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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식자의 의미
눈을 뜨자 감각이 돌아왔다. 몽롱하게 몸을 흔드는 쾌감이 느껴지고, 동시에 목덜미가 시큰거렸다. 수현이 손을 뻗어 정하의 가느다란 목을 잡았다.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수갑은 쉽게 부서졌다. 손바닥에 닿은 것은 정하의 목이다. 힘주어 잡았다. 정하의 몸이 경직되더니, 수현의 손목을 붙잡고 발버둥쳤다.
"으크…… 으큿……."
그녀의 송곳니가 빠져나가고, 그녀의 몸이 떠오른다. 수현이 상체를 일으킨 채 정하의 목을 움켜쥐었다. 숨이 막히는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아파요?"
"큭…… 으크흡……."
수현이 그대로 정하를 집어던졌다.
세연을 범하던 슬레이브 무리에 부닥쳤다. 휘말린 적들이 바닥을 뒹굴었고, 여파에서 피할 수 있었던 자들이 수현을 향해 기운을 겨누었다.
수현이 천천히 걸어갔다.
온몸에 힘이 자리했다. 자신을 두른 보이지 않는 힘들이 몸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감출 수 없는 암흑은 온 힘의 틈새에서 배어나온다. 먹물이 물에 번지듯, 수현의 힘이 공간을 검게 물들인다.
수현의 기운이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맹수를 눈앞에 둔 초식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움츠렸다. 유전자에 각인된 공포였다. 침착한 자들조차,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리며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정하가 잃어나 송곳니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까불지 마!"
그리고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궤적을 따라 공간이 갈라지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핏빛이 수현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하지만 그것들은 수현의 어둠에 감싸이며, 실종된다. 암흑 속에 열린 또다른 공간으로 날아간 것처럼 사라졌다.
이 힘으로 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수현이 정하를 향해 웃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도 입을 다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순진하던 소년 같지 않은, 퇴폐적이고 잔혹한 미소였다.
"그게 아니죠."
"뭐?"
"누가 까불었는지."
수현이 다가갔다. 한 걸음, 다가가자 정하의 무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다시 한 걸음, 그들이 뒷걸음, 결국 그들 사이에 축 늘어진 세연만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오물 투성이의 세연을 내려다보며 수현이 미간을 비틀었다.
"너무 심하게 까불었어."
수현이 손을 들었다. 수현의 몸에서 새까만 기운이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지독한, 그리고 순수한 어둠이었다. 새까만 마력이 수현의 손에서 연장해나와 마치 짐승의 팔처럼 길어지고,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났다. 암흑의 짐승이다. 어둠은 공간을 잠식하고, 가옥을 뒤덮어 그들의 시야는 온통 암흑과 눈앞의 수현뿐이다.
수현이 팔을 뒤로 뺐다가, 단숨에 휘둘렀다. 짐승의 팔은 공간을 넘어 순식간에 정하와 그녀의 슬레이브들에게 이르러 그들의 복부를 찢어발겼다.
"대가를 치러야지."
"넌 누구야. 아까 그 꼬마가 아니야."
"네 덕분이야."
바닥에 떨어진 그 목걸이를, 수현이 발로 짓밟아 부수었다.
그리고 한 걸음 딛는다. 발자국마다 어둠이 싹 틔우듯 피어오른다.
수현은 오랫동안 자신의 능력과 유리된 채 살아왔다가, 지금 풀려났다. 그 반동으로 포식자의 습성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다. 둘은 하나지만 완전히 융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사악하고 잔혹한 부분만 깨어나 있는 것이다. 해방된 능력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유로웠고, 막연히 모든 것들이 납득되었다. 취한 듯 온몸에 고양감이 넘치고, 온갖 불길하고 타락한 즐거움들이 떠올랐다.
소란이 일자 바깥에서 대기하던 슬레이브들도 우르르 몰려왔다. 정하가 휘하에 거둔 노예는 수십은 되어보였다. 그들 모두가 세연 못지 않게 강력한 능력자들이다. 그리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건 극동 최강의 뱀파이어, 정하였다.
악몽, 종속의 낙인을 가진 자, 정하.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저 사냥감이다.
정하의 명을 받은 슬레이브 셋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모두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그리고 뒤에서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능력자들이 동시에 화력을 쏟아부었다. 실내가 능력자들의 힘의 폭풍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힘들은 채 반도 가지 못하고 멈추었다. 세연이 자리한 곳, 그 곳을 경계로 하여 마력의 벽이 펼쳐져 그들의 공격을 모두 막은 것이다. 몸으로 달려든 이들은 어둠에 잠식되어 압사당한다. 고통스럽게 바닥에 짓눌려 숨이 넘어간다. 힘에 의해 보호받은 세연은 여전히 축 늘어져 있었다.
