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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게임-11화 (1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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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주님을 위하여

소녀는 밤거리를 달리고 있다.

그녀가 도약하자, 단숨에 풍경들이 뒤로 흩어졌다. 뒤따라오던 이들이 몇 개의 빛줄기를 쏘았지만 소녀가 유연하게 몸을 굽히고 뒤틀어 피하자 허공을 긋고 지나갔다. 색색의 빛이 소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그녀가 착지하고서는 방향을 틀어 다시 뛰어들었다.

추격자 중 한 명이 그녀의 발치에 이르러 주먹을 휘둘렀다. 소녀는 손을 낚아채어 뿌리치고는 공격자의 디딤발을 걷어차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의 배를 짓밟고 뛰었다.

"크흑!"

"미안! 난 갈 거야!"

"왜 도망치는 거야! 클랜 마스터에게 사과하면……."

"사과?"

순간, 소녀가 멈추고 잠시 돌아보았다. 눈동자에는 혐오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우리는 클랜도 아냐. 그 여자의 장난감들이지."

그 순간, 멀리서 불빛이 소녀를 비추었다. 그녀는 불빛 사이에 갇히기도 전에 뒤돌아 다시금 탁탁탁, 뛰어나갔다. 그녀의 다리가 점점 가속하더니, 이내 자동차 못지 않게 표홀해졌다. 그녀의 신형은 밤거리의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에서 점점 흐릿해진다.

가속 능력자. 그녀의 스피드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섰다. 그녀가 뛰기 시작하면, 똑같이 속도로 붙잡을 수 있는 인간은 없을 터이다. 그녀는 한 줄기 바람이었다.

하지만, 추적자들은 그녀와의 거리를 착실하게 좁혀오고 있었다.

연약한 육체의 인간들이, 자기보다 우월한 종(種)을 상대하기 위해 제시한 답.

기술Technology.

소녀를 추격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람보르기니Lamborghini 가야르도Gallardo!

샛노란 차체가 어둠을 가르고 풍경을, 바닥을 뒤로 물리며 경쾌하게 쇄도하고 있었다. 엔진소리가 공기를 갈라내며 가속을 거듭해갔다.

소녀는 뒤에서 느껴지는 육중한 존재감에 이를 악물고 다리를 놀렸지만, 점점 거리가 좁혀드는 것을 알았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소녀의 등이 붙잡혔다. 소녀가 거리 사이로 가지처럼 뻗은 골목으로 뛰어들려 했다. 한껏 무릎을 굽혀 추진력을 얻으려는 참이었다.

갑작스런 방향전환에 무릎이 비명을 질렀다. 소녀는 갖은 힘을 짜내어 뛰어오르려는 찰나.

[넌 못 해.]

소녀는 순간 뛰어오를 수 없었다.

그저, 그녀는 못하니까.

[무릎 꿇어.]

소녀는 자연스레 무릎을 꿇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여린 살갛이 짓눌려 고통스럽지만, 그녀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저, 무릎을 꿇어야하니까. 그게 그녀의 일이니까. 소녀는 속력이 줄어들어 천천히 서행하는 가야르도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선탠된 차창 안으로 무엇도 비치지 않는다. 저 안에 무서운 것이 타고 있다. 소녀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저 안에서 거대한 악의가 넘실거렸다.

[무릎과 팔꿈치로 기어와.]

소녀는 생각한다. 원래 나는 어떻게 움직였더라. 기억나질 않았다. 저게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니, 맞아. 저게 맞아. 원래 무릎과 팔꿈치로 기어다니는 거였어. 아니다. 그게 아니다. 저렇게 기어가는 게 이상할 건 없지만 이건 실은 내 머리를 조작당한 것 뿐이다. 분명 나는 조종당하고 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으니 저렇게 갈 수밖에…….

소녀는 가슴에 적개심을 태우면서도, 인도대로, 무릎과 팔꿈치로 땅을 짚어 자동차로 걸어갔다.

고통스럽다. 아스팔트의 까칠한 표면이 그녀의 살갛을 찢었다. 피가 배어나오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녀는 그렇게 기어갈 수밖에 없다.

가야르도 조수석의 차창이 조금 떨어져 내렸다. 그 틈으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놀랍도록 오만한 태도가 배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왜 도망쳤니? 클랜은 가족이잖아?"

"너의 장난감 병정들이겠지."

소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녀가 대답하자 차 안에서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바닥을 기는 소녀의 곁으로 일련의 능력자들이 도달하여 포위했다. 소녀는 절망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배신했으니 넌 내 장난감도 될 수가 없네."

소녀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머리를 헤집고 들어오는 타인의 의지가 느껴졌다.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을 검색당하고, 멋대로 휘저어지는 것은 구토가 일 정도로 역겨운 것이었다. 지난 삶의 기억들이, 그녀의 사상과 관념이, 모두 타인에 의해 낱낱이 발가벗겨지고, 그 뜻대로 조종되어진다.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물 흘리며, 신음했다.

"아으, 흐아, 아으……!"

"별 거 없네."

소녀가 가진 일생의 기억들을 억지로 열어제끼고서, 그녀는 평했다.

목소리는 말을 이었다.

[내 발을 핥아.]

조수석이 열리고, 그 사이로 킬힐을 신은 발이, 내밀어졌다.

가느다랗고 흰 다리였다. 차문 사이로 무릎께까지 뻗어나온 늘씬한 다리는 거리의 어슴푸레한 나트륨등 아래에서 희게 빛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랜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소녀는 그 아름다운 다리를 향해, 몽롱한 얼굴로 기어간다.

소녀는 끊임 없이 머리를 침범하는 타인의 악의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저 멍해진 채로 그 명령을 따른다.

소녀가 혀를 내밀어 그녀의 스틸레토힐의 앞코를 핥았다. 작은 소녀가 굴종하는 장면은 너무도 가련하였지만, 목소리는 가차 없었다.

"혀로 깨끗하게 해.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잖아."

소녀는 혀를 더 내밀어, 혓바닥 전체로 신발을 핥기 시작한다.

그녀의 힐에 소녀의 타액이 묻어나, 번들거렸다. 스틸레토힐의 굽까지 할짝였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머리는 점점 헤집어지고, 난도질되어, 그녀 스스로의 자아는 자아의 심해로 침몰하는 중이었다.

문득, 소녀의 혀가 여인의 발등에 닿았다.

"뭐하니? 더럽게."

힐로 소녀의 얼굴을 걷어찼다. 소녀의 얼굴에서 피가 터지며 바닥을 굴렀다. 스틸레토와 늘씬한 다리는 다시 차 안으로 스르륵 돌아가고 차문은 닫혔다.

"그 여자애는 너희 마음대로 해."

그리고 가야르도는 헤드라이트를 밝히더니, 거리를 떠났다. 시원한 배기음이 밤거리를 환기하고 떠나갔다. 그 바람에 티셔츠를 입은 클랜원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그의 아랫배가 드러났다. 그곳에 새겨진 타투.

Queen's Nest Clan.

그들과 같은 타투를 한 소녀는, 정신을 파괴당했고, 이젠 클랜원에게 둘러싸여, 그리고 그 이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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