이 묻어나는 눈매였다. 선글라스를 빗겨낸 그녀의 얼굴은, 선글라스 안에 어떻게 이런 게 숨어 있었을까 싶도록, 아름다웠다.
"가. 얼굴이나 보자."
가 달려 찾아간 곳은 고등학교 앞이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외제차를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 수현도 끼어 있었다.
"야, 저거 영화에 나올 거 같은 차인데."
"분노의 질주 같은 거?"
"얼마일까? 존나 부자겠지?"
정태와 수현은 외제차를 손가락질하며 품평했다.
그 안에 있던 비서가, 예브게냐에게 말했다.
"저 소년입니다."
"누구? 동양인은 다 똑같이 생겼는데."
"예쁘게 생긴 소년입니다."
"아, 쟤구나. 귀엽네."
유리창이 선탠되어 있어서, 수현과 정태는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망각하고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질했다. 예브게냐가 손짓으로 창을 내리라고 했다.
수현과 정태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생각 없이 가까이서 구경했는데, 갑자기 차창이 내려가더니, 그 안에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금발벽안의 미녀가 자신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자세로 비스듬히 기댄 모양새 또한 도발적이다. 그녀가 생긋, 웃자 심장이 철렁한다.
"거기 귀여운 꼬마. 나랑 드라이브 할래?"
수현이 정태를 뒤로 집어던지며 대답했다.
"넵!"
"나, 나도……!"
"아니, 그쪽 꼬마는 됐어."
"야! 이수현! 배신이냐!"
수현은 그녀가 열어준 차문으로 냉큼 들어갔다. 달콤한 향기가 난다.
"차 출발시켜. 꼬마 넌 급한 일 없지?"
"옙!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