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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달과 독주(毒酒)
"올가, 남자친구 몇 살이에요?"
[닥쳐.]
세르게이는 휴대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걸치고 자동차 엑셀을 밟아 달리는 중이었다. 전화 너머, 몸만 성숙해버린 반슬라브-반동양인 소녀는 벌써 남자친구를 만들어버린 모양이다. 세르게이는 올가를 놀리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폐허에 눈동자를 붙박았다. 말로는 경쾌하게 떠들어대지만 가슴은 식어간다.
벌써부터 비린내가 난다.
흡혈귀의 축축한 냄새.
어둠을 틈타는 이들이 흘리는 악취.
몸에 가득한 혈관들이, 피들이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까딱하면 그녀에게 빼앗겨 버릴 거라고.
하지만 정하가 알 수 없는 능력자에게서 패주하는 중이라면 의외로 일이 쉬울 수 있다. 뱀파이어들의 흡혈은 장점이면서 단점이다. 흡혈을 통해 단숨에 기력을 회복할 수 있지만, 피를 얻지 못하면 점점 더 쇠약해지는 것이다. 이미 한국 경찰망을 해킹해 도시 상황을 확인했다. 도시는 잠잠하다. 그녀는 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르게이는 멘탈마스터의 특사였다. 지부장은 올가지만, 멘탈마스터의 한 수는 세르게이다.
"저희만으로 괜찮겠습니까?"
뒷자석에서 대기하던 클랜원이 말했다. 그 또한 컴뱃 삼보를 극한까지 익히고 내가기공을 터득한 살인병기지만, 정하에게는 처진다. 뒤따라오는 차들도 판단을 기다리는 무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부장 없이 정하를 잡습니까?]
[공격준비합니까?]
다들 긴장하고 있다. 정하는 악명 높은 극동 최악의 뱀파이어다.
세르게이는 올가와 연결된 휴대폰을 잠시 어깨에 눌러 소리를 차단하고는, 그들에게 무전했다.
"다들 긴장 풀어. 정하는 혼자다. 그 누구라도 우리 모두를 혼자 상대할 수는 없다. 아, 물론 이번 일이 끝나면 그년이 아랫도리 하나로 우리 모두를 상대해야겠지만. 그건 예외로 하고."
무전으로 낮은 웃음이 번졌다. 세르게이의 머리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흡혈귀의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 저곳, 저 폐허가 된 공장건물 속에 분명 정하가 있다. 세르게이는 적의를 안에 눌러 담으며, 휴대폰 너머 올가에게 말했다.
"올가보다 연상? 연하? 이건 좀 복잡하네."
[무슨 상관이야, 네가.]
세르게이가 차를 멈추었다. 뒤따라온 승용차 세 대에서도 일제히 클랜원들이 내렸다. 열 여섯명의 클랜원들이 각자 전투준비를 하며 공장을 향해 눈을 번뜩인다.
이미 정하는 알고 있을 것이다. 세르게이는 슬슬 올가와의 전화를 끊고,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할 준비를 하려 했다.
"들어갑니까?"
"잠까……."
순간, 파공음이 들렸다.
뒤에서 살기가 급격히 쏘아들어오고 있었다. 세르게이가 뒤를 보았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등에 펼친 새까만 날개는 태양 아래에서도, 어둠에 잠긴 마냥 윤곽이 희미하다. 정하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손에서 뻗은 핏빛 칼날이 세르게이의 목을 노린다.
모두가 공장 안을 노려보는 가운데, 그 짧은 순간 정하를 확인한 건 세르게이 뿐이다. 이번 일격에서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세르게이의 뇌가 작동하며 온갖 호르몬을 분비했다.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반응한다. 목을 비틀었다.
정하의 일격이 허공을 가른다.
동시에 그녀의 날개죽지를 부여잡고, 그녀가 자신을 지나치기 전에 몸을 뒤로 한껏 당겨 브레이크를 걸었다. 온몸으로 정하를 깔아뭉개 추락시킨다. 세르게이와 정하가 동시에 바닥에 쳐박히며 온몸이 바닥에 갈린다.
"하아, 하아……."
세르게이가 이성을 회복했다. 그의 아래에는 놀랍도록 고혹적인 외모의 여인, 정하가 세르게이를 향해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바닥에 넘어지며 온몸이 생채기다. 세르게이는 사로잡은 정하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날개죽지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닥치고 정하 잡으러 가!]
올가의 태평한 목소리를 듣자 웃음이 나왔다.
"정하요? 걱정 말아요. 지금 제 밑에 깔려 있으니까."
정하가 손을 휘둘렀다. 세르게이가 휴대폰을 떨어뜨리며 그 손으로 정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지며 부서졌다. 세르게이가 이를 악물었지만 흡혈귀의 근력에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세르게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봐. 흡혈귀. 너 잡으러 얼마나 먼 거리를 날아왔는지 알아?"
"멘탈마스터도 멍청하네. 너희들 따위가 날 잡을 거 같대?"
"그뿐이겠어? 친절한 마스터께선 맘대로 즐기고 목숨만 살려 대령하라셨는데."
세르게이가 손을 모았다.
멘탈마스터가 보낸 클랜원들 중 나머지는 무게감이 떨어진다. 그녀가 힘을 실은 건 올가와 세르게이 둘 뿐. 둘 중에서도 올가는 사실 서포터 역할이었다. 정하의 진정한 카운터로서 멘탈마스터가 파견한 능력자는 세르게이 마쇼스키, 바로 그였다.
그의 능력이 가져다준 세르게이의 또다른 이름은, 벨로보그Belobog.
동슬라브 신화 속 빛의 신!
"난 너 같은 시커먼 족속들이 싫어."
그리고 세르게이의 손바닥이 빛을 뿜었다.
"프리브다Privda!"
온갖 역천을 허물고 거짓을 짓이기는 진실의 빛, 프리브다가 발현되었다. 세르게이의 온몸이 백열하는 전구처럼 빛을 뿜었다.
흡혈귀는 어둠의 족속이고, 섭리를 거스른 존재다. 빛의 힘을 이어받은 능력자 세르게이는 도리어 어둠을 파멸시키는 빛의 능력자다. 러시아야말로 어둠의 능력자들이 진동하는 사악한 땅이지만, 세르게이는 빛으로 그곳을 점령했던 자다.
그 빛을 마주한 정하가 비명을 질렀다.
온몸의 힘을 실어 세르게이를 밀쳐내고,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려 했지만 이미 그녀를 포위한 클랜원들이 그녀를 공격했다. 쇠약해진 정하로서는 떨쳐내지 못했다. 클랜원에게 몸을 구속당하고, 세르게이에게 끌려갔다.
정하가 그들에게 팔을 붙잡힌 채 눈을 치켜뜨고 세르게이를 노려보았다.
세르게이는 건들거리며 다가가 농담이라도 하듯, 그녀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놓치지 말고 잘 봐. 하나 둘 셋, 하면 치즈, 스마일하고."
그리고 세르게이가 말했다.
하나, 둘, 셋.
그의 빛 프리브다가 작열했다. 정하가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