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 / 0180 ----------------------------------------------
3. 공주님을 위하여
퀸즈 네스트 클랜은 한국 지부가 있어. 그 일 이후로 멘탈 마스터는 날 벼르고 있거든. 기회 되면 나 잡을려고 만들었어. 제대로 미친년이야, 라고 정하가 말했다.
수현은 머뭇거리다가, 낡은 철문을 열었다.
케인의 펍은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좌표로 측정할 수 없는 이공간에 자리한 또 하나의 세계다. 때문에 케인의 바로 이어지는 통로는 한국 곳곳에 있었다. 수현이 사는 운무시에는 단 하나다.
건설이 중단된 폐허.
때문에 이따금 그곳을 향하는 능력자들의 기척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몇과 마주해도 그들의 시선은 서로를 빗겨갈 뿐이었다. 적이 아니라면 굳이 얽히지 않는다. 정글의 가혹한 룰이 이런 경계심을 키웠을 것이다.
채 지어지다 만 건물이라, 철문은 의미가 없었다. 벽이 다 이어지지 않아 문 옆으로 그냥 건너다닐 수 있는 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이로 비치는 그 너머는 휑한 공터였다.
그럼에도, 수현은 철문을 열었다. 철문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어서오십쇼."
서빙하던 남자가 수현을 보고 말했다.
수현은 순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우웃. 예전과는 다르다, 예전과는.
예전이 미국 서부개척시대 총잡이들의 아지트 같았다면 지금은 그냥 클럽 같았다. 춤을 추고 있진 않았지만 어두운 실내에 원탁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져 있고, 천장에선 특수회전조명이 색색의 반점들을 쏘아내고 있었다.
크기도 예전보다 넓어진 것 같다. 수현이 엉거주춤하고 있자 직원이 수현에게 다가와 자리를 안내했다. 그의 가슴에는 명찰이 달려있는데 닉네임이 폭주기관차다.
"부킹하실깝쇼?"
"네! 니요…… 부, 부, 부킹이요?"
"아, 모르고 오셨구나."
폭주기관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케인 사장님이 여자친구 생기신 기념으로 부킹올나잇 이벤트를 여셨습니다. 헤헤헤. 정글넷에 공지 떴는데."
정하에게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정글넷은 능력자들의 코드로 접속 가능한 그들만의 네트워크였다.
"자! 제가 쌔끈한 여자분으로 붙여드리죠!"
"아, 아니……."
"으헤헤헤. 사양치 마시고."
"그게 아니라, 그럼, 혹시 올가라는 여자애 알아요?"
"아하, 올가양 남자친구? 서, 설마 잡으러 온 거?"
"아, 아뇨. 그냥 만나고 싶어서."
"크…… 알겠네 알겠어. 이 형이 다 알겠다. 이 친구 사나이네. 그 마음 알지. 오늘이 마침 이런 날이니, 이 형이 동생 잘 되게 해줄게! 이 형이 책임진다! 간다!"
수현은 폭주기관차에게 끌려갔다.
그 와중에 지나치는 사람들은 평범한 차림새도 있었고, 정말 남다른 패션센스의 소유자도 많았다. 칼 든 사람, 카우보이 복장에 총 찬 사람, 갑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한복에 각국 전통의상을 한 사람들도 있다.
폭주기관차는 구석진 곳으로 수현을 끌고 갔다.
"자, 서로 만났는데 인사라도 하시죠. 으하하."
폭주기관차가 안내한 테이블에는 여자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수현 또래로, 혹은 조금 더 어리게 보였다. 딱 봐도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비딱하게 턱을 괴고 눈초리를 치켜뜬 모습이었는데, 수현과 폭주기관차가 등장하자 눈동자만 흘끗 굴려 바라보는 모양새가, 반항기의 불량아 같다.
별 버러지 같은 게 귀찮게 들러붙고 지랄이야?
수현은 소녀의 표정을 해석했다.
"뭐에요. 저 혼자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에이, 올가양, 일단 이야기라도 해봐, 이 친구 딱 미소년인 게 올가양 취향이잖아. 내가 서비스 팍팍 준다! 둘이 손 잡고 기다려!"
폭주기관차는 능숙하게 소녀의 다른쪽 손과 수현의 손을 이끌어 서로 마주잡게 해준 후 잘 놀라고 박수를 세 번, 짝짝짝 치고 사라졌다.
엉거주춤하게 서로 손을 잡은 상태의 수현과 소녀는 서로를 바라본다.
수현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소녀의 얼굴이 풀어졌다. 뾰족한 얼굴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면서, 수현도 조금 들뜬 기분이 되었다. 엄청나게 예쁜 여자애라는 건 분명하고, 얼굴 윤곽은 이국적으로 날이 서 있어 서구 혼혈인 것 같았다.
소녀가 앞에 잔을 채운 액체를 흔들어 조금 남은 것을 다 마셨다.
"나 놀러온 거 아니니까 너랑 어울려줄 생각은 없어."
"몇 살인데 반말이에요?"
"너 먼저 말해봐."
