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 / 0180 ----------------------------------------------
1. 부서진 세계
[ 이소희 - 어떡해. 너 망했어. 빨리 와. ]
수현은 음울한 눈으로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저 이제 가면 안되요?"
"안돼."
수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곳에 오게될 줄은 몰랐다. 아직은 이럴 시기가 아닌데, 아, 너무 이르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실내에 가득한 담배연기가 온몸에 가득 배는 기분이다. 여기저기서 잔이 부딪쳤다.
술집이었다.
빗자루에 매달려 도착한 곳은 그냥 허름한 폐건물인 줄 알았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치 미국 서부개척시대 총잡이들이 머물다 갈 것 같은 주점이 나타났다. 게다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그 안에는 평소에 보기 힘든 다양한 인종과 길거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비범한 차림새의 군상들이 끼어 있었다.
아니, 이 시대에 등에 칼 매고 다니는 저 여잔 대체 무엇인가.
"여긴 안전해."
"전혀 그렇게 안보이는데요."
술집 구석에서는, 남자들 여럿이서 영화에서나 본 러시안 룰렛이라는 걸 실제로 시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총이라니, 수현은 모조품일 것이라고 억지로 자신을 납득시켰다.
"너, 전혀 몰라?"
"네. 아무 것도 몰라요. 이게 다 뭐에요? 아까 그 여잔 뭐고, 선밴 또 뭐에요. 마녀? 해리포터 같은 이야깁니까? 일반인들은 모르는 어둠의 세계?"
"어. 영화에서 봤지? 비슷한 거야."
세연이 무엇인지 모를 음료를 마시고는 테이블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점의 바텐더가 손바닥을 가져다대고 무어라고 중얼거리니 세연의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세연이 그는 치유사라고 했다.
"여긴 케인의 펍이야. 그는 중립을 지키는 자. 여기선 누구도 남을 공격할 수 없어."
"케인이란 사람이 되게 센가 보죠? 여기서 싸우면 그 사람한테 혼나요?"
"케인은 그냥 죽여."
케인이란 사람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다.
"아깐 왜 맞고 있었어요? 아니, 그 여잔 누구에요?"
"그 여자는 정하라고 해. 최악의 상대야. 뱀파이어인데다 하필이면 종속의 낙인을 타고났거든."
종속의 낙인은 뱀파이어 중에서도 드문 능력으로, 피를 빨아들인 자를 자신의 노예로 부릴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대개의 뱀파이어는 피를 통해 기력을 보충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처럼 뱀파이어로 전염시키는 건 아니라고 했다.
"세상에 뱀파이어란 게 많아요?"
"한국에는 별로 없는 편인데. 그 여자가 유달리 까불어. 하지만 누가 막을 수도 없지. 뱀파이어 중에서도 극동 최강이라고 하니까. 옷도 맨날 그 따위로 입고 다니는데, 망할 허영만 가득한 년."
옷, 하니까 그녀의 노팬티가 생각났다. 환한 햇살 아래에서 보고 말았지. 수현은 직접 목격하고 만 여인의 신비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근데 그 여자랑 왜 싸워요?"
그 말에 세연이 홱 고개 돌려 수현을 노려보았다. 억울한 것 같기도, 분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수현을 향했던 그녀가 다시 시선을 거둔다.
왜라니, 하고 속삭이더니, 세연이 이내 웃었다. 자조적이기도 하고, 허탈해하는 것 같기도 한, 공허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가라앉아 있었다. 수현은 세연의 서늘한 한숨소리에 어쩐지 그녀가 다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수현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언인가 있어서는 안될 세계에 왔다고 느낀다.
"나도 그런 거창한 이유 있었으면 좋겠다."
세연이 다시 음료를 홀짝였다. 그녀의 얼굴이 발갛다. 그제야 수헌은 그게 술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하가 지나가다가 날 봤어. 그 여자 아래에는 마녀가 없어. 하나 있었으면 싶었겠지. 그게 다야."
수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경찰한테 말해요. 아니, 여긴 법 같은 거 없어요?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해요?"
"그래."
세연이 수현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지었다.
