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글의 게임-2화 (2/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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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서진 세계

오래된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다. 꿈에서 본 것들이 실재했던 광경인지, 그저 뒤섞인 꿈결의 잔상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운만 먹먹하게 남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현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기분 더럽네."

그리고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래. 내 수업이 기분 나쁘니, 수현아?"

수현은 대답하기도 전에 뒤통수를 쳐맞았다.

"아흑!"

"뭐 임마. 자는 거 깨웠더니 기분 더럽다고?"

"어, 죄송해요. 잠결에 헛소리가……."

"나가서 엎드려, 새꺄."

뒤통수를 한 대 더 맞았다.

수현은 중년의 국사선생 해두산, 일명 헤드샷이 더 트집 잡을 새라 튀어나갔다. 학급생들이 웃었다. 수현은 교실 뒷문을 닫으며, 소희도 킥킥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 쪽팔린다. 하지만 킥킥대는 얼굴도 예쁘네.

둘러보니 다른 복도 끄트머리에도 몇 녀석이 쫒겨났는지 무릎 꿇고 시간을 죽이는 게 보였다. 수현은 아예 엎드리지도 않고 엉덩이를 포개 벽에 기댔다. 복도의 커다란 창 바깥으로 하늘이 새파랗다.

헤드샷이 교과서를 주문처럼 줄줄 외는 게 들렸다.

저런 지루한 수업으로 사람을 재워놓고, 조금이라도 졸면 가차 없이 헤드샷이라니, 부당하다. 수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휴대폰을 열었다. 액정에 메세지가 떠올라 있다.

[ 이소희 - 머리 괜찮아? ㅋㅋㅋ ]

수현은 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다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콘크리트 벽에 뒤통수를 비비며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냥 괜찮다고 하면 심심하겠지? 뭐라고 할까. 소희가 나한테 문자하다니. 몇 번 주고받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적인 용무를 소희가 보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한다.

"에잉, 교실에 먼지가 왜 이렇게 많나. 밖에 이수현! 자냐?"

헤드샷이 불렀다.

"안자요 쌤!"

"밀대 빨아와서 교실바닥 좀 닦아라."

"……예."

에라이. 수현은 소희에게 대충 답장해주고 터덜터덜 화장실로 걸어갔다.

학교는 건설한지 얼마 안되어 시설이 좋다. 변기도 좌식이고 갓 개장한 전철역만큼이나 화장실이 깨끗하다.

다만 밀대라던가, 학생들이 쓰는 소모품은 개판이지. 탈모 마냥 듬성듬성 숱이 다 빠져 초라한 밀대를 물살에 씻어내며 수현이 투덜거렸다. 이걸로 닦으면 끽끽거려서 욕먹을 거 같은데.

물기를 머금은 밀대를 짓밟아 물기를 짜내는 순간이었다.

희미하게 철썩, 하고 소리가 들렸다.

수현이 갸웃하며 화장실 창쪽을 쳐다봤다가, 밀대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을 나서는 찰나였다.

다시, 철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보다 크다.

사람의 살과 살이 부딪쳐 생기는 파열음을 연상시킨다. 수현이 걸음을 멈췄다.

철썩!

수현이 밀대를 팽개치고 화장실 창으로 걸어가 바깥을 둘러보았다.

창문이 향하는 쪽은 학교 뒤켠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아 불량아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수현이 건물 아래를 살피다가, 저 구석, 그늘 안의 풍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건 뭐야.

수현은 뭐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진짜다.

한 여자가, 소녀의 멱살을 붙잡아 허공에 들어올린 채 따귀를 올려붙이고 있었다.

여인은 행색도 독특하다. 지금 당장 파티에 참석하러 갈 것 같은 섹시한 검은색 미니 드레스였다. 드러난 목선이 고혹적이다. 스커트는 허벅지 위로 껑충 올라와 그녀의 새하얀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늘씬하게 잘 빠진 각선미였다. 그 아래로는 높은 킬힐이 고혹적으로 그녀의 다리를 떠받친다. 수현이 그녀의 다리를 훔쳐보는 사이 소녀는 따귀를 한 대 더 맞는다.

철썩!

진짜 아프겠다.  소녀는 수현과 같은 학교 교복이었다. 그녀의 뺨은 부어올랐고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수현은 일단 달려갔다. 계단을 날다시피해서 뛰어내리고, 후다닥 달려 그녀들이 있는 학교 뒤뜰 구석으로 달려간다. 저런 소란이 일고 있는데, 학교는 유달리 조용하다. 수업시간이라고는 해도 이상하리만치 적막에 잠겨 있었다. 한낮에 빈 학교를 혼자 내달리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수현이 다가가자,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가는지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소녀의 몸뚱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발을 내딛어 킬힐을 소녀의 곁에 들이대고는 허리를 굽혀 명령했다.

"네가 더럽혔잖아. 핥아."

"웃기지…… 마."

그러자 여인이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소녀는 반항적으로 대답했지만 계속되는 폭력에 질렸는지 흠칫 몸을 움츠리며 눈을 감았다.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여인은 손을 잠시 거두었다.

"제법 대가 세구나? 자꾸 반항하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

"꺼져."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러는 거야?"

여인이 웃었다. 그러자 입술틈으로 비죽이 튀어나온 가늘고 긴 송곳니가 드러났다. 수현은 그 이질적인 모양새에 소름이 돋았다.

"내 능력은 종속. 지금이라도 고분고분하면 노예로 잘 대해줄게. 하지만."

여인이 킬힐을 들어 소녀의 허벅지를 짓밟았다. 소녀가 신음했다.

"계속 반항하면, 노리개로 돌려버린다. 계집애야."

"흐, 힛, 해보시지."