"열 일곱."
"내가 더 많네. 난 열 여덟인데."
"거짓말 같……."
"시끄럽게 말 많네."
"딱 세 마디 했는데……."
"또 따지고 드네."
소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남자가 소심하네. 그러니까 그렇게 생겼지."
"……."
요새 수현은 외모 지적질을 자주 받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픽 웃으면서 수현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디 클랜이야?"
"없는……."
정하에게 배운 바에 의하면 클랜이 없다는 건 여러모로 수상한 위치라고 했다. 그만한 실력이 있거나, 간접적으로 클랜과 연계되어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하나같이 이름 난 자들이었다. 스스로를 숨기려면 그런 건 떠벌이지 말아야 한다.
"이름 없는 작은 클랜이야."
"그래."
"넌?"
"퀸즈 네스트."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찾아왔다. 정하가 말한 멘탈마스터의 클랜이다.
수현은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멘탈마스터에게 부탁하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 접촉할 수 있을까. 정하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꼬셔봐, 라고 했다.
현재 한국 지부를 맡은 건 의외의 어린 소녀라고 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여자애, 혹한의 징조 올가다. 러시아 혹한의 마력을 타고난 마녀로, 그 잠재력만은 클랜 마스터의 힘에 준한다고 들었다. 아직 경험은 적지만 몇 번의 전투에서 클랜의 적들을 짓밟아 인정 받았다.
"러시아에서 왔어?"
"어. 한국 지부 발령 받았어."
"한국지부?"
"클랜 마스터가 한국의 어떤 흡혈귀한테 화났거든. 그거 하나 잡으려고 지부까지 내고 아주 가산 탕진할 기세라니까."
수현은 가슴이 뜨끔했다. 정하한테 화났다더니 정말인가보다.
수현은 새삼 소녀를 쳐다보았다. 얼굴선이 뚜렷하고 콧날이 도드라진 게, 이국적인 모양새가 섞여 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소녀가 부끄러워하며 몸을 뺐다.
"뭘 그렇게 봐?"
"예뻐서."
정하에게 이런 말 해줬더니 되게 좋아했기 때문에 수현은 써먹었다.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소녀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흐, 흥, 신기해서 봤겠지. 혼혈이니까."
"혼혈이야?"
"어머니가 한국인이야."
"이름이 뭐야?"
"올가 예르몰로바."
얘는 올가. 멘탈마스터의 이름은 예브게냐. 수현은 이름을 곱씹으면서 생각했다. 니네 클랜마스터에게 하나 부탁해도 돼? 너무 갑작스럽다. 클랜마스터는 부탁 잘 들어주니? 아니다. 클랜마스터한테 말 좀 전해줄래? 수현은 고민 끝에 말했다.
"클랜마스터 착해?"
"아-니!"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격한 부정.
올가가 지나가던 직원을 붙잡고 술을 주문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술을 잘 마신다는 게 사실인가보다.
"왜?"
"성격 더러워. 최악이야. 멋대로야. 자기가 최고로 예쁘고 최고로 잘난 줄 알아. 수틀리면 장난 아냐. 아주 황제폐하 만세야."
"그렇구나."
"인정 없어. 사정도 안봐줘. 까라면 까야 돼. 안그럼……."
올가가 입을 다물었다. 우울한 기운이 깃들었다.
"탈퇴하면 되잖아."
"나더러 죽으라고?"
"……."
아주 성격 더러운 여자인가보다. 수현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여자한테 어떻게 부탁을 하지.
"……그래도 이번 일 끝내고 쌓인 성과점수로 탈퇴 승인 부탁해보려고."
"일이 뭔데?"
올가가 생긋 웃었다.
"정하라는 흡혈귀를 숨만 붙여서 마스터한테 끌고 가면 돼."
수현의 심장이 두근, 뛰었다. 그 순간 포식자의 어둠이 스물거리며 몸 여기저기를 휘돌았다. 이내 맹수의 눈동자로써 들여다본 올가는 강했다. 정하 못지 않게 강력한 마력이 올가의 주위에서 은은하게 멤돌았다.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한기가 그녀의 몸을 뛰쳐나가려 아우성이다.
"정하는 강력하다고 들었는데."
"난 더 세니까."
올가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난 혹한의 징조 올가야. 정하를 해치우고 자유를 찾을 사람이지."
수현은 이 소녀를 보며 생각했다. 자신의 플랜 A는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 정하가 제안한 플랜 B가 남았다. 그렇다면, 멘탈마스터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소녀를 이용하는 게 옳은 것일까? 아니, 상관 없다. 이곳은 정글이다. 올가가 얻은 혹한의 칭호도 시체를 쌓아 만든 탑일 테다. 수현이 올가를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정글이라는 곳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수현은 마음 편하게 떠날 수가 없었다. 수현은 자신을 위해 희생하려고 한 소녀를 기억하고 있다. 수현은 그 소녀를, 상처 입고 잠든 공주님을 깨워야 하므로. 필요한 양만큼의 악의를 가슴에 품기로 했다. 공주님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