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7화 (1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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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달과 독주(毒酒)

휴대폰 너머 예브게냐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정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정하를 범하려던 남자의 팔뚝에 정하의 송곳니가 박혔다.

그녀를 둘러싼 클랜원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정하에게 종속된 클랜원이 그녀의 의지에 따라 정하의 수갑을 잘랐다.

일이 잘못된 것을 느끼고, 정하를 욕보이던 자들이 멈칫했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서 일단 주먹과 발을 휘둘렀지만 그 순간 정하의 신형이 연기처럼 스러지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녀의 알몸은 희미한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정하에게 종속된 남자가 동료들을 공격해, 두 명의 클랜원이 피를 뿜었다.

결국 종속된 남자는 제압당해 바닥에 쳐박혔다.

"아, 더러워. 냄새 나. 최악이야. 쓰레기들아."

정하가 머리를 흔들며 서늘한 눈초리로 그들을, 그리고는 올가가 쳐들고 있는 휴대폰을 향해 맑게 웃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저능아년아."

올가가 황급히 휴대폰을 거두는데, 예브게냐가 다시 들어올리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녀의 찢어지는 고성에 올가가 굳은 채 다시 휴대폰을 정하에게 향한다. 모두가 멈춘 가운데, 정하와 예브게냐가 액정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방금까지는 기분 좋았지?"

[너. 일부러 연기한 거야.]

"응. 굳이 왜 그랬는지는 알잖아?"

정하가 손을 휘둘렀다. 순간 그녀에게 약을 쑤셨던 남자의 머리가 반으로 잘려나가 피를 뿌리며 허물어졌다. 단면으로 그의 뇌수가 줄줄 흘러내린다. 모두가 움찔했으나, 예브게냐의 명을 기다려 움직이지 않는다.

정하가 턱을 들며 말했다.

"너, 너, 너. 너 때문이야. 너 갖고 노는 게 재밌어서 그래."

정하가 깔깔거린다. 예브게냐는 얼굴이 굳어 부들부들 떨고 있다.

두 거물의 만남을 중계하는 올가는 어서 빨리 폰을 꺼버리고 싶었다. 눈앞이 캄캄하다.

"풉. 왜, 분하니? 그럼 직접 와 봐, 패배자년아. 조금 비위 맞춰주니까 좋다고 깔깔거리는 꼴이라니, 웃겨."

[…….]

순간, 휴대폰을 든 올가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팔에서 경련이 인다. 올가가 당황해서 마력을 끌어올리는데, 뒤에서 부하 하나가 머리를 부여잡고 허물어졌다. 그 무형의 힘은 올가마저 겁박하고, 주변 공기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 모든 기운은 휴대폰에서부터 시작된다.

능력이 약한 이들부터 두통을 호소하며 무릎 꿇는다.

정하도 안색이 살짝 굳었다.

올가는 이것이 뜻하는 바에 소름이 돋았다.

분노한 예브게냐의 정신지배가, 전기신호를 타고 휴대폰 건너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 여자는 얼마나 더 괴물이 된 것인가.

정하는 억지로 미소지으며, 자신을 향해 살기 가득한 눈초리를 쏘아내는 예브게냐를 마주 쳐다보았다. 예브게냐가 주먹을 쥐어, 길게 네일을 한 손톱이 살갛을 파고들어 피가 흐른다. 그녀의 턱이 떨리고 있었다.

[너 반드시 죽여버린다.]

정하는 웃어주었다. 예브게냐를 농락한 게 즐거워서 소름이 돋는다. 이게 바로 자신이다. 극동 최악의 악몽, 정하다.

[너희 쓰레기들은 지금 당장 정하와 싸우다 죽어. 아님 도망쳐서 자살하던지, 나한테 죽던지.]

그녀의 말이 끝나면서, 순간 무엇인가가 주위를 휩쓸었다. 특히나 능력이 약했던 클랜원들 몇이 눈을 뒤집고 침을 흘리며 쓰러졌다. 올가조차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휴대폰이 끊기자, 그제야 머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올가와 세르게이의 눈이 마주쳤다. 최악의 사태지만,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세르게이가 손 언저리에 빛무리를 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올가 또한 힘을 끌어올리자 그녀의 주위로 얼음 결정이 쩌적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그들 모두를 적으로 돌린 채, 정하는 눈부시게 웃는다.

"니네 계모가 하나 고르랬더니, 굳이 나한테 죽을려고?"

정하의 말에 올가의 얼굴이 구겨졌다.

"시끄러워. 악마 같은 여자야."

"악마라니. 너희가 나한테 한 걸 봐."

정하가 스스로의 몸을 감싸안으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서 핏빛 칼날이 쏘아져나가더니, 정하에게 집적댔던 이들의 복부를 찢어발겼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크악!"

"으아아아……!"

그들이 흘러내리는 내장을 필사적으로 주워 담으며 바닥을 기었다. 피비린내가 피어오른다. 전장의 냄새다. 정하도 퀸즈 네스트 클랜의 능력자들도, 근육을 긴장시키고 전투를 향해 뛰어들 준비를 한다.

정하에게 처벌 받은 능력자들을, 클랜원들 몇몇이 뒤로 질질 끌어내려는 참이었다. 몇 걸음 더 가기도 전에, 강력한 힘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그들을 인도하던 클랜원들이 환자를 놓치고, 그들은 줄에 매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하에게 빨려들었다.

"으아, 으아아!"

"흐아아악!"

"으악!"

