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20화 (20/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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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쁜 피

서울, 철십자 클랜 본사.

최상층의 면담실에는 눈가에 깊은 그늘을 드리운 사나이, 요한이 의자에 기대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가면을 쓴 남자가 깍지를 끼고 있었는데, 먹색 철가면에 난 구멍은 하나 뿐이었다. 그의 새까만 오른쪽 눈동자는 자신의 손끝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요한을 향한다.

면담실은 마스터와 만나기 위한 곳이다. 창문 하나 없이 콘크리트로 사방이 막혀 있고, 두 개의 문 뿐이다. 하나는 마스터의 집무실, 하나는 허공이다. 이 문을 열면 까마득한 빌딩 아래가 펼쳐져 있다. 때문에, 마스터를 만날 수 있는 자는 그만한 능력자들 뿐이다.

갓등이 흔들거리며, 그들에게 드리운 음영을 건드려댔다.

요한이 말했다.

"마스터."

가면의 사나이, 그가 바로 스릴러 클랜의 마스터, 기파랑이다.

"멘탈마스터가 한국의 클랜 전체에 전언을 보냈습니다."

"말하라."

"'엎드려 있어라. 걸리적거리면 죽인다.', 이상입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요한의 침중한 눈이 기파랑의 손끝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 진동은 요한에게까지 전달되어, 그조차도 경련하듯, 몸이 흔들렸다.

"하."

기파랑의 입에서 속삭임처럼 한 마디, 흘러나왔다.

"히."

요한 또한 참지 못하고 한 음절 내뱉었다.

"히, 하하. 하하하하."

"으히히히, 히히힛!"

둘은 몸을 떨면서 폭소한다.

"하하하하하! 파하하핫! 흐하하하하하핫!"

"후, 후후, 하하하하하! 으히히히힛! 힛힛힛!"

참지 못하겠다는 듯 요한은 허리를 꺾고, 바닥을 향해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쏟아냈다. 기파랑 또한 가면의 이마를 짚은 채 뱃가죽이 아플 정도로 웃어댔다. 둘의 폭소는 한동안 이어지다가, 간신히 참겠다는 듯 사그라졌다.

"하, 하하……."

"하아, 하아…… 마스터."

요한이 숨을 고르고는, 마스터에게 말했다.

"죽일까요?"

"내버려두어라."

기파랑이 의자에 길게 기대며 요한을 쳐다보았다. 가면 사이로 보이는 그 새까만 눈동자에 드리운 것은 권태, 그리고 약간의 흥미이다.

"그 미확인 능력자 꼬마."

"예."

"소문은 다 차단했겠지?"

"예. 주시하는 건 저희뿐입니다."

"살아남으면 영입을 제안하라."

"예."

기파랑이 눈을 감았다.

요한이 일어나서 고개 숙이고는, 그의 뒤에 있는 문을 열었다.

새파란 하늘과 도시가 내려다보인다. 빌딩의 정상을 때리는 거센 바람이 머리를 흩날렸다. 그가 중절모를 손으로 고정시키고는, 빌딩 아래로 뛰어내렸다. 까마득한 추락감이 몸을 휘감는다. 오싹한 쾌감이다. 요한이 허공을 박차고 방향을 바꾸어, 열린 창을 통해 실내로 뛰어들었다.

요한의 집무실이다. 왠만한 기업 사장실처럼 꾸며져 있다.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가에서 요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요한이 의자에 앉아 발을 책상에 올리며 말했다.

"그놈, 아직 있지?"

"예."

"데려와."

직원이 문을 열자, 키 큰 백인 청년이 들어왔다. 슬라브계열이다. 굵은 팔뚝에 자랑스레 새겨진 문신, 퀸즈 네스트 클랜. 그는 오만한 태도로 요한에게 다가와 내려다본다.

"답변은?"

"너희들 말대로 우린 상관하지 않겠다."

"좋군."

그가 히죽 웃었다. 그리고 요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휴대폰으로 연락했다. 그래, 알아서 기는군. 이라는 말을 전하고는 곧바로 끊었다.

그 반응을 보려는 듯 요한을 흘끗 내려다본다. 요한에게는 여전히 표정이 없다.

"잘 있으라고. 이 조그만 땅의 클랜놈들은 참 다루기 쉽다니까."

"마스터가 죽이지 말라더라고."

요한이 불쑥 말했다. 백인 청년이 히죽거리며 고개를 갸웃한다.

"하, 날?"

"아니, 예브게냐."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몸에서 털가죽이 일어난다. 히죽거리며 조롱하던 얼굴에는 살기로 가득하다.

"마스터를 입에 올리다니……."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요한과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에게서 이어진 시선이 동공을 지나, 뇌의 어느 부분에 닿았다. 뇌가 타들어간다. 온몸이, 전신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죽음 그 자체가 그에게 입력되었다. 온몸의 세포가 죽어갔다. 조금의 부산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죽음의 방문이었다.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철퍽, 요한의 책상에 상체를 엎어뜨리고는 바닥으로 미끄러져내렸다.

ㅡ죽음의 시선.

바로 요한의 잿빛 눈동자에 깃든 힘이다. 요한은 죽은 백인 청년을 내려다보며 냉소했다.

"널 죽이지 말란 말은 없었지. 치워."

"예."

직원이 고개숙였다.

*

날렵한 고속 전용기가, 바퀴를 열고는 활주로에 착륙했다.

미끄러지듯이 활주로를 타고 질주하던 전용기는, 차츰 속도를 감속하며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일련의 무리가 비행기를 향해 달려갔다. 다들 정장을 입은 백인들이었다.

비행기 옆구리에서, 길게 벨트가 내려오더니, 바닥에 닿았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사람 대신 한 대의 노란 자동차가 부아아앙, 내려왔다. 람보르기니 가야르도가 활주로에서 햇빛을 부서뜨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가야르도 조수석의 차창이 살짝 열린다.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례로 대답해. 알아냈어?"

열린 차창에 일렬로 선 남자들 중, 제일 먼저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죽어."

그 순간,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붙잡고,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남자가 바닥을 뒹굴며 머리를 부여잡고 침을 질질 흘리더니, 이내 멍한 얼굴로 혼자 히힛거리며 웃었다.

정신이 붕괴한 것이다.

뒤에서 대기하던 인원들이 미쳐버린 남자를 끌고 데려갔다.

"다음."

"……죄송합니다."

차례로, 하나하나 바닥을 뒹굴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한다.

멘탈마스터. 정신을 지배하는 자. 그녀가 원한다면, 이 근방의 모든 인간을 미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녀의 강대한 정신지배능력은 홀로 퀸즈 네스트 클랜을 러시아의 패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한반도에 들어섰다.

정하를 죽이기 위해.

한 명이 대답했다.

"저, 정하는 지금 어떤 소년과 동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흐음. 계속해."

"고등학생인데. 제법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으니 그 소년을 이용하면……."

"잘했어."

남자가 움찔, 떨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닥에 쓰러져서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아까처럼 정신이 붕괴한 이들과는 명백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의 눈가가 흐릿해지며, 입을 헤벌리고 몽롱한 표정을 한다.

극상의 쾌감.

임무를 수행한 자에게, 그녀가 직접 뇌에 쾌감을 주입하는 것이다. 극상의 황홀경 속에서 남자는 몸을 버둥거리며 한동안 몸을 꿈틀거렸다.

"내 집은 구해놨겠지?"

"예. 가시지요."

검은 세단이 공항 활주로를 달리자, 가야르도가 뒤따라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공항에서 이런 기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공항에 있는 모두가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활주로에서 자동차가 눈앞을 지나가는데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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