"약육강식이 곧 룰이야.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얻는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비슷한 또래의 이 소녀는, 자신이 알지 못할 가혹한 정글을 살고 있다. 힘이 법인, 무방비한 약육강식의 룰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결계를 넘은 것 보면 너도 무언가 능력이 있는 거야. 미확인 능력자. 차라리 계속 모르는 채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은 내 역할도 있었으니까, 미안하네."
"선배가 미안해할 건 없어요."
"흐흣, 나중에 말 바꾸지 마라."
수현에게 콜라가 배달되었다. 세연이 잔을 들이밀어서, 수현도 어설프게 잔을 맞부딪쳤다. 둘이 잔을 든다. 조명이 유리잔의 곡면을 타고 산산히 부서져 빛나는데, 그 너머에서 그늘 드리운 얼굴로 세연은 웃고 있었다. 여전히 눈은 웃지 않는다.
"이 엿 같은 정글에 온 것에 애도를 표한다, 이수현."
*
세연도 우연히 마녀가 되었다고 한다. 그저 돌아가신 어머니가 마녀였는데, 어머니가 남긴 마도서를 발견하고 혼자 독학해서 마녀가 되었다. 처음엔 마법인 줄도 몰랐는데, 타고난 마력으로 어린 나이에 강력한 마법사가 되었다. 정글에 휘말릴 줄 미리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세계 그 너머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때로는 분란을 일으키는, 바깥의 룰이 통하지 않는 이곳을 그들은 정글이라고 불렀다.
일반인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게 방침이다. 오래 전,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강력한 군주들이 모여 대회의를 통해 합의했다고 한다. 누군가 선을 넘으면, 그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그들 사이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법도 없고, 경찰도 없고, 오로지 힘의 논리로 구성된 가혹한 약육강식의 세계. 때문에 여기에서의 룰은 단 하나다.
승자독식.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얻는다.
힘이 지배한다.
세연도 강한 마력을 타고나서 한국에선 드문 능력자로 알려졌지만, 정하 같은 괴물이 덤비면 무리라고 했다.
"그래서 클랜에 들어가려고 했어."
"클랜이요?"
"그래. 무리에 속해서 자신을 보호하는 거지. 웬만큼 자신 있지 않으면 클랜에 가입해. 지켜주니까."
"그럼 그 여자도 못건드리나요?"
"클랜이 충분히 강하다면."
세연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짜증난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다."
"정하만 처리하고 조용히 살면 되잖아요."
"클랜에 가입하면 시키는 일 해야 돼. 공짜는 없어. 안전을 담보로 일하는 거야."
수현은 세연을 바라보았다.
지금 보면 체구도 크지 않고, 눈이 커다란 게 딱 귀여운 얼굴이다. 마녀라고는 해도 겨우 열 일곱 살 고등학생 소녀다. 또래들이 방황할 나이에, 세연은 목숨을 걸고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엾다.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 순간 수현은 세연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세연이 눈을 돌린다. 그 커다랗게 맑은 눈을 의식하면서, 수현은 세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쳤냐?"
"다 잘 될 거에요. 힘 내요."
"퍽이나."
세연은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흘끗 옆을 바라보더니 수현을 밀어냈다.
"왔어."
수현이 돌아보자, 문을 열고 막 들어서는 사나이가 보였다. 검은 코트에 중절모를 쓴, 마피아 같은 차림새의 아저씨다. 두리번거리다가, 이곳을 발견하고는 곧장 걸어왔다.
수현과 세연의 맞은 편에 자연스럽게 앉는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서양인이었다. 주점의 어슴푸레한 전등불빛 아래에 서구적인 얼굴선이 도드라졌다. 코가 크고, 눈은 움푹 들어가서 어찌 보면 이름 모를 영화배우를 닮은 듯도 하다. 코 아래와 턱에 수염이 짧게 돋아나 있었다. 터럭도 눈동자도 짙은 잿빛이었다.
"누가 뇌전의 마녀 주세연이지?"
그가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국말은 참 잘하는데, 한국인 얼굴은 안익숙한가. 남녀가 앉았는데 고민할 게 있나.
