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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주님을 위하여
"설마 내일도 학교 오는 멍청이는 없겠지?"
미모의 여성이 교탁에 상체를 기대어, 정확히 말하자면 커다란 가슴을 얹다시피 하여 상체를 앞세우고 회초리를 까딱거렸다. 그녀의 안경이 콧등을 타고 슬쩍 내려와 있어, 안경태 바깥으로 고혹적인 눈매가 드러나 있었다.
수현의 담임, 예지윤이다.
"놀토라고 진짜 놀면 니네 인생 망하는 거야. 가정학습! 내가 강조하는 거. 명심하고."
그녀의 미모로 보아선 남학생들이 짖궃은 농을 던질 것도 같은데, 교실은 죽은 듯이 조용하다. 그녀가 지우개를 위로 던지고 다시 받을 때가지 회초리를 일곱 번 휘두를 수 있다는 소문이 있다.
"특히 이수현."
"네!"
"학교 째면 뒤진다."
"예, 옙!"
반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수현을 흘긋 쳐다보던 그녀가 성큼성큼 수현에게 걸어갔다. 타이트한 청바지라 그녀의 늘씬한 다리선이 돋보였다.
다짜고짜 회초리로 수현의 팔뚝을 후려친다.
"아윽!"
"아, 니 얼굴 보니까 또 빡치네. 내가 그날 너 때문에 욕 한바가지 먹었다."
그녀는 수현의 팔을 두어대 더 후려쳤다. 수현이 맞을 때마다 웃음이 번졌다.
예지윤은 회초리를 거두고 어깨를 툭툭 치며 교탁으로 돌아갔다.
"다들 알아들었지."
"예!"
"그럼 집으로 꺼져."
그녀의 마무리에 또 다시 키득거렸다. 예지윤은 함부로 대하기는 힘든 타입이지만 실은 제법 유머감각이 있다.
종례가 끝나자 우르르 일어나 교실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여학생 몇 명은 지윤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걸었고 그녀도 미소 지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현은 팔뚝에 난 회초리자국을 문지르며 책상에 퍼질러 있었다.
"야 이수현."
정태가 다가와 수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좋겠다."
"어?"
"맨날 쳐맞아서."
"이 새끼가?"
수현의 한 마디를 캐치한 지윤이 소리쳤다.
"뭐, 개새끼?"
"아니요! 아니에요, 쌤!"
수현이 정태를 붙잡고 교실 바깥으로 도망쳤다.
정태가 웃겨 죽겠다는 듯 수현의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
"너 진짜 좋겠다. 헤드샷도 그렇고 담임도 그렇고 너만 보면 후려갈기잖아."
"어, 나도 이제 안맞으면 허전하다."
정태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포식자가 된 이후로 감이 좋아져서 누가 쳐다본다거나 하는, 사소한 기척들을 잡아낼 수 있었다. 운동능력도 향상되어서 달리기라도 하면 너무 빨라서 보폭을 늦춰줘야 할 판이다. 제대로 기록을 재면 올림픽 신기록이 나올 것 같다.
"왜?"
수현이 고개돌리자 정태도 같이 돌아보았다.
다른 반 남자애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갸웃거리며 수현을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피하고 걸어갔다.
"쟤 너한테 관심 있냐? 역시 넌 남자한테 더 먹히는 거 같다. 수술할래?"
"니 입부터 내가 수술해줄까?"
수현이 정태 입술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정태가 형편없이 끌려다니며 신음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곁을 지나던 여자애들이 꺄악거렸다.
기분이 나빠져서 손을 뗐다. 그녀들이 나누는 그들만의 대화 속에는 비엘이니 공이니 수니 하는 기분 더러워지는 단어들만 귀에 띄었다. 그간 귀에 들어오는 잡스런 수다만으로도 의미들을 알게 되어버린 건 더 화난다.
"마치고 뭐할 거야?"
"집에 갈 거야."
"집에 왜? 너 혼자 살잖아. 할 거 없잖아. 놀자."
"오늘은 가야 돼."
"왜?"
"시끄러워."
수현이 정태를 밀었다.
혼자 산다니.
집에는 정하가 있다.
그리고 잠든 세연이 있다.
*
"나 왔어요."
대답이 없다. 수현이 방에 가방을 던졌다. 수현의 방 컴퓨터로 게임에 집중하는 정하가 보였다. 속옷만 대충 걸치고 안경을 쓴 채 모니터 잡아먹을 듯 눈빛 번뜩이는 그녀는 영락 없는 폐인의 차림새다.
하지만 그 원판이 몸매 늘씬한 미모의 아가씨다보니까, 색기 넘치는 매혹적인 모양새가 되버렸다. 속옷만 입고 게임하는 여자라니. 그런데 섹시하잖아! 수현이 정하 어깨를 건드렸다.
"게임은 적당히 해요."
"어, 주인님 왔네."
정하가 수현의 목을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해주고는,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수현이 들여다보니 채팅창에 패드립이 난무하고 있다. 그녀는 서툴지만 열정 넘치는 손놀림으로 점멸 다이브를 치다 개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채팅창에 탑신병자라는 단어가 표시된다. 수현은 그 표현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수현은 침실로 걸어갔다. 침대에는, 잠자는 세연이 있다.
정하의 슬레이브들에게 범해지고, 정신을 잃은 후 깨어나지 않는 공주님.
세연은 눈을 감은 채 죽은 듯이 있다. 수현이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티없이 단정한 얼굴에는 표정이 깃들인지 오래 되었다. 그저 느끼지도 못할 희미한 숨결을 주고 받을 뿐이다.
"이대로 더 두다간 위험할 거야."
돌아보니 정하가 문턱에 서 있었다.
"난 별 상관없지만."
"누나 때문에 이렇게 됬잖아요!"
"그래서?"
정하가 픽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수현은 화가 치밀었다.
정하가 진단하기를, 정신적 충격에 의해 깨어나기를 거부하는데다가 그로 인해 초래된 마력의 불균형이 신체기능마저 좀먹고 있다고 했다. 정하의 슬레이브들에게 당한 충격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정하는 전혀 죄책감 느끼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걸 감추려고도 하지 않아서, 수현은 정하에 대한 화가 쌓이고 있었다.
"그 애가 안가르쳐줬어? 여긴 정글이야. 걘 패자였고. 승자는 패자에 대한 무제한의 권리를 가지고 그게 룰이야. 어설픈 마음으로는 너도 저런 꼴이 될 걸."
세계의 이면, 어둠의 세계에서 만화에나 나올 법한 힘으로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는 이들. 그들에게는 경찰도, 법도 통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을 막기 위한 하나의 규칙. 승자독식의 룰만 존재한다. 수현이 몇 번이고 들었던 바로 그 이야기다.
"승자의 권리?"
"그래. 뭘 해도 되는 거……."
"당신은 내게 패했죠."
정하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수현은 분노가, 미묘한 악의가, 안에서 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엎드려요."
"뭐?"
정하가 되묻자, 수현이 다시 말했다.
[엎드려요.]
이번엔, 수현의 목소리에 마스터의 권능이 배어나왔다. 정하는 자신의 의지에 관계 없이 스르륵, 엎드리게 되었다. 거부하려고 몸을 뒤틀자 낙인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그녀는 엎드린 채,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뭐하는……."
"누나 말대로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 뿐이죠."
수현의 목소리가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