수현이 바닥을 딛고 뛰어올랐다.
수현의 몸은 이미 검은 기운이 휩싸여, 새까만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수현의 동공이 붉게 물들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새까만 기운 사이에 박힌 핏빛의 눈동자는 소름끼치게 사악하고, 아름다웠다.
그들 슬레이브 사이에 뛰어든 수현이 달려드는 슬레이브들의 복부를 찢어발겼다. 종이처럼 손쉽게 갈라진 배에서 내장이 흘러내린다. 그들이 자신의 배를 부여잡고 비명을 토했다. 어둠이 파도처럼 일어나면, 널부러진 내장과 핏물이 함께 그들을 덮친다.
발화능력자가 수현에게 불길을 쏟으며 뒤로 피했지만, 수현은 오히려 불길을 자신의 힘처럼 몸에 두르고서, 능력자를 감싸안았다. 발화능력자는 자신이 붙인 불길에 타죽었다. 그의 시체를 불태우는 것은 까맣게 물든 불이다.
피비린내, 살 타는 냄새가 피어오른다. 이곳에 가득한 것은 눈물과 비명, 두려움이다. 짐승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수현이 웃으며 하나하나 짓밟았다. 벌써 반이 죽거나 전투불능이 되었다. 정하는 꼼짝하지 못하고 멍하니 수현을 바라보고 있다. 눈이 흔들린다. 두려움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겁에 질린 사냥감은 귀엽다.
"그만…… 우리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야. 저 여자가 노예로 만들었다고!"
능력자 하나가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정하가 그 쏘아보자, 그 능력자는 고통에 잠겨 바닥을 뒹군다.
"빨리 저 괴물한테 덤벼! 너흰 내 노예야! 싸웟!"
정하가 소리쳤다. 결코 그러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이미 노예의 낙인을 찍힌 슬레이브들은 수현에게 다가왔다. 자신 각자의 무기를 세우고서,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예정된 운명을 향해 돌진했다.
수현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슬레이브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거대한 압력에 짓눌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정하의 눈이 커졌다.
"이정도의 마력이라니, 말도 안돼……."
문득, 수현이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는 가느다란 초생달이 요사스레 떠올라, 흐붓이 빛을 떨어뜨린다. 기분 좋은 달빛이다. 수현이 맑게 웃었다.
"달 좋네."
그리고는 창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찬공기가 새어들었다.
"너희들, 내가 풀어주면 착하게 살 거야?"
수현이 창밖에 눈을 두고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인지 깨달은 정하가 코웃음쳤다.
"종속의 낙인은 오직 나의 권능이야. 내가 죽으면 모두 죽어버리게 만들었어. 네까짓 게……."
"그러는 넌 내 권능을 알아?"
정하가 입을 다물었다.
수현이 다가갔다. 정지한 슬레이브들은 수현이 지나가는데도 꼼짝하지 못했다. 수현이 정하와 마주하며 섰다. 뱀파이어는,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서 몸을 떨었다.
수현은 이제 이제 역전한 형세를 새삼 생각하며 웃었다. 자신을 희롱하던 아름다운 뱀파이어는 이제 자신의 기운에 눌려 바들바들 떨었다. 옷자락 아래로 뻗은 새하얗고 긴 다리는 이미 힘이 풀려가는지 서 있기도 힘들어보였다.
수현이 손을 뻗어 정하의 목을 잡았다. 정하의 키가 조금 더 커서, 그녀의 목을 잡아 당겨 곧게 선 채 눈이 마주쳤다. 수현이 정하의 목을 움켜쥐고 잡아당겨, 눈을 가까이 했다. 수현의 검은 눈에 마주친 순간 정하는 그 눈을 향해 자신의 몸이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걸 빨아들이는 탐욕스러운 구멍이었다.
순간, 정하는 경악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수현에게 빨려들고 있었다. 수현의 손목을 붙잡고 발버둥쳤지만 이미 수현의 강대한 마력이 그녀를 제압한 후였다. 정하는 자신의 마력, 권능, 모든 게 수현에게 빨려드는 것을 느꼈다. 영혼을 빼앗기는 감각.
수현이 씨익 웃는다.
"말도 안돼……."
슬레이브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정지한 채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이 정하의 뒤로 돌더니, 정하를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를 했다. 정하는 수현의 의도를 눈치채고 반항했지만 수현의 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하의 옷을 다 찢어벗겼다.
큰 키와 모델처럼 늘씬한 몸매, 그리고 제법 큰 가슴이 드러났다. 이미 힘이 풀린 다리는 더 서 있지 못하고 수현에게 매달린 형국이다. 수현이 씨익 웃자, 수현의 입술 사이로 기다란 송곳니가 드러났다.
"하던 거 마저 하자구요. 누나."
수현의 송곳니가 정하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