"아니, 내가 맞춰보지. 뇌전의 마녀는 뛰어난 미모의 소녀라고 했어. 그렇다면……."
남자가 수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래. 세연 양. 만나서 반가워요. 난 철십자 클랜의 요한이오. 소문대로 미인이시군."
"……."
세연이 수현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수현이 옆구리를 잡고 웅크렸다. 수현의 등어리를 한 대 더 내리친 세연이 입을 열었다.
"제가 주세연이에요. 그리고 얘는 남자애에요."
세연이 말하자, 요한이 중절모를 벗고 수현을 훑어보았다. 이 예쁘장한 동양인은 탁자 아래로 교복바지를 입고 있다. 졸지에 아저씨에게 위아래로 훑어진 수현은 소름이 돋았다.
요한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남자가 뭐 이렇게 생겼어……?"
요한이 콤플렉스를 건드리자 수현이 분노했다. 수현은 무어라 발끈하려 했지만 세연에게 다시 옆구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웅크렸다.
요한은 여전히 수현을 경멸하듯, 약간은 경계하듯 쳐다보면서 세연에게 말했다.
"그래. 세연 양. 계속 권유를 거절하더니. 이제야 가입하겠다는 이유가 뭔가?"
"정하가 날 노려요."
세연의 말에 요한이 피시식,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 쌍년 참."
요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얼마나 쳐먹으려는 거야? 클랜 규모는 되겠네."
"보호해줄 수 있나요?"
"물론."
"저 포함해서 여기 수현이도 보호해주세요."
수현은 감동했다. 어쩌다 휘말린 자신을 세연은 끝까지 지켜주려 하는 것이다.
"선배……."
"그런 표정 하지 마. 흥. 따, 딱히 널 위해서가 아니니까!"
수현이 감격해서 세연을 껴안으려고 했지만 세연은 그 전에 먼저 옆구리를 다시 때렸다. 수현이 웅크린다. 갈비뼈 나가겠다.
"이 학생도 가입하는 건가?"
"그래요."
"전력이 될 거 같지는 않은데. 기준미달은 안받아."
요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수현을 보았다. 수현도, 피하지 않고 썩은 표정으로 마주 쳐다보았다.
"능력이 뭔가?"
"아직 확인 못했어요."
"갓 들어온 녀석을 받을 수는 없어."
"대신 얘가 강해질 때까지, 제가 얘 몫까지 할게요."
수현이 세연을 쳐다보았다. 세연은 곧은 눈으로 요한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호의를 받아도 되는 걸까. 수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뇌전의 마녀가 이렇게까지 해준다면, 우리야 마다할 수 없지. 세연 양은 본인의 생각 이상으로 귀중한 존재니까."
요한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십자가 모양이 달린 목걸이였다. 교회의 그것과 달리 네 다리의 길이가 같다. 금속의 빛깔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데, 그 사이에 희미한 녹빛이 번져들었다. 아름다웠다. 그것을 하나씩, 수현과 세연의 앞에 떨어뜨린다.
"여기 십자가에 피를 떨어뜨려."
세연이 말했다.
"그래. 그럼 둘은 철십자 클랜의 가족이 되는 거야."
수현이 요한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그의 왼쪽 귓가에서 흔들리는 귀걸이는 이것과 같은 십자가였다. 고리에서 목걸이 줄을 떼어내고 귀에 건 것 같았다. 이따금 흐붓이 떠오르는 은녹빛이 아름다웠다.
세연이 먼저 십자가를 집어들었다.
그녀가 낮게 숨을 내쉬고는, 엄지를 입에 물었다. 피를 내어 그 위에 떨어뜨리려는 것이다. 그녀가 이에 힘을 주려는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머. 뭐하는 거니?"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정하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도망치려고?"
한기가 내려앉았다.
정하의 등장과 동시에 수현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털이 곤두서는 한기가 엄습했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조용히 품에 손을 넣는다. 덜덜덜, 떠는 것은 휴대폰이었다.
문자 메시지가 와 있다.
[ 담임선생님 - 이수현 이 미친놈아 어디야 죽고 싶냐 ]
담임의 전언이었다. 수현은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