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14화 (1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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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달과 독주(毒酒)

올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임무에 차질이 생겼다.

"아니, 그 흡혈귀가 한국에서 최상위급이라며?"

"그러게 말이지요."

"근데 이제 어딨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네요."

"대답만 하지 말고 나가서 찾아왓!"

올가가 앵무새처럼 대답하던 청년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을 벗어난 냉기는 순식간에 몸을 불려 얼음덩어리가 되더니 남자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남자는 우엑!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넘어갔다. 얼음은 순식간에 다시 녹아 찬물이 되어 쓰러진 남자를 다시 덮친다.

이곳은 퀸즈 네스트 클랜의 한국지부, 빌딩의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봤자 베이스캠프 정도의 의미밖에 없으므로 휑한 실내에서 쇼파와 티비, 테이블 따위를 몇 개 갖다놓은 수준이지만, 올가는 나름대로 사장스러운 집무 책상과 의자가 있다.

"되는 일이 없네."

올가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올가는 달라붙는 스키니진에, 스니커즈. 그리고 검은 티셔츠를 입은 차림새였다. 머리를 묶고 야구모자를 써 러프하다. 반면에 올가 앞에 늘어서서 고개 숙이고 있는 남자 셋은 정장을 차려입고 있어서 묘하게 이질적이다. 캐쥬얼 차림의 소녀에게 수트를 차려 입은 남자들이 질책당하고 있다.

문득 올가의 휴대폰이 울렸다.

[수현 - 뭐해?]

올가의 입꼬리가 풀어진다.

"앗, 뭐에요? 남자친구? 올가 벌써 남자친구 만든 거에요? 한국인이에요?"

"아니야!"

올가가 뒤에서 다가오는 청년을 밀어냈다. 올가보다 연상으로 보이는, 소년과 청년 중간쯤 되는 나이대로 보였다.

한국지부로 파견된 이들은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이들이 선정되었기에 교포거나, 혼혈이거나, 고려인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소년은 드물게도 순혈의 러시아인, 키가 크고 새하얀 피부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세르게이, 너도 정하가 어떻게 되었는지나 알아봐!"

"예예. 답장 빨리 써요. 이름이 수현?"

"꺼지랬지?"

올가의 몸에서 한기가 피어올랐다. 서늘한 감촉에 세르게이가 뒤로 물러났다.

"다른 클랜에서 정보를 사려고 했는데. 한국에선 우릴 환영하지 않는 거 같단 말예요."

"당연하지. 마스터가 깽판치는 거 전 지구가 아는데."

"자부심이 생기네요."

올가가 째려보자 세르게이가 양손을 흔들면서 뒤로 물러났다. 올가에게서 떨어져 있던 정장차림의 클랜원들도 사무실을 나섰다. 그들과 세르게이가 사무실을 나서는 것을 확인하고, 호롤 남은 올가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일 해.]

답장했다.

그날 만난 이 소년은, 이따금씩 그 얼굴이 떠올라 올가의 심장을 뛰게 한다. 동양인 특유의 동안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기 어려운 아름다운 외모를 한 소년이었다. 그 소년이 아몬드형 눈동자로 말끄러미 바라볼 때면, 자신의 속을 다 들키는 것만 같았다. 그 알 수 없는 분위기가 거북하지만, 또한 쉽사리 포기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올가는 답장을 기다렸다.

답장이 오지 않는다. 너무 문자를 간단하게 보냈나. 올가는 애써 다른 일들에 정신을 기울였지만 결국 눈길은 핸드폰에 닿고 말았다. 밀고 당기기라는 게 필요하다는데, 이건 너무 일렀던 걸까. 조금 더 길게 호의를 표현하는 게 나았을까.

"아, 짜증나."

그녀는 혹한의 징조 올가다. 이깟 문자 때문에 일희일비할 필요 없는 북방의 마녀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쇼파로 집어던졌다.

그 순간에 휴대폰이 울린다.

올가는 쇼파로 달려가 점프해서는, 휴대폰을 캐치하고 쇼파에 몸을 부닥쳤다. 쇼파에 몸을 파묻고 답장을 확인한다.

[고객님. XX금융 김미정 실장입니다. 고객님은 2000만원까지 대출하실 수 있으며…….]