소녀가 애써 비웃으며 받아치지만 힘이 없다. 약간은 자포자기한 것 같기도 했다.

뺨을 되게 얻어맞아 한쪽 볼이 부어올랐지만, 언뜻 보기에 굉장히 예쁘다. 저정도면 유명할 텐데, 수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수현은 자초지종은 모르지만 일단 한 걸음 내딛었다.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거기 뭐하는 짓이에요?"

동시에 둘이 수현을 쳐다보았다. 예상 이상으로 깜짝 놀란 표정들이다. 여인은 그렇다치고 소녀도 저런 표정이라니, 수현은 조금 실망했다.

"지금 학교에서 학생 때리는 거에요?"

수현이 성큼성큼 다가가 여인을 소녀에게서 떼어내려 했다.

그런데 힘이 엄청 세다. 절대 움직이지를 않았다. 팔씨름하면 질 거 같다. 수현은 낑낑대면서 쪽팔렸다. 코앞에 여자애가 있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여자애는 멍한 표정으로 수현을 말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흘끗 명찰을 확인하니 이름은 주세연, 2학년 선배였다.

동시에 반대편에서부터 진한 향수 냄새가 번져들었다. 고혹적이고, 나른한 향이었다.

"뭐야, 이건?"

여인이 손을 떨쳤다. 수현은 순간 떠올라 벽으로 날아갔다.

"흐앗!"

벽에 퍽 부딪치고 나동그라졌다. 뼈가 울리는 고통 속에서, 수현은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말도 안된다. 이건 만화에나 나오는 장면 아닌가. 겨우 한 대 맞았다고 사람이 벽으로 날아가 부딪쳐 떨어지다니. 수현은 비칠비칠 일어서며 어깨를 부여잡았다. 측면으로 부딪쳐서 오른팔 전체가 욱씬거렸다. 시야가 흔들거린다. 그런 와중에도 수현은 여인의 늘씬한 다리에 시선을 빼앗긴다.

"너, 어떻게 온 거니?"

여인이 소녀를 내버려두고 수현에게 다가왔다. 수현은 뒷걸음질치다가 발이 걸려 주저앉고 말았다. 여인이 수현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뜬다.

그녀를 올려다본다. 여자인데 키가 되게 크고 늘씬했다. 복장도 타이트해서 고혹적인 몸매가 다 드러나, 마치 모델 같았다. 특히 수현이 주저앉은 채였으므로 짧은 드레스 아래로 흰 허벅지가 다 보였다. 조금만 더 고개를 숙이면 그 안에 자리한 팬티가 보일 것도 같은데…….

"어떻게 결계를 뚫었냐고 묻잖아. 인간."

여인이 발을 들었다. 킬힐이다. 날카로운 힐로, 수현의 왼쪽 어깨를 콰직, 밟았다. 그다지 힘을 준 것 같지 않은데도 수현은 어깨가 부서지는 격통을 느꼈다.

하지만, 무릇 정신은 육체를 지배하는 법.

수현은 육체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었다. 전혀 아프지 않다.

자신을 밟는 순간, 수현은 보고 말았다.

"……노팬티!?"

"……!"

여인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기다란 송곳니가 입술 사이로 튀어나오며 감정이 격앙되었다. 그녀가 다시금 수현을 짓밟으려 킬힐을 들어올렸다.

그러다가, 수현을 밟기 직전 발을 거두었다. 방금의 수치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었다.

"다, 다시 봐도 노팬티……."

수현은 난생 처음으로 여인의 비밀을 맨눈으로 목격하고 말았다. 그것도 성격은 최악이지만 연예인 이상으로 예쁜 엄청난 미녀다. 여한이 없다. 손을 가슴에 얹는다.

"이 발정난 돼지새끼가!"

그녀는 더 격분해서 수현의 멱살을 쥐고 들어올렸다. 수현은 너무나 쉽게 허공에 떠오른다. 수현은 디딤발이 허전해지는 가슴 철렁한 기분을 맛보았다. 여인은 그대로 반대편 벽으로 수현을 집어던진다.

"으아앗!"

하지만 벽에 부딪쳐 뼈마디가 산산조각나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수현은 날아가던 그대로 멈추어 허공에 떠오른 채, 빙글 돌아,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정하. 날 잊었어?"

소녀, 세연이 오연히 서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얽어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허공에 보라색의 동그란 도형이 떠오르고, 그 안에 수많은 문자들이 빙글거리며 들어차기 시작했다. 빽빽하게 속을 메우고는 이내 하나의 마법으로 기능하기 시작해, 그녀의 진식이 서서히 회전한다.

여인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몸을 숙였다. 그러자 그녀의 등에서 흩날리는 커튼과 같은 검은 날개가 펼쳐졌다. 그녀가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어딜!"

그녀의 마법진에서 짙푸른 뇌전의 용이 튀어나오더니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온 공기가 파직거리고 터럭이 곤두선다. 여인이 날개로 몸을 휘감아 보호하자, 뇌전의 용은 그녀의 주위를 멤돌며 전기를 일으켰다. 날개로 감쌌다고는 하나 타격이 있는지, 여인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수현은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게, 현실인가?

"야! 너!"

세연이 수현의 교복 뒷덜미를 붙잡고 질질 끌었다. 수현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따른다.

"어디 가요?"

"도망쳐야지! 여기서 죽고 싶어?"

그리고는 소녀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그녀의 손아귀에 동화에 나올 것만 같은 마녀 빗자루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그곳에 올라타고는 수현을 강제로 매달리게 했다.

"꽉 잡아!"

"잠깐,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같은데……."

날았다.

빗자루가 날았다.

수현은 비명을 질렀다.

등 뒤에서, 뱀파이어 여인의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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