정하가 드레스처럼 두른 어둠이 확장하더니, 그들을 뒤덮었다. 그 속에서 살덩이를 저미는 소리, 찢어내는 소리, 갈갈이 분해해버리는 처참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날카롭게 귀를 찌르는 비명 소리가, 공장 내부를 울렸다. 모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보다 못한 올가가 손을 뻗었다.

"적당히 하시지!"

공기 중의 수분이 얼어붙으며, 가느다란 바늘처럼 결정을 이루었다. 한 무더기의 얼음 바늘이 정하를 향해 쏘아지고, 정하가 팔뚝을 들어 막았다.

그녀의 팔뚝에 얼음 바늘이 박혀들었다. 정하는 여전히 웃고 있다. 그녀의 아래에서 클랜원들을 집어삼키는 어둠은 여전히 그들을 휘감고 으깨고 있었다. 이제 비명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시체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조금, 그리고 어둠이 살짝 풀어지며 그 사이로 홍수처럼 흘러나오는 핏물이 그들의 발치까지 번졌다.

"스캐빈저 몫도 남지 않겠네?"

정하가 조롱했다.

올가의 뒤로 다가간 세르게이가 속삭였다.

"이상해요. 올가."

"뭐가."

"아무리 정하라도 저렇게 강할 수는 없어요. 저건 마치……."

"마치?"

"산삼 액기스라도 한 사발 한 것 같군요."

"이 상황에도 농담이야?"

"저 어둠은…… 제 프리브다로도 흩어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너무 짙어요."

"……내가 도울게."

어둠이 굽이치며 정하에게로 되돌아왔다. 어둠은 바닥을 메운 핏물을 빨아들여 자신의 일부로 채우고는 정하에게 흡수되었다. 어둠이 떠나간 자리에 클랜원들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부서진 두개골 조각만 몇 개 굴러다닐 뿐이었다.

올가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세르게이에게 말했다.

"정하는 마스터와 끝을 볼 속셈 같아."

세르게이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그녀는 멘탈마스터를 원하는군요. 하지만 아무리 강해져도 마스터를 이길 수는 없을 텐데. 방도가 있는 걸까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우리 걱정부터 해."

올가가 이를 드러내며 온몸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지독한 한기가 공장 내부를 휘몰아쳤다. 피부를 드러난 맨살에 소름이 돋는다. 정하가 나른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난 이럴 때 제일 기분 좋더라."

정하는 그 어떤 순간보다도 지금, 더 고혹적이다.

그녀가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일 때마다, 클랜원들은 뒷걸음질친다. 지금 죽든, 멘탈마스터에게 붙잡히든, 그들은 죽는다. 절망이 내려앉았다.

"한 번 허를 찔렀다고 너무 자만하지 마. 흡혈귀.

"내 이름은 정하야. 기억해."

정하가 날개를 펼쳤다. 그녀의 주위로 새빨간 피가 뭉글뭉글 배어나왔다. 쇠비린내가 진동한다. 그 광대한 피의 역장을 마주한 퀸즈 네스트 클랜의 능력자들은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다. 이렇게 강할 리가 없었다. 정하가 악명이 높다 해도, 극동의 작은 나라를 활보하는 뱀파이어에 불과했을 텐데.

"올가."

세르게이가 올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금을 해제해주세요."

"……그래. 알았어."

올가가 한숨을 쉬었다.

멘탈마스터의 정신 지배, 그녀가 세르게이를 클랜원으로 받아들이며 그의 머리를 열었고, 거기서 무언가 위험한 것을 발견했다. 멘탈마스터는 세르게이가 폭주하지 않게 잠금을 걸고, 세르게이를 컨트롤하려 비밀의 주문을 설정했다.

올가에게 주어진 임무의 오십퍼센트는, 세르게이를 다루는 데에 있었다. 올가는 멘탈마스터에게 들은 주문을 곱씹었다. 세르게이를 깨울 수 있는 그 비밀의 주문.

"세르게이 마쇼스키, 벨로보그Belobog의 봉인을 해제한다."

올가의 목소리에 그녀의 기운이 실렸다. 기운이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세르게이의 귀를 넘어 그의 뇌 어딘가에 자리한 댐을 무너뜨리고, 모든 흐름을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이끈다.

세르게이가 말했다.

"빛이 있으라."

올가가 대답했다.

[그러자 빛이 있었다.]

올가의 마력이 서린 주문이, 세르게이의 틀어막힌 기의 흐름들을 밀어서 잠금해제했다. 세르게이의 몸에서 빛무리가 폭사했다. 아군의 기력윽 북돋고, 적, 특히 어둠의 종자를 산산히 흩어버리는 프리브다가 그의 전신에서 넘실거리며 빛났다.

"마스터를 불러들일 속셈인가, 정하."

온몸이 빛나서, 이제는 인간처럼도 보이지 않는 세르게이가 정하를 향해 말했다.

"그 전에 넌 우리가 죽인다."

"속셈이라니? 그냥……."

정하가 웃었다. 그녀의 몸에서 다시금 적색의 혈기와 새까만 암흑이 피어올라, 공장을 가득 매워간다. 휑하던 공장 내부는 이제, 그 절반을 세르게이의 프리브다가, 그 절반을 정하의 어둠이 장악하고 있었다. 둘이 맞닿는 곳에서는 서로 밀고 당기며 그 힘을 견주고 있다.

"비행기값이 비싸잖아?"

둘의 기운이 맹렬하게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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