올가는 맞은편 쇼파로 휴대폰을 다시 던졌다.

*

올가가 퀸즈 네스트 클랜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뒹굴거리는데, 전화가 왔다. 확인하니 세르게이였다. 올가가 툴툴거리며 전화를 받는다.

"뭐야."

[세르게이인데요. 정하가 나타났다네요.]

"뭐?"

[보아하니까 미확인 능력자에게 당하고 간신히 도망친 모양인데요.]

"어디에?"

[운무시 서쪽 폐허에 아지트를 차린 모양이에요.]

"확실해?"

[아직 눈으로 확인하진 못했고, 가는 중입니다.]

"어디야. 갈 테니까."

올가가 쇼파에서 뻘떡 일어났다.

슬라브계의 피가 섞인 올가는 동양인보다도 길쭉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곧바로 사무실을 나와 거리에 나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붙박였다. 키는 170 내외로 정하처럼 모델 같은 정도의 큰 키는 아니지만 그 이국적인 외모와 늘씬한 체구로 충분히 사람들이 눈떼지 못할 만한 모습이었다.

청바지는 허리를 맞춰 입었건만 기다란 하체에 걸맞지 않아 그녀의 흰 발목이 드러나고 말았다. 거기에 스니커즈를 신어서, 흰 발목이 드러나 사람들의 눈이 그녀의 다리로 모여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앞으로 벤츠 한 대가 멈추어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러시아인, 한국인 혼혈 청년이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올가가 지긋지긋한 태양을 피해 뒷좌석으로 몸을 실었다. 차가 가속하며 도로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수현 - 무슨 일?]

핸드폰이 부르르 떨더니 수현의 메시지를 표시했다.

올가는 문득 수현을 다시 생각한다. 남자치고는 여린 선을 가진 소년, 얼굴도 예쁘장해서 동양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본다면 여자애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하지만 묘한 체취를 가져서,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기이한 남자애.

퀸즈 네스트 클랜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런 소년과 사귀면서 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흡혈귀 사냥. 이거 끝나면 만날래?]

올가가 문자를 보냈다. 벤츠는 가속을 거듭하며 자동차들을 지나치고 목적지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정하를 향해 달린다.

악몽, 정하. 종속의 낙인을 타고난 마지막 뱀파이어. 퀸즈 네스트 클랜의 마스터 예브게냐 못지 않게 능력자 사이에서는 기피되는 여자다.

한 번 물리면 종속되는 그 낙인의 힘은 멘탈마스터 예브게냐의 정신지배보다도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예브게냐의 종속인을 정하가 빼앗으면서 증명되었다. 그로 인해 둘의 악연이 시작되었지만.

하지만 정하가 미확인 능력자에게 패하고, 그녀의 종속자들이 몰살 당하면서 정하가 오히려 그 미확인 능력자에게 귀속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미확인 능력자는 정하보다도 강하므로, 올가에게도 벅찬 상대일 것이다. 지금 정하가 잠시 도망쳐나온 지금, 그 미확인 능력자에게 벗어난 순간이 올가에게는 가장 큰 기회였다. 성과점수를 쌓을 수 있는 기회.

올가는 그 미확인 능력자가 돌아오기 전에 정하를 구속해서 클랜마스터에게 내보낼 계획을 짰다. 애초에 정하는 그 종속의 낙인 때문에 이름난 흡혈귀. 부하들이 없는 상태라면 올가에게는 문제 되지 않는다.

그녀는 혹한의 징조 올가, 모든 것을 얼리는 북방의 마녀다.

올가의 전화벨이 울렸다. 수현인가 싶어서 기대했는데 세르게이였다.

[올가, 남자친구 몇 살이에요?]

"닥쳐."

[올가보다 연상? 연하? 이건 좀 복잡하네.]

"시끄러워."

[올가가 몇 살인지 알아요?]

"무슨 상관이야. 네가."

[벌써 나이도 숨기는 거에요? 팜므파탈이네.]

"닥치고 정하 잡으러 가!"

[아, 정하요?]

세르게이의 목소리가 콧노래처럼 부드러워졌다.

[걱정 말아요. 지금 제 밑에 깔려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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